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간 금요일] 등과 기름 (마태25,1-13)

2018. 8. 31. 오전 6:5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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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간 금요일] 등과 기름 (마태25,1-13)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한다고 말한다.(1코린 1,17-25)
형제 여러분,
17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18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19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부수어 버리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를 치워 버리리라.”
20 지혜로운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논객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21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22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25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다고 하신다.(마태 25,1-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독서 (1코린1,17-25)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8)

 

코린토 1서 본론의 서두인 1장 10-17절은 코린토 교회 내의 분열의 실상과 그 부당성을 지적하며 책망하는 내용이다.

이제 이어지는 18절 이하부터 4장 21절까지, 하느님의 절대적 지혜로 된 '십자가에 관한 말 '<십자가의 도(道)>의 유일성에 대한 가르침인데, 이 논리를 가지고 몇 가지 측면에서, 교회의 분열이 부당하며 불의하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그 첫번째 단락인 1장 17절부터 1장 25절까지는, 특히 교회의 설립과 통합의 유일한 기반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설파하고 있다.

 

한편, 새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원문에는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가르'(gar)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것을 '왜냐하면'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럴 경우, 본절은 앞서 17절에서 밝혔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바오로가 말재주(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십자가에 관한 말씀'<십자가의 도(道)>가 하느님의 힘(능력)이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십자가에 관한 말씀'<십자가의 도(道)>로 번역된 '호 로고스 가르 호 투 스타우루'(ho logos gar ho tu stauru; for the preaching ot the cross)문자적으로 '그 십자가의 말씀'이라는 뜻으로, 17절에 언급된 '소피아 로구'(sophia logu) 말의 지혜(말재주)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바오로는 이러한 대조적 표현을 사용하여, 당시 '말의 지혜' 곧 철학적 논증 등에 대해서 지나치게 치우쳐 있는 코린토 교인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온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강력하게 천명하고 있다.

 

복음은 말의 지혜나 철학적 논증에 머무를 수 없는 그리스도의 계시이다(갈라3,1). 이러한 성격을 갖는 복음에 대한 평가나 결과는 이중적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 되지만, 구원을 받을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힘(능력)이 된다(2코린2,15-16참조).

 

여기서 '멸망할'로 번역된 '아폴뤼메노이스'(apollymenois)'멸망시키다','파괴하다' 뜻을 지닌'아폴뤼미'(apollymi)의 현재 분사형이며, '구원을 받을'로 번역된 '소조메노이스'(sozomenois) 역시  '구원하다'를 뜻하는 원형 '소조'(sozo)의 현재 분사형이다.

 

그런데 여기서 현재 분사는 지속적임을 보여주므로, 이러한 표현은 파멸의 길과 구원의 길에 서 있는 자들의  상태가 영구적임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즉 바오로는 본절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이루어지는 영원한 멸망과 영원한 구원이 날카롭게 대립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하느님의 힘' 번역된 '뒤나미스 테우'(dynamis theu)는 로마서 1장 9절에 등장하는 과 동일한 표현으로, '어리석은 것'(모리아; moria; 미련한 것)이라는 표현과 대조적으로 사용되었다(1코린4,20).

 

즉 바오로에게 있어서, 어리석은 것 즉 미련한 것은 '말재주'나 '하느님의 지혜'와 대조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능력)과 대조된다. 이것은 바오로의 독특한 복음에 대한 이해이다.

 

여기서 '힘'(능력)으로 번역된 '뒤나미스'(dynamis)신체적,지적,영적 능력을 포함한 총체적 능력 지칭하며, 바오로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는 '우주의 원리로서의 생명력' 의미하기도 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서는 전능함과 생명력을 지닌 그리스도의 힘과 권능 나타낼 때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나 본절의 경우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말이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하느님의 초월적이며 생명력을 갖는 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25,1-1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하고 대답하였다." (3~4.9)


마태오 복음 25장은 24장과 더불어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받으시기 사흘 전에 주신 올리브산에서의 말씀이 계속되는 부분으로서, 특히 도둑의 비유, 두 종의 비유인 충성된 종과 악한 종의 비유(마태24,42~51)와 더불어 종말을 대비하는 성도의 자세에 대해 교훈하는 세 가지 비유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세 가지 비유란 '열 처녀의 비유', '탈란트의 비유', '양과 염소를 나누는 임금의 비유'를 말한다.


