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간 금요일]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루카 5,33-39)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말라고 한다.(1코린 4,1-5)
형제 여러분, 1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2 무릇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바는 그가 성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3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4 나는 잘못한 것이 없음을 압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5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겠냐며,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신다.(루카 5,33-39)
그때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33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35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37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현존하는 바오로 그림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초상화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제1독서(1코린4,1~5)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무릇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바는 그가 성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1~2)
코린토 1서 1장 10절 ~ 6장 20절에는 사도 바오로가 클로에 집안 사람들을 통하여 파악한 코린토 교회의 현안 문제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책망과 권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 안에서 전반부 코린토1서 1장 10절~4장 21절은 코린토 교회 내에 있었던 고질적인 분열 문제를 다룬다.
이러한 일련의 내용 중에 코린토 1서 4장 1~5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교회 내에 분열이 야기된 원인 중 하나가 복음 전파자들에 대한 인간적 판단에 있음을 직시하고, 복음 전파자에 대한 판단을 금지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그 서두인 본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선 복음 전파자가 그리스도의 시종이요, 하느님의 구원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이므로 인간적 판단의 대상이 아님을 밝힌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1서 3장 23절의 내용, 즉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라는 말씀의 맥락에서 복음 전파자들 또한 그리스도의 것이며, 하느님의 것이라는 보다 진전된 내용을 제시한다.
그는 이러한 근거를 토대로 코린토1서 4장 1~5절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복음 전파자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을 교훈하는 것이다.
본절에서 사도 바오로가 명시적으로 밝히는 바와 같이 교회의 봉사자들, 특히 복음 전파자들은 그리스도의 시종이요,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이다.
여기서 '시종'(일꾼)으로 번역된 '휘페레타스'(hyperetas)의 원형 '휘페레테스'(hyperetes)는 '~아래에'란 뜻을 가진 전치사 '휘포'(hypo)와 '노를 젓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에렛소'(eresso)의 합성어에서 파생한 단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배의 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를 의미한다.
당시 로마 시대에는 이 일은 중죄인이나 가장 비천한 노예가 감당했던 일이며, 한번 노젓는 노예로 전락하면 일반적으로 죽기 이전까지는 그 일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점차 넓은 의미로 사용되어 충성을 다하는 일꾼이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신약 성경에서 이 단어는 관리들과 행정 장관들의 수행원들과 같은 높은 지위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마태5,25).
이런 점에서 여기 언급된 '휘페레타스'(hyperetas)는 코린토 1서 3장 5절에 이미 언급된 바 있는 '디아코노이'(diakonoi)와 그 표현은 다를지라도 의미상 차이는 없다.
본문을 통하여 사도 바오로는 마치 종이 하는 일이 종 자신의 일이 아니라 주인의 일이듯이 복음 전파자들의 활동 또한, 스스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이 결코 복음 전파자들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실은 사도 바오로가 복음 전파자들을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표현하고 있는 데서 잘 드러난다.
'신비'로 번역된 '미스테리온'(mysterion)은 원래 '입문자'를 뜻하는 '뮈스테스'(mystes)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희랍의 비밀스런 의식을 하는 종교에서 종교의 입문자에게만 공개하는 신성시되는 의식 혹은 비밀스런 교리를 의미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 단어를 차용하여 그리스도의 '성찬례'를 가리키는데 사용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은 '성찬례의 집전자'를 뜻한다고도 할 수 있으나 이는 문맥상 맞지 않는다.
따라서 문맥을 통해 볼 때 본문에 언급된 '신비'는 '복음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목적에 관한 은밀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신비는 전에는 감추어져 있다가 신약 시대에 드러난 공개된 비밀이다(1코린13,2; 14,2; 15,51).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신비는 그리스의 신비 종교 집단에서처럼 종교 입문자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숨겨진 비밀이 아니라 관심을 가진 모든 자들에게 공개된 비밀, 즉 계시된 비밀이다.
한편, 여기서 '맡은 관리인'으로 번역된 '오이코노무스'(oikonomus)는 '집'을 뜻하는 명사 '오이코스'(oikos)와 '관리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네모'(nemo)의 합성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집안이나 어떤 공동체의 행정관리나 재정을 담당하고 관리하는 지배인 또는 관리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시종'(일꾼)이라는 표현이 일차적으로 노예 신분을 연상시킨다면, '맡은 관리인'이라는 표현은 위엄과 권위의 신분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오로가 교회의 지도자들을 단순히 교회의 일꾼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권위를 가진 관리인(청지기, 집사)으로서 높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코리토 교인들은 복음을 증거하는 전파자들에 대하여 그 직분에 합당하게 올바른 태도를 취해야만 했다. '복음 전파자'들은 '시종'인 동시에 '맡은 관리인'이기 때문이다.
