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대 바실리오와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세례자 요한의 증언 (요한 1,19-28)

2016. 1. 1. 오후 8: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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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전 토요일]세례자 요한의 증언 (요한 1,19-28)



(1월 2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바실리오 성인은 330년 무렵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오늘날의 터키 카파도캬) 체사레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와 조모, 누이 마크리나,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오 주교와 세바스테아의 베드로 주교가 모두 성인일 만큼 영광스러운 가문의 출신이다. 은수 생활을 하기도 한 바실리오는 학문과 덕행에서 특출하였다. 370년 무렵 체사레아의 주교가 된 그는 특히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싸웠다. 바실리오 주교는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그의 수도 규칙은 오늘날까지도 동방 교회의 많은 수도자가 따르고 있다. 379년 무렵 선종하였다.
그레고리오 성인 또한 330년 무렵 바실리오 성인과 같은 지역의 나지안조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료 바실리오를 따라 은수 생활을 하다가 381년 무렵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가 되었다. 그레고리오 주교도 바실리오 주교처럼 학문과 웅변이 뛰어났으며, 이단을 물리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390년 무렵 선종하였다
.      


요한 1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적’ 문제를 계속해서 다룬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신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으므로, 이 서간은 신자들에게 그들을 조심하며 배운 신앙에 항구하게 머물 것을 권고한다.(1요한  2,22-28)
사랑하는 여러분, 22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아버지와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가 곧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23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는 아무도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아드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라야 아버지도 모십니다.
24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면, 여러분도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25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26 나는 여러분을 속이는 자들과 관련하여 이 글을 씁니다.
27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기름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28 그러니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의 재림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98(97),1.2-3ㄱㄴ.3ㄷㄹ-4(◎ 3ㄷㄹ)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
○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      


세례자 요한은 유다인들이 보낸 이들에게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자기는 그분의 길을 마련할 뿐이며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라는 점을 알려 준다.(요한 1,19-28)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1요한 2,22-28)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속이는 자들과 관련하여 이 글을 씁니다"  (25-26) 

'영원한 생명'으로 번역된 '텐 조엔 텐 아이오니온'(ten zoen ten aionion)에서 '영원한'으로 번역된 '아이오니온'(aionion)원형 '아이오니오스'(aionios)시간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것을 가리킨다.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펼쳐질 영원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러한 영원한 생명은 미래적 약속일 뿐 아니라 현재적 약속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즉각적으로 영생이 주어지게 되고 또한 그들은 하느님 안에서 풍성한 생명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 영원히 하느님과 함께 머무르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 약속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드님과의 일치이다(1요한2,23). 아드님 없이는 생명이 없고,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자에게만 영생이 있다(요한3,36; 1요한5,12). 

한편 '생명'으로 번역된 '조엔'(zoen)원형 '조에'(zoe)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들이 가지게 될 생명을 뜻한다. 이 생명을 소유한 자에게는 부활의 약속과 천국의 희망이 주어지게 된다. 

'속이는 자들'로 번역된 '톤 플라논톤'(ton planonton)에서 '플라논톤'(planonton)의 원형

'플라나오'(planao)'길을 잃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명사 '플라노스'(planos)에서 유래하며 바른 진리의 궤도를 걷고 있는 자를 이탈시켜 탈선시키는 것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유혹하다', '탈선시키다' 라는 뜻이다.

특시 여기서는 정관사를 동반하여 현재분사형으로 쓰였는데, 당시 초대 교회 공동체 안에 활동하고 있었던 특정한 '적 그리스도'적 인물과 집단으로서 사도 요한 당시에 대표적인 이단이었던 영지주의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을 속이는 무리들로서 성도들에게 자신들의 거짓된 교리를 주입시킴으로써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되심을 믿지 못하게 하며 바른 신앙에서 이탈하도록 계속 시도하고 있었다. 

이들의 특이한 점은 불신자들보다는 성도들을 속이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27) 

27절에서 사도 요한이 말하는 '기름부음'(토 크리스마; to chrisma)은 20절에도 나오지만 성도에게 임하는 성령을 지칭한다. 그 성령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본절에서 '주님께'에 해당하는 '아프 아우투'(ap autu)'그분에게서'(from Him)라는 의미로서 성령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나타낸다. 

그런데 요한 복음 14장 16절, 26절에 따르면 성령을 보내주는 분은 '성부 하느님'인 반면에, 요한 복음 16장 7절에 따르면 성령을 보내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요한 복음 15장 26절에 따르면 성령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사도들에게 보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행전 2장 33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성령을 부어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본문의 '아프 아우투'(ap autu)일차적으로는 '성부 하느님으로부터'라는 의미이며 이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라는 의미가 된다.

초대 교회 교부들이며 신앙의 옹호자들인 성 아타나시우스, 성 바실리오와 성 니사의 그레고리오성령이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것 주장하면서 동시에 성자에게서도 왔다는 사실을 반대하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서방 신학자들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였다는 데에 동의하였다. 