여기서 '천국은 마치 ~~에 비길 수 있다'는 것은 천국이 열 처녀에 비유되는 것이 아니라 열 처녀가 신랑을 맞이하는 상황에 비유되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다의 혼인 풍습신랑이 신부의 집에 들러 간단한 종교적 의식을 치른 후, 신부와 신부의 들러리들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가 혼인 잔치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신랑의 집이 먼 경우에는 신부의 집에서 혼인 예식을 치루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본 장에 있어서의 혼인 잔치는 어느 곳에서 벌어졌는지 명확하지가 않다.

문맥의 흐름으로 보면, 혼인 잔치는 신부의 집에서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기름을 예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가 나중에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요청했을 때 그 요청을 거부한 사람이 신랑이었던 사실(11~12절)에 비추어 보면, 혼인 잔치는 신랑 집에서 베풀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만일 혼인 잔치가 신부 집에서 신부 집에서 베풀어졌다면,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요청을 거부하는 주체가 신랑이 아닌 신부의 아비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혼인 잔치가 어디서 열렸는지 단정할 수 없다.

그리고 당시 유다 관습에 의하면, 혼례식은 보통 해가 진 이후에 시작되었다.


이때 신부의 들러리들은 신부의 집 문 밖에 나가서 등을 들고 있다가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에 당도하면 영접하였다.

그런데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신부집에 가는 시간은 정확하게 정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신부의 들러리들은 신랑이 늦어질 것을 대비해서 등이 꺼지지 않도록 충분한 기름을 준비해야 했다.

특히 본문에서 신랑이 예측치 못한 시간에 온 것이 강조되는 것종말, 또는 모든 성도들의 신랑이 되시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예비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여기서 신부의 들러리인 열 처녀가 들고 나간 '등'으로 번역된 '람파다스'(lampadas)수지질의 소나무로 만든 횃불이나 등불, 또는 심지를 꽂아서 쓰는 속이 등근 접시나 기름병을 의미하는 명사 '람파스'(lampas)의 목적격 복수로서 '여러 개의 등'이다.


원문에는 이 단어 뒤에 새 성경이 번역하지 않은 단어 '헤아우톤'(heauton)이 있다.

'헤아우톤'(heauton)여성 3인칭 복수 소유격 재귀 대명사로서 '그녀들 자신들의'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열 처녀는 모두가 각자 자기 자신의 등을 들고 나갔다.


여기서 '나간 장소'가 신부의 집인지, 처녀 자신들의 집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이것은 이 비유의 전개에서 크게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본 비유에서 '신랑'으로 번역된 '뉨피우'(nymphiu)의 원형 '뉨피오스' (nymphios)라는 단어는 재림하실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다(11절).

따라서 비유에서 신랑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도는 신부가 아닌, 들러리 처녀 열 명이다.


당시 신부의 들러리는 신부의 친구들이 맡았으며, 들러리들이 드는 등불은 모두 열 개라고 한다.

유다인들은 이상적인 숫자, 완전 숫자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회당에서의 공식 집회도 열 명이 참석하지 않으면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비유에서도 그러한 풍습에 따라 들러리 처녀들이 열 명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신랑되시는 예수님의 재림은 열 처녀로 상징되는 '모든 성도'가 대비하고 준비해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재림 앞에서 단 한명도 열 처녀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따라서 슬기로운 처녀가 아니면 어리석은 처녀에 해당하는 결과를 맞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어리석은'으로 번역된 '모라이'(morai; foolish)의 원형 '모로스'(moros)신중하지 못하고 예측 능력이나 지혜가 결여된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이며, '슬기로운'으로 번역된 '프로니모이'(phronimoi; wise) 신중하고 사려깊으며 분별력이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그리고 여기서 쓰인 동사 '에산'(esan; were) 반복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이것은 신부의 들러리 처녀들의 개인적인 성향이 항상 그러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결국 다섯 처녀들은 항상 신중하지 못하고 선견지명이 없는 자들로 살아왔기 때문에 신랑을 맞이하는 날에도 평소처럼 자신이 지니고 있는 성향을 그대로 자연스럽게 드러낸 것이며, 반대로 다른 다섯 처녀들도 평소의 삶의 자세가 사려깊고 분별력이 있으며 신중했기 때문에 그러한 태도가 신랑을 맞이하는 날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던 것이다.

