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간 목요일]따름( 루카 5,1-11)
바오로 사도는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 된다며,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이라고 한다. (1코린 3,18-23)
형제 여러분, 18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19 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그들의 꾀로 붙잡으신다.”
20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생각을 아신다. 그것이 허황됨을 아신다.”
21 그러므로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2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3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라고 하시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다. ( 루카 5,1-11)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1코린 3,18-23)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18)
코린토 1서 3장 18절에서 23절까지 바오로는 주제를 급격히 바꾸어, 이미 코린토1서 1장 18절에서 2장 16절에 논의한 바 있는, '하느님의 지혜' 와 '세상의 지혜' 에 대해 다시 언급한다.
코린토 교인들의 분쟁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 원천에 대해 밝히는 본 단락을 바오로는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라는 권면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논증을 할때 흔히 사용하던 냉소주의적 스토아 학파의 '통렬한 비난'(diatribe)이란 화법을 사용한 것이다.
여기서 '속여서는' 으로 번역된 '엑사파타토'(eksapatato)는 '속이다(decieve), '판단을 흐리게 하다' 라는 뜻을 지닌 '엑사파타오'(ekasapatao)의 현재 명령법이다.
이것이 동사를 부정하는 부정어 '메데에스'(medeis)와 더불어 사용되어, 코린토 교인들 일부가 현재 스스로에게 속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에 바오로는 이같은 코린토 교인들의 형태를 엄중히 경고한다.
사실 인간은 약하고도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남을 속이기도 하고 남에게 속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스스로에게 속기도 한다. 이처럼 자신을 속이는 대표적인 일이 스스로 지혜있는 자로 여기는 것이다.
사실 스스로 지혜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모든 지혜가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착각 속에 살기 때문에, 바오로가 이들에 대해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상적 지혜를 사랑하는 코린토 교인들에게 있어서 스스로를 속이는 일은 비일비재 했을 것이다.
코린토 교인들은 세상적 지혜를 기준으로 교회의 지도자들을 평가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파당을 만들어 분열했다는 면에서, 스스로 지혜있다고 착각한 자들이요, 자기 자신을 속이는 자들이었다.
이처럼 코린토 교회의 위험은 세상적 지혜를 판단 기준으로 삼아 행동하며 그러한 자신을 스스로 현명하다고 착각한 것이다.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인간의 설득력에 의존하는 논증 방식으로 또는 인간과 자아에 근거를 둔 생활 방식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간적 지혜에서 벗어나 더 높은 하느님의 지혜로 나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참된 영적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죄스러운 이 세상에 근거를 둔 인본주의적 지혜를 부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로마10,3; 필리3,6~9참조).
코린토 교인들의 문제는 성도가 되는 일과 세상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동시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데에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지혜와 하느님의 지혜는 결코 양립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전자가 후자로 개선되거나 발전되지도 않는다.
오로지 하느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 택일만이 있을 뿐이다.
바오로의 관점에서 볼 때, 바로 여기에 코린토 교회의 분쟁의 원인이 숨어 있었다.
십자가의 복음이 세상적으로는 어리석은 것이고 세상의 지혜로는 하느님의 지혜를 깨닫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코린토 교인들은 교회와 세상 사이에 가로놓인 이 '역설적 대립관계'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로, 어쩌면 그들은 교회와 세상을 둘 다 높이 평가하는 지혜에 자신들이 도달했다고 믿었는지 모른다.
이러한 교회내의 상황을 직시한 바오로는 세상의 지혜는 영적 어리석음이며, 세상에 대한 어리석음은 영적 지혜라는 지적을 통하여 이 세상의 지혜를 내세워 교회를 분열시키는 일이 없어야 함을 교훈한 것이다.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복음(루카5,1~11)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스승님'에 해당하는 '에피스타타'(epistata; master)는 신약 성경에서 루카 복음사가 만이 사용하는 독특한 단어이다(루카8,24.45; 9,33.49; 17,13).
루카 복음사가는 일반적으로 '선생'(teacher)에 대한 묘사로서 사용되는 '디다스칼로스'(didaskalos)나 율법 교사에 대한 존칭어인 '랍비'(rabbi)라는 단어보다는 '에피스타타'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에피스타타'는 다른 사람보다 신분이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권위를 나타내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 17장 13절의 나병 환자 열 사람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제자들의 입으로 고백된 경우처럼, 이 용어는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개인적 인식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도 베드로는 다만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권위를 느껴서 예수님을 '에피스타타'로 불렀다.
그러나 이 호칭은 기적의 체험 후에는 신앙 고백적 호칭인 '퀴리에'(kyrie) 즉 '주님'(Lord)으로 바뀐다(루카5,8).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이 구절은 베드로의 믿음과 순종의 태도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그러나'로 번역된 접속사 '데'(de)는 여기서 'but' 혹은 'nevertheless'의 의미를 지닌다.
