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간 월요일]선포 (루카 4,16-30)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1코린 2,1-5)
1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2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3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4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5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안식일에 이사야 예언서 두루마리를 펴시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신다.(루카 4,16-30)
그때에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할 것이다.”
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제1독서(1코린2,1~5)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4~5)
코린토 1서 2장 4절에서 '나의 말'은 사적인 모임에서의 대화를 가리키고, '나의 복음 선포'는 공적인 설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엄격히 구분하기보다는 사도 바오로의 복음 선포를 이중적으로 표현하여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도 바오로는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지혜롭고 설득력있는 언변으로 하지 않는다. 본절에서 '설득력있는'으로 번역된 '페이토이스'(peithois)는 '구변이 좋은', '설득력 있는'이라는 뜻을 지닌 '페이토스'(peithos)의 복수형으로서 사도 바오로가 유혹하는 말이나 그럴듯한 말을 사용하여 복음을 미화하거나 군중들을 현혹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인위적 설득에 기초한 웅변이나 혹은 합리적이며 철학적 논증으로 복음을 전할 경우에 결국 말이 지닌 화려함만 남을 뿐, 십자가의 말씀(道)은 헛것이 될 것이라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거짓 예언자들처럼 그럴듯한 말이나 술수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고, 오히려 인간적으로 연약한 만큼, 더욱 성령의 힘과 드러냄을 의지했던 것이다(1코린1,18).
여기서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이란 표현은 '힘(능력)있는 성령의 드러남', 그리고 '성령과 능력의 드러남' 이란 두 가지 번역이 동시에 가능하다.
특히 '힘'(능력)으로 번역된 '뒤나메오스'(dynameos)는 힘이나 기적적 능력을 뜻하는 '뒤나미스'(dynamis)의 소유격으로서 자주 독립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성령과 능력(힘)은 종종 함께 언급된다는 점에서(사도1,8), 특히 본문의 경우 형용사와 명사를 결합하는 대신에 두 개의 명사를 연결하여 하나의 뜻을 나타내는 기교적 표현으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힘(능력)있는 성령의 드러남'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드러내는 것'으로 번역된 '아포데익세이'(apodeiksi)는 '증명', '전시', '증거'를 뜻하는 '아포데익시스'(apodeiksis)의 여격으로서 사도 바오로의 복음 선포에 수반된 초자연적 영향력을 뜻한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에 따르면, 이러한 '증거'는 지혜롭고 설득력있는 언변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힘(능력)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성령의 힘(능력)의 드러남은 증거를 동반한다는 것인데, 본절에 언급된 '성령의 힘'(능력)이란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나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능력(에페1,17~18), 회개와 생활의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1테살1,5; 2,13).
실제로 사도 바오로가 본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혜와 수사학과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어떤 외적 증거의 드러남을 제시하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5)
2장 5절은 사도 바오로가 성령의 능력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전한 자신의 코린토 교회 선교 활동을 회상하는 2장 1~5절의 결론 부분이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성령의 힘을 의지한 것이 코린토 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지닌 믿음을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목적 때문이었음을 밝힌다.
이러한 사실은 원문에서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 '히나'(hina)가 문두에 등장하여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복음 선포의 이유와 목적을 명확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잘 보여진다.
그렇다면 사도 바오로가 오직 성령의 힘으로 복음을 전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코린토 교인들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에 기초를 둔 참된 믿음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믿음'으로 번역된 '피스티스'(pistis)는 정관사 '헤'(he)와 함께 사용되어 '믿는 행위' 그 자체보다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하심에 기초한 본질적 믿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만일에 사도 바오로가 전한 복음이 인간의 지혜나 언변에 의존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파도가 들이닥치면 힘없이 무너져 버리고 마는 한낱 모래성에 불과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오로보다 더 탁월한 지혜나 언변을 가진 사람이 등장하면, 사도 바오로가 전한 복음은 이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복음을 논리적 논증에 입각해 선포했다면, 또 다른 선명한 논리적 논증이 등장할 경우 이내 파기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사도 바오로가 전한 복음은 자신의 지혜나 설득력있는 언변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에 기초하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영원하다.