여기서의 교훈은 우리가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주님의 재림의 때에 어떠한 자들로 드러날 것인가가 판가름난다는 것이다.


이제 마태오 복음 25장 3절에는 열 처녀들이 왜 어리석고 슬기로운지를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어 밝힌다.

등을 밝히기 위해서는 등은 물론 기름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이 늦어질 것을 대비해서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던 반면에,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을 준비했을 뿐 여분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메트 헤아우톤'(meth heauton; with them)'그녀들 자신들과 함께' 또는 '그녀들 자신들 곁에'라는 뜻이다.

이것은 들러리 처녀들이 등을 밝힐 여분의 기름을 반드시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충고해 주는 표현이다.

그리고 '엘라이온'(elaion; oil)'올리브 나무'(olive tree)를 의미하는 '엘라이아'(elaia)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올리브 기름'을 뜻한다.

 

이 기름은 팔레스티나에서 나는 대표적인 산물로서 등불을 밝히고(2열왕4,10) 병을 치료하는데(루카10,34), 그리고 귀한 손님의 머리에 부어 예의를 시하는데(루카7,46) 사용되었다.

 

이 기름에 대해서 어떤 학자는 '믿음'을 상징한다고 보고, 어떤 학자는 믿음에 대응하는 '선행'이라고 주장한다. 

또 어떤 학자는 기름이 성별 의식에 사용된 물질이라는 것과(즈카4,12) 성령이 기름으로 상징된다(루카4,18)는 사실에 근거해서 기름은 내면적 신앙의 모습'성령의 능력과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마태오 복음 25장 4절은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이 왜 슬기로운지를 보여 준다. 

여기서 '그릇'으로 번역된 '앙게이오이스'(anggeiois; jars)의 원형 '앙게이온'(anggeion)플라스크와 같은 휴대용 병 말하는데,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이 늦게올 것을 대비하여 말고도 여분으로 플라스크 같은 병을 하나 더 준비하여 거기에 기름을 담아가는 준비성을 갖추었다. 

그래서 설사 기름이 다하여 등불이 타다 꺼지더라도 여분의 기름으로 계속해서 등불을 타오르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 5절에 '신랑이 늦어지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 당신의 재림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늦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지체되는 이유는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베드로 2서 3장 9절이 이것에 대해 분명히 밝혀준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도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연되는 주님의 재림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들어 방종에 흐르는 기회로 이용될 수 있음베드로 2서 3장 3절과 4절이 밝혀주고 있다.


"마지막 때에, 자기 욕망에 따라 사는 조롱꾼들이 나와서 여러분을 조롱하며, "그분의 재림에 관한 약속은 어떻게 되었소? 사실 조상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창조 이래 모든 것이 그대로 있지 않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 7절에서 '우리 등이 꺼져 가니'라는 표현은 주님께서 오시는 역사의 깊은 밤중에 성령의 불길이 소멸해가는 사람이 적지 않음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1테살 5,19)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 9절의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라는 표현은 슬기로운 처녀들이 기름을 나누어 주면 둘 다 등불을 켤 수 없을 것이기에 결코 나누어 줄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영적인 차원에서도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주님 오시는 순간에 자기의 것을 나누어 줄 수는 없다는 말로서 구원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구원에 있어서 그 누구도 각자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으며, 모자란 기름을 러가는 역할도 그 누구가 대신 해줄 수 없는 것이다.