그렇게 해서 성도에게 임하신 성령은 성도의 영(심령) 안에(엔; en) 지속적으로 머무른다(메네이; menei). 

사도 바오로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자들에게만 성령이 내주하고 있다고 말하였다(1코린12,3). 그러한 성령은 성도의 영 안에서 슬퍼하기도 하시며(에페4,30), 탄식하기도 하시며(로마8,26),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도록 거룩한 열망을 일으키기도 하신다(갈라5,16.22.23).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기름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27) 

성도안에 머무르시는 성령께서 몸소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기 때문에(요한14,26), '그리스도의 적'(적 그리스도)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사실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가르칠'로 번역된 '디다스케'(didaske) '디다스코'(didasko)의 현재 가정법이고, '가르치십니다'로 번역된 '디다스케이'(didaskei)'디다스코'의 현재 직설법이다.

여기서 사용된 '디다스코'는 모르는 내용을 가르쳐 알게 하는 것도 아니고 어느 특정한 시간과 기간 동안 다 가르쳐서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그때 그때 가르쳐주는 것을 가리킨다.

당시 초대 교회 공동체에 있었던 영지주의 이단들성령의 가르침보다는 사람의 가르침을 중요시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가르침을 지적인 기름부음으로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영지(靈知)라는 지적 기름부음을 소유하고 있음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연약한 성도들을 속이고 유혹하였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이단을 염두에 두고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통한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르치십니다''디다스케이'(didaskei)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서 성령이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

사도 요한은 요한 복음 14장 26절"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는  말씀을 염두에 두고 이와같이 진술하였을 것이다.



오늘의 묵상

그리스도의 적’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가 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주장으로 신자들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와는 정반대로 그분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온 이스라엘 앞에서 증언합니다. 자신을 낮추면서 예수님을 드러내어 많은 이들을 그분께로 인도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는 데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명백히 다른 이들 앞에서 고백할 수 있어야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 가운데 자신이 메시아라고 외칠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마치 내가 정의와 진리의 기준인 듯이 행동하기는 생각보다 쉽습니다. 동이 트면 울던 수탉이,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울지 않으면 아침이 오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자기를 드러내려는 생각으로 가득할 때, 내 힘으로 세상을 구원할 듯한 착각 속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가리고 맙니다.
대림 시기에 예수님의 오심을 미리 알려 주는 역할을 맡았던 세례자 요한은, 지금도 우리에게 이미 와 계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자신을 감추고 예수님을 드러냈기에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일컬어지던 세례자 요한에게서, 진리에 이르는 길을 봅니다. 그리고 그의 겸손은 우리 모두를 감동시킵니다.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복음(요한1,19~28)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7)

여기서 '뒤에'로 번역된 '오피소'(opiso; after)는 장소에 관한 부사가 아니고 시간 부사로 쓰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자 요한보다 시간적으로 뒤에 오셨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출생에 있어서도 예수님께서는 6개월이 늦으셨고, 활동을 시작하신 것도 그렇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도록 파견된 일꾼이므로, 언제나 그분보다 시간적으로 앞서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오시는 분'으로 번역된 '호 에르코메노스'(ho erchomenos; one who comes; He who comes)이다.

그리스도교는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시작되었으므로, '오시는 분'의 사상은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요한의 문헌들에서는 예수님의 오심에 관한 언급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요한 복음 7장 28절'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요한 복음 8장 42절'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요한 복음 5장 43절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요한 복음 10장 10절'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요한 복음 12장 47절'나는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라는 구절들이 있다.

또한 그분의 오심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그분은 지금도 각 사람들을 찾아오셔서 문을 두드리시며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심판하시는 주님으로 재림하실 때까지는 끊임없이 각 사람을 찾아오셔서 구원의 초청에 응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리신다.

여기서 '오시는 분이신데'로 번역된 '에르코메노스'(erchomenos)현재 분사인 것은 예수님께서 계속 우리에게도 '오시는 분'임을 알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오시는 분'의 개념은 주님의 재림과도 관련된다.

요한 복음 14장 3절'내가 ~다시 와서'라는 표현에 이러한 사실이 잘 드러난다. 그분께서는 약속대로 다시 오신다.

어느 누구도 그날과 그 시간을 알 수 없지만(마태24,36),  오로지 하느님께서 정하신 그때에 다시 오실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도둑같이 오실 주님의 재림에 준비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그분의 생명과 복락의 나라에 결코 참여할 수가 없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라는 것은 일상의 삶 속에서 죄와 불의를 멀리하고, 거룩하고 흠없으며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세례자 요한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자신을 종으로 비유하는데, 자신은 유대인 가정에 있는 종 가운데서도 가장 비천한 종이 하는 일인, 외출에서 돌아온 주인의 신을 벗기고 발을 씻어 주는 자격조차 없음을 '나는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는 표현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세례자 요한이 자신을 종보다 더 못한 존재로 극진히 낮추는 것은 바로 이어 등장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기 위함이다(마태3,11; 마르1,7; 루카3,16참조).