복음 전파자들의 이러한 양면적 위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경우에, 한편으로는 그들을 업신여겨 무시할 우려가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 자체를 과도하게 떠받들어 추앙할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둘 다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무릇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바는 그가 성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2)
사도 바오로는 복음을 맡은 관리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성실(충성)임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본절에서 '요구되는'으로 번역된 '제테이타이'(zeteitai)는 '찾다', '구하다'라는 뜻을 지닌 '제테오'(zeteo)의 현재 수동태이다.
여기서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자신의 판단과 상관없이 성실(충성)이 요구되는 것이 사명을 맡은 관리인에게는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희랍어에서 현재형은 불변의 사실을 보여주므로, 맡은 관리인에게 하느님께 대한 성실(충성)이 요구되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이것은 곧 자신의 의지대로가 아닌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직 성실(충성)을 다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을 맡은 관리인은 주인의 명령에 순종함을 따라야 하며 맡은 바 자기 일을 감당하는 데 있어서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여기서 '성실'(충성)이라 번역된 '피스토스'(pistos)는 '믿을만한', '신실한'이라는 뜻을 지닌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관리인은 오직 주인 앞에서 신실한 자로 인정받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한편,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세상의 지혜나, 언변이나 학식, 그리고 가문과 같이 인간적 판단에 있어서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맡겨진 그리스도의 심오한 진리인 복음에 대한 신실함, 즉 성실(충성)이다.
코린토 교회에 전반적으로 풍성했던 영적 은사를 감안할 때, 코린토 교인들 중 일부는 아마 코린토에서 봉사하는 자들의 은사가 부족함을 꼬투리잡아 그들을 비난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관리인에게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풍성한 은사를 포함한 그 어떤 가시적 능력이 아니라, 사도 바오로를 판단하며 사도로서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코린토 교인들에게 사도 바오로 자신은 충성을 다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자신의 사도성의 정당함을 변호하고 있다.
동시에 코린토1서 4장 3~5절에 나오는대로, 관리인의 충성의 대상이며 절대 무류이신 절대자 하느님만이 최종 심판관이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복음(루카5,33~39)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36~39)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 땅에 오신 새 시대에는 옛 전통을 따라 단식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두 개의 비유를 통해 더욱 명확히 하신다.
두 비유에서 새 옷에서 찢은 조각과 새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오신 새 시대, 즉 복음의 시대를 상징하며, 헌 옷과 헌 가죽 부대는 일주일에 두번(월요일과 목요일) 정기적으로 단식하는 것과 같은 유대인들의 고루한 전통 및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상징한다.
여기서 '어울리지도'로 번역된 '쉼포네세이'(symphonesei; agree; match)의 원형 '쉼포네오'(symphoneo)는 '함께'(with)라는 뜻의 접두어 '쉰'(syn)과 '소리를 내다'는 뜻의 동사 '포네오'(phoneo)의 합성어로서 '함께 소리를 내다', '화음을 이루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교향곡'을 의미하는 영어 'symphony'의 어원이다. 여기 본문에서는 '일치하다', '조화하다'라는 뜻으로 쓰였다.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을 헌 옷을 기우는데 사용하면, 세탁시 물을 흡수한 조각이 급격히 수축되어 기운 부분이 뜯어져 그 헌 옷이 망가지게 된다.즉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과 헌 옷은 서로 불협화음만 이룰 뿐, 조화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새 시대 새 복음과 유대인의 고루한 전통은 서로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고, 오히려 서로 피해를 줄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 당시 유대인의 생활상 가운데 친숙한 포도주와 가죽 부대를 예로 들어 가르침을 전개하신다. 포도주를 새로 만들면, 그때부터 며칠 혹은 수 개월 동안 숙성될 때까지 계속해서 발효된다. 헌 가죽 부대는 새 부대와 달리 신축성이 없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새 포도주를 만들어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계속 발효되는 포도주에서 가스가 생겨나 신축성이 없는 헌 가죽 부대가 터져 버려, 결국 포도주와 헌 가죽 부대 둘 다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신축성이 뛰어난 새 가죽 부대에 담았던 것이다.