2017년 9월 1일 가해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누가 보나 보지 않나 한결같아야 한다

 반영억라파엘신부


맥시칸의 결혼식과 인도 사람의 결혼식, 그리고 미국인들의 결혼식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로 문화가 다르지만 복을 빌어주고 헤어지지 않기를 기원하며 자녀의 풍요를 누리기를 바라는 기원은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신랑신부를 끈으로 묶는 행위라든지 반지를 교환하고 부모가 자녀에게 쌀을 뿌리는 행위를 통해서 복을 기원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약의 선언 후 성모님께 꽃을 봉헌하는 모습을 통해 신앙인의 모습을 새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유다인의 결혼 풍습은 약혼을 먼저 합니다. 그리고 약혼으로 법적인 혼인이 성립되지만 약 1년간은 신부가 친정에 머물러 있고 부부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 집으로 갑니다. 신부 집에서는 신부 친구들이 등불을 밝혀 들고 신랑을 마중합니다. 그리고 신랑 일행이 도착하면 함께 들어가 밤새도록 잔치를 벌입니다.

왠 등불이냐고요? 사막지역은 낮에는 너무 더우니까 밤을 이용하는 거죠. 그렇다면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처녀들은 신부의 친구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였고 다섯은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신랑이 일찍 왔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늦어져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실 등잔에 기름이 없으면 있으나마나 입니다. 따라서 등잔불을 밝히려면 언제나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저는 하루일정을 마감하며 자동차의 주유상태를 확인합니다. 혹 급한 일이 있어도 일정거리를 갈 수 있도록 하기해서 입니다.

간혹 미처 확인을 하지 못하는 날이면 하필 그날에 일이 생기고 시간에 쫓기게 됩니다. 하루쯤이야! 하고 방심하는 그날이 심판의 날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기름을 채운다는 것은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형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실천에 옮긴다는 말씀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우정을 쌓는 것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천상잔치에 참여하기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혼인 풍습은 다르지만 그 안에 예식이 의미하는 알맹이가 있듯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 하기위해서는 행동하는 믿음의 알맹이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예기치 않은 시간에 갑자기 오시더라도 더 큰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할 일 없이 보낸 오늘 나의 하루가 어제 죽은 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한 바로 그 내일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순간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국에 가면 놀랄 3가지가 있는데 1). 와야 될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이고 2). 못 올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이 와 있는 것이며 3). 내가 거기 와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남아있는 사람에게 미안한 것도 있는데 1). 이렇게 좋은 곳에 혼자 와 있어서 가족에게 미안하고, 2). 나를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 미안하고 3). 내 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혈, 성인들의 통공과 가족, 이웃들의 희생과 기도로 온 것이기에 미안하답니다.

천상의 행복을 누리는 것은 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마태 25,1-13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깨어 있어라



오늘의 묵상

  혼인 잔치에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때를 기다리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는 꺼져 가거나 죽은 믿음의 등을 들고 다니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오늘날 시간의 절박성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고 우둔한 이들은 개성도 없고 복음적 일관성도 없는 삶을 보냅니다. 어떤 이들은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고 희망도 없이 돈과 권력, 이기주의, 성(性)과 물질주의라는 현실에만 빠져 살고 있습니다. 죽음이 그들의 문을 두드릴 때 그들은 절망 속에 울부짖거나 허무에 빠지고 맙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깨어 있음에 대한 이 결론은 그리스도께서 내리시는 최후 심판을 위한 비상 신호입니다. 우리는 등과 함께 기름을 늘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 있는 등불은 책임감 있는 믿음과 깨어 있는 기다림의 표징이 됩니다. 켜져 있는 등은 슬기로움의 표징입니다. 슬기롭지 못하면 잔치에서 쫓겨납니다. 시간의 중요성 앞에서 대체할 수 없는 개인적인 책임을 강조합니다.
슬기로움과 깨어 있음은 개인적인 특성입니다. 이런 특성을 갖춘 이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함께 나눌 수 있거나 빌려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느님에 대한 개인의 응답과 비슷한 것입니다. 개인의 책임과 노력은 늘 준비하려고 깨어 있기에 귀중한 것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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