[연중 제21주간 목요일]깨어 있어라 (마태 24,42-51)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인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를 빈다.(1코린 1,1-9)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오로와 소스테네스 형제가 2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다른 신자들이 사는 곳이든 우리가 사는 곳이든 어디에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3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4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며, 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어떠한 말에서나 어떠한 지식에서나 그렇습니다.
6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에 튼튼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7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8 그분께서는 또한 여러분을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9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에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신다.(마태 24,42-5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2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43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4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45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46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8 그러나 만일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49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50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51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연중 제21주간 목요일 독서 (1코린1,1-9)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7)
코린토 교회에 대한 바오로의 또 다른 감사의 조건은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은사'로 번역된 '카리스마티'(charismati)는 문맥에 따라 '구원'(로마5,15), '일반적인 하느님의 선물'(로마11,29), '성령의 특별한 능력'(1코린12,4) 등의 의미를 지닌 '카리스마'(Charisma)의 여격이다.
본절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특별한 은사들이 구체적으로 거론되지 않으므로, 여기서 언급된 은사는 특별한 은사들을 염두에 두었다기보다는, 코린토 교회에 있는 여러 은사 및 넓은 의미의 '구원'이란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본문은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은사를 주셨으며, 구원받기에 필요한 것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부요하게 하셨다는 의미가 된다.
한편, 바오로는 '어떠한~~부족함이 없이'로 번역된 '메 휘스테레이스타이~메데니'(me hystereisthai en medeni)에서 부정어 '메'와 '메데니'란 이중 부정어를 사용하여, 코린토 교인들이 풍성한 영적 은사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특히 여기서 '휘스테레이스타이'(hystereisthai)는 본래 '필요한 것이 부족하다'라는 뜻을 지닌 원형 '휘스테레오'(hystereo)의 부정사이다. 이는 교회의 통상적 수준과 비교해서 부족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1코린16,17; 골로1,24; 1테살3,10), 더 풍부하게 부여받은 다른 교회들과 비교해서 부족하다는 뜻일 수도 있다(2코후11,5; 12,11).
본절은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코린토 교회가 이 양면, 즉 교회의 통상적 수준이나 타 교회와 비교할 경우, 그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뒤지지 않는 교회였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단적으로 말해, 코린토 교회는 지상의 모든 교회가 염원하는 풍성한 구원의 은혜를 받았으며, 모든 은사들에 있어서도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하느님께서 코린토 교회에 구원의 복음을 선물로 제공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영적 은사들까지 부족함없이 베푸셨다는 사실을 잘 나타낸다. 이처럼 표면적으로 볼 때, 코린토 교회는 그 어느 교회보다 구원의 은혜와 성령의 은사가 넘쳐나는 교회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7)
원문을 보면, 본문 앞에는 쉼표가 있으므로, 상반절과 구분되는 코린토 교회에 대한 바오로의 또 다른 감사 조건이다. 그것은 코린토 교인들이 재림의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나타나시기를'로 번역된 '아포칼립신'(apokalipsin)은 '~으로부터 멀리 떨어져'란 뜻의 전치사'아포'(apo)와 '덮다'.'감추다'라는 뜻이 들어 있는 '칼립토'(kalipt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덮개를 벗김','드러냄','묵시'(계시)란 뜻을 지닌 '아포칼립시스'(apokalipsis)의 목적격으로 본절에서는 감추었던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종말론적인 용어로 쓰였다.
즉 본절에서 이 단어는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그리스도께 대한 진리는 완벽한 것이 아니어서 종말에 이르러서야 그 궁극적 의미가 완전히 드러날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이란 바로 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 즉 종말의 때를 '기다리는'이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로 번역된 '아펙데코메누스'(apekdechomenus)는 여기서 강조를 나타내는 접두어로 쓰인 '아포'(apo)와 그 자체로 이미 '기다리다'(요한5,3),'바라다'(히브11,10)란 의미가 있는 단어 '엑데코마이'(ekdechomai)의 합성어로서,'열심히 그리고 끈기있게 기다리다'(1베드3,20; 로마8,19.23.25; 갈라5,5)라는 뜻을 지닌 '아펙데코마이'(apekdechomai)의 현재 분사형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코린토 교인들의 계속되는 강렬한 열망을 나타내고 있다.