이것은 이미 루카 복음 5장 36절에서 설명한데로, 예수님의 복음은 유대인의 율법주의적 전통과 조화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율법을 왜곡해서 만든 과거의 고루한 전통과 규칙으로, 하느님의 율법의 정신을 참되게 제시하는 복음과 예수님의 행위를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38)
'새 부대에'로 번역된 '에이스 아스쿠스 카이누스'(eis askus kainus; into new wineskins; into new bottles)에서 '새'로 번역된 단어 '카이누스'(kainus)는 '써 보지 않은', '처음 부르는' 노래로서 '새'노래(묵시14,3), '낯설고 놀라운',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마르1,27; 요한13,34; 사도17,19), 혹은 '낡지 않은', '새로운' 피조물, '새' 것(2코린5,17; 2베드3,13)이라는 등의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의미한다.
율법, 규칙, 전통이라는 것에 얽매여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유와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가르침이나 행위는 전에는 본 적이 없어서 낯설기도 하고, 목격자들을 놀라게도 만드는 차원의 것이다.
따라서 헌 종교 형식을 보존하려는 어리석음과 헛된 노력을 그만두고,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 부대를 준비해야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묵은 것이 좋다' (39)
이 구절은 공관복음서의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9장 17절과 마르코 복음 2장 22절에는 없는 루카 복음서의 고유한 내용이다. 여기서 '좋다'로 번역된 '크레스토스'(chrestos; better)는 사용하기에 적합하여 유용하다는(useful) 의미를 지닌 형용사이다.
항상 묵은 포도주만을 마시던 사람은 그것이 자기 입맛에 익숙하고 몸에 좋다면서, 그것만을 선호하고 고집하게 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구절은 종교적 전통과 규칙과 가치관만을 귀하게 여기며 지켜오던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구태의연한 모습을 빗대어 지적한 말이다.
그들이 만약 계속해서 묵은 포도주만을 권하는 사람들처럼 옛 전통만을 고집한다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제시한 복음의 진수를 결코 깨달을 수 없으니, 그들의 아집에서 하루 빨리 벗어날 것을 경고하며 촉구하는 것이다.

불을 위하여 등잔이 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새것과 헌 것은 충돌하게 마련입니다. 헌 것이 다 나쁜 것도 아니고 새것이 다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이 어떻게 쓰이느냐가 중요합니다. ‘등잔을 위하여 불이 있지 않고 불을 위하여 등잔이 필요한 이치’입니다. 단식은 슬픈 일이 있어서, 뜻이 있어서 합니다. 슬픈 일이 없는데, 오히려 기뻐해야할 날에 단식을 하는 것은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묵은 것이 아무리 좋다하더라도 새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는 항상 준비되어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단식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단식을 하셨듯이 하느님으로 가득 찬 나머지 하느님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세상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으로 채울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합니다. 단식은 하느님께로 가는 방법의 하나일 뿐 목적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도록 준비시켜주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수단입니다. 수단을 목적으로 정당화 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5,37-38).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자신들의 전통과 아집, 지식 때문에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묵은 것은 익숙한 것이기에 편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편안함이 우리를 마비시키기도 합니다. 과거의 경험과 지식에 안주하여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치 내 것이 전부인양 생각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나이든 사람들이 쉽게 노여움을 타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자신의 삶의 경륜과 지식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말에 동조하고 아첨하는 사람만 좋아하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기도를 많이 하고 오래 단식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성스럽다고 믿고 있지만 거룩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찾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찾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룩한 체 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성령으로 가득 차 있어서 거룩했습니다.
사목자들이 구교신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곳에는 성직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남다르기도 하지만 아주 고집스런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부도 알고, 어느 수녀도 알고, 누구는 예전에 어떻게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다는 등 말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정작 본인은 새 영세자만도 못한 신심을 지니고 있고 자신의 틀 안에 갇혀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의 경륜을 보아서는 모두를 품을 것 같은데 그 속이 밴댕이요, 좁쌀입니다.
우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도 배려하면서 믿음의 쇄신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어머님께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당신이 전에 부르던 아우구스띠노는 이미 죽었고, 지금의 나는 그리스도님과 함께 사는 아우구스띠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참 변화라는 것은 영적인 몸으로 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님의 수난의 모습을 닮는 것이요, 영광으로 변하는 것입니다”(성 아타나시오).
새로운 가르침은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모든 새로운 가르침은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는 가르침”입니다. 시련과 역경, 모든 혼돈 속에서 다시금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밥을 굶기 위한 단식을 하지 말고 근본을 회복하는 단식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