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간 화요일] 안식일의 주인 (마르 2,23-28)

사울이 하느님께 배척을 받은 다음, 사무엘은 다시 하느님의 명에 따라 다음 임금이 될 사람을 찾아 나선다. 사람의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이사이의 막내아들 다윗을 임금으로 택하신다.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을 붓자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린다.(사무엘상16,1-13)
그 무렵 1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슬퍼하고만 있을 셈이냐? 나는 이미 사울을 이스라엘의 임금 자리에서 밀어냈다. 그러니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떠나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에게 보낸다. 내가 친히 그의 아들 가운데에서 임금이 될 사람을 하나 보아 두었다.” 2 사무엘이 여쭈었다. “제가 어떻게 갑니까? 사울이 그 소식을 들으면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가서, ‘주님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여라. 3 그러면서 이사이를 제사에 초청하여라. 그다음에 네가 할 일을 내가 알려 주겠다. 너는 내가 일러 주는 이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어라.”
4 사무엘은 주님께서 이르시는 대로 하였다. 그가 베들레헴에 다다르자 그 성읍의 원로들이 떨면서 그를 맞았다. 그들은 “좋은 일로 오시는 겁니까?” 하고 물었다. 5 사무엘이 대답하였다. “물론 좋은 일이지요. 나는 주님께 제사를 드리러 온 것이오. 그러니 몸을 거룩하게 하고 제사를 드리러 함께 갑시다.” 사무엘은 이사이와 그의 아들들을 거룩하게 한 다음 그들을 제사에 초청하였다.
6 그들이 왔을 때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7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8 다음으로 이사이는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 아이도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아니오.” 하였다. 9 이사이가 다시 삼마를 지나가게 하였지만, 사무엘은 “이 아이도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아니오.” 하였다. 10 이렇게 이사이가 아들 일곱을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이사이에게 “이들 가운데에는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없소.” 하였다.
11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아들들이 다 모인 겁니까?” 하고 묻자, 이사이는 “막내가 아직 남아 있지만, 지금 양을 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말하였다. “사람을 보내 데려오시오. 그가 여기 올 때까지 우리는 식탁에 앉을 수가 없소.”
12 그래서 이사이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다. 그는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다운 잘생긴 아이였다. 주님께서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사무엘은 기름이 담긴 뿔을 들고 형들 한가운데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 사무엘은 그곳을 떠나 라마로 갔다.
시편 89(88),20.21-22.27-28(◎ 21ㄱ)
◎ 나는 나의 종 다윗을 찾아냈노라.
○ 예전에 당신이 나타나 말씀하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에게 선언하셨나이다. “내가 영웅에게 왕관을 씌웠노라. 백성 가운데 뽑힌 이를 들어 높였노라.” ◎
○ 나는 나의 종 다윗을 찾아내어,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노라. 내 손이 그를 붙잡아 주고, 내 팔도 그를 굳세게 하리라. ◎
○ 그는 나를 부르리라. “당신은 저의 아버지, 저의 하느님, 제 구원의 바위.” 나도 그를 맏아들로, 세상의 임금 가운데 으뜸으로 세우리라. ◎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서 먹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당신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신다.(마르코 2,23-28)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1사무16,1-13)
그 무렵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슬퍼하고만 있을 셈이냐? 나는 이미 사울을 이스라엘의 임금 자리에서 밀어냈다. 그러니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떠나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에게 보낸다. 내가 친히 그의 아들 가운데서 임금이 될 사람을 하나 보았다." (1)
사무엘 상권 16장은 사울의 이야기가 일단락을 맺고, 다윗이 역사 가운데 새롭게 등장하는 사건을 다룬다. 하느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시고, 일찌기 이스라엘의 새로운 임금으로 다윗을 선택하기로 결정하셨다.
주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식의 망령된 제사를 드렸던(1사무15,31) 인본주의적인 임금 사울에 대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서 당신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삼으실 것이라고 예언했으며(1사무13,14), 또 다시 주님의 아말렉족 전멸 명령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한 사울을 향해서 하느님께서 '임금보다 훌륭한 이웃'에게 왕국을 찢어줄 것이라고 예언한 적이 있다(1사무15,28).