당시 코린토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을 굳게 믿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약속이 머지 않아 이루어질 것이라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이러한 종말에 대한 열망이 지나쳐 자칫 잘못된 신앙관을 가질 우려가 많았지만, 바오로는 일단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그들의 신앙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분께서는 또한 여러분을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8)
앞의 4-7절에서 바오로는 코린토 교회의 긍정적인 측면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나타내었다. 이제 이어지는 8-9절에서는 이러한 코린토 교회를 성실하신 하느님께서 굳세게 지키시라는 바오로의 확신이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코린토 교회를 끝까지 굳세게 할 주체가 '그분께서는'으로 번역된, 관계대명사 '호스'(hos)로 나와 있는데, 이러한 '호스'는 9절과 관련지어 '하느님 아버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견고케 하실 것입니다'의 의미가 된다.
한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라는 표현은 바오로 서간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는 전문 용어로 나온다. 이 날은 믿는 자들에게는 축복의 날이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1코린3,13; 4,3; 아모5,2)이다.
이 표현은 아모스 5장 18~20절이나 요엘서 2장 31절 등에서 표현된 '주님의 날'을 바오로가 그리스도론적으로 차용한 것으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심판하신다는 사상(사도 17,31; 로마2,16)함축한다.
이 마지막 심판의 날은 그리스도께 대한 봉사 뿐 아니라 그 봉사하는 마음의 목적과 동기까지 드러나는 날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마지막의 날을 불안과 염려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희망으로 고대한다.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로 번역된 '아넹클레투스'(anengkletus)의 원형 '아넹클레토스'(anengkletos)는 '고소하다','비난하다'라는 뜻을 지닌 '엥칼레오'(engkaleo)와 부정 접두어 '아'(a)의 합성어로 '비방할 수 없을 만큼 흠이 없는 상태'를 지칭한다.
당시 코린토 교인들에게는 여러 가지 과오가 있었으나 장차 흠없는 상태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의 흠없기 위한 노력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끝까지 세우시는 하느님께서 성실하시기 때문이다(9절).
본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란 표현과 더불어 언급된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이라는 표현은 현재의 의로움과 구원의 의미라기 보다는 미래의 종말론적 '성화의 완성' 혹은 '영광'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적절하다(로마8,28-30).
한편,'굳세게 하시어'로 번역된 '베바이오세이'(bebaiosei)는 이미 6절에서 언급된 '튼튼히 자리를 잡은'으로 번역된 적이 있는 동사로서 '베바이오오'(bebaioo)의 미래형이다.
희랍어에서 미래형은 가정법과 달리 확실한 미래의 사실을 나타낼 때 주로 쓰인다. 본문에서도 이것은 하느님의 흔들리지 않는 약속의 효과를 나타낸다.
바오로는 이미 4-7절에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코린토 교회에 풍성하고 부족함없이 은사를 베풀어주신 사실에 대해 감사했고, 9절에서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에, '베바이오세이'가 '베바이오오'의 미래형으로 단순히 바오로의 소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확신을 선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영적 분별력과 통찰력, 지각력이 뛰어난 바오로는 코린토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반드시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사실을 확정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연중 제21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24,42-51)
"깨어 있으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42~44)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알지 못하는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할 지를 교훈하는 내용이다. '깨어 있으라'에 해당하는 '그레고레이테'(gregoreite; stay awake!)는 '지켜보다', '주의하다', '경계하다'라는 뜻을 가진 원형 '그레고류오'(gregoreuo)의 현재 명령형이다.
여기서 '지켜 보다'의 뜻은 단지 심판의 날을 눈을 뜨고 지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신차리고 주의하여 그날을 예비하라는 의미이다.