 2014년 12월 14일 (대림 제3주일) 요한 1, 6-8. 19-28.​ ~ 서공석 신부님. 최성영 신부님, 박재식 신부님, 전삼용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증언> 송영진 모세 신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6-27)."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라는 말은,
"나는 다만 물로 세례를 베풀 따름이다(공동번역)." 라는 말인데,
이 말은, 예수님의 '성령의 세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보다 예수님께서 하시게 될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라는 말은,
"너희는 아직 모르고 있지만, 그분은(메시아는) 이미 너희 가운데에 오셨다."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에는, "메시아께서 이미 오셨으니 너희는 그분을 알아보아야 하고,
믿어야 한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라는 말은
"그분은 나보다 더 높으신 분이고, 나보다 더 중요한 분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중요한 인물이 길을 갈 때,
수행원은 앞에서 가고 그 중요한 인물은 뒤에서 가는 상황에서 온 표현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은,
"나는 그분의 종보다 못한(낮은) 존재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요한이 자기의 역할과 직분을 표현한 말입니다.


우리는 '겸손'과 '비굴'을 구분해야 합니다.
'겸손'이란, 자기가 서 있어야 할 위치를 바르게 알고,
그 위치에 제대로 서는 일입니다.
'비굴'은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데도 용기가 없고 비겁해서
자기가 서 있어야 할 위치보다 더 낮은 쪽으로 내려가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정말로 그렇게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을 정도로 낮은 사람이었을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생각한다면, "그렇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고,
하느님이셨던 분"입니다(요한 1,1-2).
그리고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는" 그런 분입니다(요한 1,3).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피조물인 한 인간일 뿐입니다.
(요한뿐만 아니라 어떤 예언자라도 다 마찬가지이고, 우리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는 요한의 말은,
'비굴'하게 자신을 낮춘 일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하게 표현한 '겸손'입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꼭 필요했나?
만일에 요한의 증언이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실 수 없었나?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어떤 조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뭔가가 꼭 필요하다면, 전능하신 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꼭 필요했던 것은 아닌 것이 됩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부르셔서 그런 일을 맡기신 것은,
하느님 쪽의 필요 때문이 아니라,
아마도 사람들이 좀 더 쉽게 메시아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
즉 사랑과 자비일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필요한가?
오늘날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요한의 증언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지 않은가?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그가 떠난 뒤에도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라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던 안드레아는(요한 1,35-39)
베드로에게 가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라고 증언했습니다(요한 1,41).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안드레아를 통해서 베드로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성령 강림 후에 본격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한 사도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언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사도 2,36).
그렇게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사도들을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그리고 각 신앙인들을 통해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증언은 말로만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의 재림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1요한 2,28)."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라는 말은,
'삶으로' 실천하는 신앙생활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라는 뜻입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는 '재림과 심판 때'이고,
"확신"은 구원에 대한 확신(보증)입니다.
"부끄러운 일"은 신앙인이면서도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 1서 저자의 말을 '증언'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언하는 일은 말로만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온 삶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2-33)."


이 말씀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다." 라는 말은,
단순히 예수님을 알고 있다고 증언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온 삶으로' 증언한다는 뜻입니다.
"나도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온 삶으로' 예수님을 증언한 신앙인들은
반드시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마태복음 3장 1~12 설교 : 세례 요한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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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후 화요일] 오병이어 (마르 6,34-44)16.01.04조회 51[주님 공현 후 월요일] 공생활 시작 (마태 4,12-17.23-25)16.01.03조회 49[성 대 바실리오와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세례자 요한의 증언 (요한 1,19-28)16.01.01조회 120[2016. 1. 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예수 (루카 2,16-21)15.12.31조회 51[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요한 1,1-18)15.12.31조회 122[성탄 팔일 축제 내 제6일]한나의 감사기도 (루카 2,36-40)15.12.30조회 62[성탄 팔일 축제 내 제5일] 봉헌 (루카 2,22-35)15.12.28조회 85{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15.12.27조회 71[12월 26일 토요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파견 (마태 10,17-22)15.12.25조회 87[대림 제4주간 목요일]즈카리야의 노래 (루카1,67-79)15.12.24조회 47[대림 제4주간 수요일] 세례요한 탄생 (루카 1,57-66)15.12.22조회 495[대림 제4주간 화요일] 마리아의 노래 (루카 1,46-56)15.12.21조회 54[대림 제4주간 월요일] 엘리사벳을 방문 (루카 1,39-45)15.12.21조회 64[대림 제3주간 금요일]요셉 (마태 1,18-24)15.12.17조회 404[12. 7. 대림 제3주간 목요일]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마태 1,1-17)15.12.16조회 113[대림 제3주간 수요일] 오실 분 (루카 7,18ㄴ-23)15.12.15조회 79[대림 제3주간 화요일]세리와 창녀 (마태 21,28-32)15.12.14조회 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