여기서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과 '임금보다 훌륭한 이웃'은 바로 사무엘서 상권 16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다윗을 지칭하는 것이다.
다윗의 등장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사무엘서 상권 16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1~13절에서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새로운 임금으로 기름부음 받는 내용이 소개되고 14~23절에서는 주님의 영이 떠나고 악령이 내린 사울을 시중드는 다윗의 모습이 소개된다.
한편 '나는 이미 ~밀어냈다'에서 '내가 ~했거늘'에 해당하는 '와아니'(waani)는 접속사 '와우'(wau)와 1인칭 주격 대명사 '아니'(ani)가 결합한 것이다. 여기서 접속사 '와우'(wau)는 사무엘이 사울의 폐위에 대해서 슬퍼하지 말아야 될 이유를 나타내는 문장을 이끌고 있다.
또한 주어의 인칭이 동사에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주어를 대명사로 다시 또 기록하고 있는 것은 말씀을 주시는 주체인 하느님 자신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하느님 자신을 나타내는 '아니'(ani)는 '너는' 으로 번역되어 사무엘을 뜻하는 '앗타'(atha)라는 2인칭 단수 인칭 대명사와 대구를 이루고 있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과 사무엘의 태도를 대비시켜, '나는' 사울을 버렸는데, '너는' 왜 슬퍼하냐고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메아쓰티우'(measthiu; have rejected him)은 '거절하다', '밀어내다'를 뜻하는 '마아쓰'(maas)의 능동태 미완료로서 남성 3인칭 접미어를 취해서 '내가 그를 버렸다(밀어냈다)' 라는 뜻이다.
하느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것은 그가 주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이지만(1사무15,23.26), 넓게는 이스라엘 전체가 하느님을 임금으로서 인정하지 않고 '배척했던'(1사무8,7; 10,19)결과이며, 사울 임금을 따라서 주님의 명령을 어겼던 결과였다(1사무15,9).
이러한 연관성을 살펴볼 때, 임금과 하느님과의 관계는 이스라엘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대표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선택했던 임금이 하느님께 배척받았으므로 더 이상 임금을 요구할 수 없게 되었으며, 하느님께서 주도적으로 이스라엘의 임금을 선택해 주셔야먄 하는 형편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의 임금의 권한과 권력이 철두철미하게 하느님의 지배권과 주도권 아래 속해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니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떠나라'
사울의 폐위에 대해 슬퍼하는 사무엘에게 하느님께서 새로운 명령을 내리신다. '(너는)~채워 가지고'에 해당하는 '말레'(malle)는 '넘치다', '풍부하다', '충만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레'(malle)의 강조형 명령법이다. 이 동사는 공간적 '가득함'(탈출10,6)이나 시간의 '만료'(창세25,25)를 나타낼 때도 사용된다.
그리고 '말레' 동사는 일반적으로 능동형이나 수동형으로 사용되지만, 여기처럼 강조형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말한 것의 이행을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채우다'는 직접적인 의미 말고도 '온전히 이행하다', '힘을 다하다'라는 뜻도 갖는다(여호14,8; 1열왕9,24).
여기서도 이 동사는 사무엘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뿔에 기름을 채워야 한다는 뜻으로도 쓰였지만, 더 나아가 이제 애도의 시간을 끝내고 새로운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과 하느님의 지시에 온전히 따라야 한다는 뉘앙스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뿔에'에 해당하는 '카르네카'(qarneka; your horn)는 '뿔'을 의미하는 명사 '카렌'(qaren)에 사무엘을 지시하는 남성 2인칭 단수 접미어 '카'(ka)가 결합한 형태로 '너의 뿔'로 직역이 된다.
여기의 '뿔'은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사용된 '기름병'(1사무10,1)과 비교된다. 이 뿔은 다윗의 기름부음을 다룬 사무엘서 상권 16장 ~13절의 처음과 마지막 절에서 반복되어 강조됨으로써 사울이 기름부음 받은 것과 다윗이 기름부음 받은 것이 주님 앞에서 차이점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즉 사울이 임금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는 '기름병'으로 받았지만, 주님에 의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워질 다윗은 '뿔'로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뿔'은 사무엘서 상권 2장 1절과 10절의 한나의 기도 속에도 이미 나타나 있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전적으로 부어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상징한다.