무관심과 나태, 영적인 깊은 잠에 빠져서 그날을 갑작스럽게 당황해 하며 맞이하지 말고 (1테살 5,3) 영적으로 각성하여 언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든지 주님을 맞을 준비가 된 상태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동사가 현재 명령형이라는 것은 그러한 상태를 항상 현재처럼 유지하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도 항상 자신이 살아가는 현재에 그런 일이 일어날 것처럼 예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을 명심하여라'에 해당하는 '에케이노 데 기노스케테'(ekeino de ginoskete; but understand this; but know this)에서 '기노스케테'도 원형 '기노스코'(ginosko)의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 보아 '그러나 너희들은 이것을 알라'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에 해당하는 '포이아 퓔라케'(poia phylake; at what time of night; the hour of night when)에서 중요한 단어는 '퓔라케'(philake)이다.
'경점'(更點)으로 번역될 수 있는 '퓔라케'(phylake)는 망루나 성문에서 파수를 보는 병사가 경계하며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퓔랏소'(phylasso)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경계하는 것', '파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약에서는 46회 용례 중에서 36회가 '감옥'(prison)으로 번역되었는데, 감옥은 보초병이 죄수들의 동태를 지키기 위해 잠자지 않고 경계 근무를 서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보호병이나 성(城)의 파수병이 경계 근무를 서면서 교대병과 교대하는 시간을 나타내는 의미로 쓰였다.
하루의 저녁 6시부터 다음 날 새벽 6시를 '밤'으로 규정한다면, 이스라엘은 이 밤을 세부분으로 구분하였고, 로마의 지배 이후에는 밤을 네부분으로 구분하였다.
사실 도둑이 들어오는 시간을 현실적으로 아는 것이 불가능한 시간이다. 그 시간은 오전히 도둑의 마음에 달려 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재림하시는 시간을 도둑의 시간에 비유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역사의 한 시점을 선택하여 재림할 것인데, 당신이 몸소 심판을 주도하신다는 뜻을 계시한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for at an hour you do not expect, the Son of Man will come)라고 마태오 복음 24장 44절 후반의 동사가 미래적 의미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올 것이기'에 해당하는 '에르케타이'(erchetai)는 원형 '에르코마이' (erchomai)의 현재 시제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재림은 매우 긴박한 일이며, 항상 현재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마태오 복음 24장 37절 이하에는 사람의 아들의 재림 때에도 노아 때처럼,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도 모르는 일과 같이 그럴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우리는 너무나도 자신의 영혼의 구원 문제나 생명의 말씀에 관심없이 이 땅에만 머리를 박고 세속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영원을 놓칠 수 있는 가능성이 100%이다.
지구가 멸망하든, 태양계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든, 핵전쟁이 일어나든, 어느 분들이 에언한 것들이 그대로 내 눈 앞에서 이 지구상에 이루어지든 우리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처럼 한 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어야 한다.
주님 재림 시기의 불(不)예측성처럼 나의 개인적 죽음의 시간도 불(不)예측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언제 어떻게 죽고, 언제 주님께서 오시든지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문제는 그런 일이 필연적으로 일어났을 때의 나의 영혼 상태가 중요한 것이다.
주님 심판 대전에 할렐루야로 응답할 수 있어야 하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이것이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러면 미리미리 우리 영혼이 은총의 지위를 회복하여야 하고, 그 은총의 지위를 잘 관리해야 하고, 먼훗날 우리들의 모습속에서 성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 예수님의 모습과 성모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기뻐하시고 안아주실 수 있도록 그분 뜻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
신자 분들이 저에게 이것저것 잘 해주시는 것들을 보며 어떤 분들은 질투가 나서인지 “인기관리 잘 하시네. 비결 좀 알려줘요.”라고 하시기도 합니다.
“전 그런 거 안 해요.”라고 말했을 때, 어떤 분은, “그래도, 신자 분들 잘 새겨 놓으세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예? 왜요?” “지금부터 그런 거 잘 해 놓으셔야, 나중에 은퇴하셨을 때 ... ”
사제가 된 지도 몇 년 안 되는데 벌써 은퇴걱정을 해야 하는 건지, 말문이 막힙니다.
물론 예전에도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웠고, 지금도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예전과 조금 생각이 바뀐 것이 있다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계획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다.’입니다.