즉 불변하는 하느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그 무엇에 의해서도 절대 파기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사도 바오로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고 코린토에서 복음을 전하였다는 본절의 내용은, 십자가의 도(말씀)가 구원을 얻는 자에게는 하느님의 능력이 된다는 코린토 1서 1장 18절의 사도 바오로 자신의 확신에 대한 확증인 것이다.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복음(루카4,16~30)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1)
아마도 성경 봉독 후 예수님께서 하신 교훈의 말씀이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깊었으며, 내용도 풍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루카 복음 4장 21절과 18절, 19절의 내용만으로도 예수님께서 베푸신 가르침의 요지를 전달하기에 충분하므로, 루카 복음사가는 21절로 압축 요약해서 전달하였다.
21절에서 '이루어졌다'로 번역된 '페플레로타이'(peplerotai; is fulfilled)는 구약 예언의 완성과 성취를 드러내는 전문용어인 '플레로오'(pleroo)의 수동태 완료로서 이사야서 61장 1~2절의 예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회당의 청중들에게 이미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즉 이사야서 61장 1~2절에 나오는, 주님의 영을 받은 의로운 종은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며, 당신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활을 시작하는 시점에 이미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증명하는 중요한 예언으로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앞으로 계속 성취될 예언이기도 한 것이다.
즉 가난한 이들이 기쁜 소식인 복음을 듣고, 죄와 죽음의 권세에 잡혔던 이들이 자유롭게 되며, 영적으로 눈먼 이들이 진리를 보게 되고, 좌절과 절망에 빠진 이들이 희망 가운데 기쁨을 회복하며, 주님께서 베푸실 구원의 은혜로운 해가 도래하는 등의 일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었고, 또한 성취되어 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와 생명, 자유와 평화, 그리고 치유와 하느님의 의로운 통치를 동반하고 육화(강생)하신 천주 성자 제2위 하느님이시다.
이처럼 예수님의 오심으로 성취되었고, 또한 성취되어 가는 이같은 일들은 오늘날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이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으며, 예수님 재림때까지 끊임없이 진행될 것이다.
믿는 우리는 궁극적으로 긍정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홍성만 신부-
오늘부터 연말까지 교회는 평일 복음으로 루카 복음을 들려줍니다. 그 첫날인 오늘 우리는 예수님 당신이 성장하신 나자렛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시어 두루마리를 펴 들고, 이사야 예언서의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읽으시는 모습을 뵙게 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들던 사람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자, 회당에 있는 사람들의 눈이 모두 예수님께 쏠립니다.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 성경은 계속됩니다.
"그리자 모두 그을 좋게 말하면,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고 말하였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 당신을 두고 하시는 "오늘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은총의 말씀에 탄복을 합니다. 그러나 이내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수군거립니다.
예수님을 향한 서로 상반되는 분위기가 연이어 유발(誘發)됩니다.
탄복을 하는가 하면 이내 수군거립니다. 예수님을 향한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이 거의 동시에 일어납니다.
이를 눈치 챈 예수님께서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하고 꼬집어 말씀하시고는, 예언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는 예로 시돈 지방 사렘타 마을에 사는 어떤 과부의 이야기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 성경은 계속 이어집니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부정적인 감정이, 은총의 말씀이라고 탄복한 긍정적인 감정을 집어삼킵니다.
우리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 부정적인 감정이 긍정적인 감정을 압도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이나 언사는 늘 그 목소리가 크며 합리적인 것처럼 들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긍정적인 의견이나 사고를 집어삼킵니다.
이렇게 진행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고, 또 잘되었는지 말입니다.
사실 믿는 우리는 궁극적으로 긍정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숙고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 안에서 희망을 잃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 때문에 끝까지 희망할 수 있는 감각은 어떠한 처지에서도 부정되거나 약화될 수 없다는 것을 다짐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당신 사명을 공적으로 선포하십니다.
특히 이사야 예언서의 한 부분을 읽으심으로써, 당신께서 맡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히십니다.
그 사명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눈먼 이들은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는 일입니다.
그런데 군중의 반응이 매우 이상하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예수님을 칭찬하다가, 잠시 뒤에는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아 산벼랑에서 밀어 떨어뜨리려 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두 가지 마음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복을 받으려는 마음과 복을 받지 못하면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거부하는 마음이 대조되는 것입니다.
오늘 나자렛의 군중도 예수님 말씀에 놀라워하다가,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이 구원받은 사례를 말씀하시자, 그만 격노하였지요.
유다인을 제쳐 두고 이방인인 사렙타 마을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은총이 내렸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이방인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인간은 누구나 다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께서도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억압받는 이들을 구원하시겠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주변의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처지에 있더라도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모든 이가 인간다운 품위를 누리도록 사랑의 실천을 펼쳐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