여기 등장하는 '뿔'도, 한나를 미천한 여인에서 기쁨과 감사의 여인으로 높이신 하느님의 능력이 새롭게 선출된 이스라엘의 지도자 다윗에게도 부어질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기름'에 해당하는 '셰멘'(shemen; oil)은 일반적으로 '올리브 기름'을 뜻한다. 이 기름은 요리할 때(1열왕17,12), 희생 제물과 예배와 관련하여(레위2,15-16; 에제45,14), 화장품이나 향로(아모6,6; 시편104,15), 등잔(탈출25,6; 레위24,2) 등에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처럼 임금이나 사제나 예언자들을 세우는 데 사용될 때에는(레위8,12; 1열왕1,39)하느님의 풍성한 축복과 능력이 내려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특히 사울과 다윗의 기름부음 받는 장면을 비교해 볼 때, 사울의 장면에서는 다만 '기름을 부으라'는 명령만이 나오지만, 다윗의 경우에는 '뿔'에 기름을 채우라는 명령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명령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를 주도적으로 세우시는 하느님의 강한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2,23-28)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27~28)
마르코 복음 2장 27절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라는 구절은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12장 1~8절이나 루카 복음 6장 1~5절에는 없는 내용이다.
아마도 마르코 복음사가가 다른 복음사가가 전승된 내용들 중에 간과한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빠트리지 않고 기록한 것 같다.
그리고 이 구절의 메시지는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관한 39개 세부 조항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단죄하고 힘들게 만들었던 것과는 달리, 안식일의 참된 의미가 오히려 사람들을 위하여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셨다.
또한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호스테'(hoste; therefore)도 병행구절에는 없고 마르코 복음에만 있는 단어인데, 앞문장과 뒷문장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여기서는 앞문장을 받기보다는 안식일에 대한 전체의 논쟁을 결론짓기 위해 도입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바리사이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데에는 열심이었지만, 안식일이 왜 있는지에 대한 진정한 의미는 깨닫지 못했고, 그 결과 그들은 사람들에게 안식을 제공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단죄와 억압, 죄의식의 굴레만을 덧씌었을 뿐이다. 이에 비해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분명한 의미와 안식을 사람들에게 되찾아 주셨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님이야말로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표현인 것이다.
마르코 복음 2장의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죄사함의 권한이 있으시고(10절),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며(17절), 혼인 잔치 집의 신랑(19절)이실 뿐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28절)까지 되시는 분으로서 나온다.
즉 이 네 편의 논쟁은 모두 예수님의 신적(神的)인 권위에 도전하려는 바리사이들이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인위적 규범을 근거로 제시하며,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시도를 다루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도전에 대해 바리사이들이 반론을 펴지 못할 정도로 각각의 명쾌한 답변들을 일일이 제시하였다(10,17.22.28절).
그런데 그 답변들을 살펴보면, 어떤 분야에 대한 질문이든지 하나의 공통된 관점들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답변자이시고 논쟁을 일으킨 행위의 중심자체가 되시는 예수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점진적 계시이다.
예수님은 바로 '땅에서 죄를 사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분'(10절)이시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17절)이시며, '새 포도주, 즉 새로운 질서로서의 복음을 가져오신 분'(22절)이시며, '안식일의 주인이신 분'(28절)이시라는 것이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3-24)"
(여기서 '길을 내고 가면서'는
'길을 가면서'입니다.원문에는 길을 낸다는 뜻이 없습니다.)
지금 바리사이들이 시비를
거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서 먹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고 되어 있습니다(마태 12,1).
(이 내용을 해석할 때, 마태오복음은 읽어 보지도 않고 제자들의 행동을 '율법 문제로 시비를
걸 필요가 없는, 심심풀이로 한 사소한 일'로 생각하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심심풀이로 그런 행동을 했다면,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을 꾸짖으셨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모든 일(노동)'입니다(탈출 20,8-11; 신명 5,12-15).