전 처음부터 사제가 되고 싶지도 않았고, 유학을 나와 공부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사제가 되어서는 절대 다시 나오려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항상 나의 계획 반대로만 저를 이끄셨습니다. 그러니 지금 계획을 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우리 인생은 하느님 손아귀에 있습니다. 꿈틀거려봐야 그분의 섭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주면 받고 가져가시면 그것 또한 찬미하면 그만입니다.
묵상을 하다보면 온갖 잡생각들이 많이 듭니다. 대부분은 전혀 유용하지 않은 생각들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 미래에 대한 일어나지 않은 일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공상들까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시간을 허비하곤 합니다.
학생이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면 선생님의 말씀이 잘 들리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분심 중에 있을 때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나 명상은 집중력을 키워주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적어도 잡념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집중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심이 든다고 기도를 아예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빨래가 마를 때, 햇빛이 비추면 잘 마르고 바람이 불면 더 빠르게 마릅니다. 햇빛이 있는데도 바람이 안 분다고 빨래를 널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분심이 든다고 그 분을 만나는 시간을 아예 포기한다면 더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쨌건 바람이 안 부는 것보다 부는 것이 빨래말리는 시간을 많이 단축시키는 것처럼, 집중을 하지 않는 기도는 반쪽만 주님을 만나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깨어있지 못한 것입니다.
깨어있는다는 말은 ‘현재를 산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가끔 물건을 어디에 놓아두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물건을 놓아두는 순간에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려있어서 깨어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현재 시간에 집중했다면 물건을 어디에 놓아두었는지 반드시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항상 깨어있으라고 하시는 말씀은 평상시에 온갖 공상으로 살지 말고 지금 현재에 집중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미래를 위해 재산을 모으다가 바로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를 살라는 말씀은 더 구체적으로는 바로 오늘 내가 죽는다고 생각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죽음이 아주 먼 미래에 올 것 같다는 착각으로 사는 것도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사제가 굳이 미래를 위해 신자들을 잘 사귀어 놓고 돈을 모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미래의 모든 일들이 바로 오늘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 속에서 살아가야합니다.
제가 이렇게 묵상을 올리는 이유도 어쩌면 죽음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어떤 분이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꼭 신자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중은 없습니다. 바로 ‘지금’ 해야 합니다. ‘나중에 회개하면 되지!’라는 생각은 버려야합니다. ‘나중’을 생각하는 순간이 바로 잠을 자고 있는 때입니다. 나중을 생각하며 현재를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깨어나십시오. 그리고 현재를 사십시오.”
현재 이 순간을 살지 않는다면 지금 후회하는 과거나, 앞으로 계획하는 미래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과거도 현재를 위해 있는 것이고 미래도 현재가 있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모든 시간은 현재를 위해 존재하고, 하느님에겐 모든 시간이 현재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영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오늘 하루가 우리 마지막 날인 것처럼 죽음을 준비하는 꽉 찬 하루를 살아내기를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도 소원하던 내일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내일을 자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을 살아갑시다. 오늘을 살 때, 영원을 사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도둑의 비유와 충실한 종의 비유로 깨어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첫째 비유에서 ‘깨어 있음’의 형태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둘째 비유에서는 주인에게 받은 사명을 수행하는 충실한 종의 자발적인 깨어 있음을 다룹니다.
깨어 있음의 비유에서 선포된 그리스도의 마지막 오심은 확실하면서도 불확실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것은 확실한데 언제 오실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때’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 깨어 있음의 핵심입니다.
사도 시대의 몇몇 공동체는 예수님의 재림이나 두 번째 오심을 열렬히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세상 종말에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당신의 생명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불러 주신다고(1코린 1,7-9 참조) 코린토인들을 격려합니다. 지나치게 윤리적, 개인적인 성향의 종말에 대한 과거의 관점은 그리스도인의 죽음과 최후 심판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과 걱정을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깨어 있어야 하는 목적도, 구성 요소도 아닙니다.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에게 두려움의 이유가 아닌, 신뢰에 가득 찬 깨어 있음, 그분과 만남을 기다리며 느끼는 타오르는 염원과 기쁨의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맡기신 인간 역사의 흐름은 주님의 날에 정점에 이릅니다. 그때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이 실제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