말하자면, 전문 어부로서 고기잡이와 관련된 갈릴래아 호수에 대한 사정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며, 전날 밤 밤새도록 그물질을 해보았지만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고, 또 날이 밝은 아침(오전)에 고기가 없는 깊은 데로 저어 가서 그물을 내린다는 것도 상식에 맞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지가 베드로에게 있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전폭적인 순종의 의지는 '제가 ~내리겠습니다'로 번역된 '칼라소'(chalaso; I will let down)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단어는 미래 능동태 동사로서 자신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는데, 마지 못해서나 억지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순종을 하겠다는 베드로 개인의 의지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말씀대로'에 해당하는 '에피 ~ 토 레마티 수'(epi ~ to remati su; at your word; because you say so)는 '당신의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뜻이다.
여기서 '스승님의 말씀'은 루카 복음 5장 4절의 명령 뿐만 아니라 5장 3절에 기록된 '가르침의 말씀'까지 다 포함되는 것이다.
즉 베드로는 자신의 배 위에서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고, 거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고 진실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기에,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해야 하겠다는 모종의 결심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깊은 데로 저어 나아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5,4)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떄, 베드로는 그 명령이 비상식적으로 들렸으나 즉각적이고 능동적으로 순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 in spite of)의 믿음과 그 믿음은 바로 주님의 가르침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이기에 능동적으로 기쁘게 순종하는 믿음은, 평소 주님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과 주님의 성품과 덕성을 체험하지 않고는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성숙한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듣고, 전폭적으로 믿고 따르겠다는 의지와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버리고 떠나기
반영억라파엘신부
어디로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희망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에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더 좋은 것을 기대하면 희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났던 아브라함,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길 바랐던 성모님의 모습에서 “절망 속에서도 희망”(로마4,18) 해야 한다는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많은 수고와 땀을 통해 일구어 자리를 잡은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많은 미련과 아쉬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명을 받았으면 후회가 없어야 합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있고 싶은데 떠나라는 명을 받고, 빨리 떠났으면 좋겠는데 더 있으라는 명을 받기도 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내일 당장 떠날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성직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때가 되면 자기가 움켜잡고 있던 모든 것을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떠났으면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안주하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을 때 떠나야 합니다. 영광까지 누리려한다면 욕심입니다.
엉뚱한 생각을 해 봤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으로서 교황으로 선출되리라고 생각을 하셨을까? 교황으로 선출되면 다시 그리로 돌아가지 못하시는데 짐정리는 다 해놓고 오셨을까? 소지품들은 어떻게 처리하실까? 아니 추기경관저에서 살지 않으시고 방 한 칸의 아주 검소한 아파트를 임대하여 간단한 저녁식사를 직접 해 드셨고, 버스로 출퇴근을 하며, 근검한 선교사들에게 추기경관저를 내 놓으셨다하니 아예 정리할 것도 버릴 것도 없이 사신 것은 아닐까? 세상의 권력은 다 버리고 주님의 권위와 겸손으로 만족하셨음에 존경과 사랑을 드립니다.
시몬 베드로는 고기 잡는 어부였습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는 이유는 생계를 유지하고 더 나은 윤택함을 누리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밤새 고기를 잡으려 애썼지만 잡지 못했습니다. 실망 속에 그물을 정리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몬은 말씀대로 그물을 내렸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말씀대로 했더니 차고 넘쳤습니다. 순명이 기적을 낳았습니다.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기적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어부가 많은 고기를 보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지만 현실입니다. 전에는 고기만 봤는데 이제는 능력의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하고 고백합니다. 그는 주님을 가까이 모시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또한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하시며 죄 많은 자의 고백을 기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마침내 주님의 능력과 자비를 체험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자기의 어부로서의 지식과 경험, 상식, 그야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부가 배를 놓고, 고기를 놓고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사람을 낚을 사명을 주시니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바뀌는 제자로서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도로 살게 된 것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몸이 떠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가 잡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지식이나 경험, 업적, 애착….인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을 만나는데 걸림돌이 되는 하나를 버리는 가운데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거듭나고 싶은 만큼 버려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함께 일할 사람을 눈여겨보셨다가 오늘 시몬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당시 베드로와 동료들은 밤새 그물질을 하고도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허탈한 상태였지요. 그런데도 베드로는 그물을 다시 던집니다. 만일 그가 지금은 그물을 던질 때가 아니라고 포기하였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확실한 때만 기다리다 보면 아예 시작조차 못할 수가 있습니다.
엄청난 고기를 잡은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고백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기에는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앞으로 자신에게 주어질 짐이 너무나도 무거울까 두려워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도 주님께서 처음 일을 주실 때는 부족함과 두려움에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맡겨진 일을 수행하고 뒤돌아보면 모두가 쓸데없는 걱정이 아니었습니까?
베드로를 비롯한 동료들은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하여 아는 것도 많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에게 다양한 지식을 요구하지 않으셨지요. 요구하신 것은 ‘앞날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있겠다는 강렬한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있겠다고 응답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 따른 합당한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것이 있다면 이를 다른 이들에게 나눠 주는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