그런데 밀 이삭을 뜯어 먹은 행동도 노동으로 볼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예수님도 바리사이들의 그런 생각을 부정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오늘날의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어떻든 밀 이삭을 뜯어 먹은 일은 분명히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바리사이들의 주장이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마르 2,25-26)"
예수님께서 다윗의 경우를
말씀하신 것은,율법을 어겼지만 죄를 지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 같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율법을 어겼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다윗이 죄를 지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배가 고파서' 그랬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도
안식일 율법을 어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가 고파서' 그랬기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비난하면 안 됩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제자들의 행동은 율법을 어긴 일이 아니라는 '반박'이 아니라,"그들이 율법을 어겼지만 죄를 지었다고 그들을 비난하지는
마라."라는 '변호'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안식일을 어긴 이들'이지만 '죄 없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참기 어려울 정도로 배가 고팠는지, 그 정도는 아니었는지... 모릅니다. 하여간에 제자들의 모습은 무척
딱하고 불쌍한 모습이고,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제자들을 가엾게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예수님도 제자들처럼 배가 고픈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밀 이삭 몇 개를
뜯어 먹는다고 배고픔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조금만 더 참지, 배가 좀 고프다고 쓸데없는 행동을 해서 문제를
일으키는가?" 라고 제자들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말을 한다면 우리도 바리사이 같은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라는 말씀은, 지금 상황에서는 "내 제자들이 안식일을 어긴 것만 보지 말고, 왜 그래야 했는지 그들의 사정을
먼저 보아라."로 해석됩니다. 법보다 사랑이 먼저입니다.
세속의 법정에서도 정상 참작을 할 때가 많습니다.하느님의 법을 말할
때에는 가장 먼저 사랑을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배가 고프면 누구든지 안식일을 어겨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자기 양심을 속이면 안 됩니다. 지키려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지만 못 지킨 경우와처음부터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안 지킨 경우는 분명히 다릅니다.)
앞의 말씀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뜻'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법은 그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
지침입니다. 따라서 사랑 없는 법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지금 자비 없이 안식일 율법만 따지는 바리사이들은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입니다.)
제자들을 변호하신
예수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유대인들은 '안식일은
하느님을 위한 날'이라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주일'은 '주님을 위한 날'이라는 생각에만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 있는 십계명을 잘 읽어 보면, 안식일은 중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기 위한 날,즉
'사람을 위한 날'입니다.
(종들에게 일을 시키는 주인들을 위한 날이 아니라,쉬지도 못하고 날마다 중노동을 하는 종들을 위한
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라는 말씀을, "종교가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사람이 종교를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종교가 하느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독재 권력처럼 되어서 사람을 억압한다면,그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법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율법 이전에 사람이 먼저 창조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율법 준수를 고집하기 전에, 율법 제정의 동기와 그것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가 헤아려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무엇을 했나 곰곰이 살펴보니, 주일을 특별히 ‘거룩하게’ 지낸 것 같지는 않습니다. 평일 미사에는 한 번도 참례하지 않는 신자라면, 오히려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좀 특별할 것 같은데 그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도를 특별히 더 많이 한 것도 아닙니다. 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단치는 않아 보입니다. 출근은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집에서 하루 종일 평일과 같은 일들을 했으니, 장소만 달랐을 뿐 사실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낸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일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주일을 특별히 거룩한 날로 지내기 어려운 경우가 훨씬 많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는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한 바리사이들을 예수님께서 반박하셨듯이, 주일 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 복음은, 안식일 계명이 의무일 뿐 아니라 권리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사회적인 차원에서 안식일 계명은, 신앙생활을 위한 시간을 허용해야 하고, 사람이 기계가 아니기에 적어도 이 날은 일을 멈추고 쉴 수 있도록 보장해 주어야 하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느님의 계명 자체가 인권을 보호하고 옹호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계명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 길을 알려 줍니다. 이 계명의 취지가 현대 사회 안에서도 제대로 지켜지도록 함께 노력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