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4주간 월요일] 엘리사벳을 방문 (루카 1,39-45)
아가의 연인은 노루처럼 산을 넘어 사랑하는 여인에게 달려와, 사랑을 고백한다. 교부들은 산을 넘어 달려오는 연인의 모습이 말씀의 육화를 뜻한다고 설명한다.(아가 2,8-14)
8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9 나의 연인은 노루나 젊은 사슴 같답니다. 보셔요, 그이가 우리 집 담장 앞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본답니다.
10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11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12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왔다오. 우리 땅에서는 멧비둘기 소리가 들려온다오. 13 무화과나무는 이른 열매를 맺어 가고, 포도나무 꽃송이들은 향기를 내뿜는다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14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 벼랑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 제1독서).
시편 33(32),2-3.11-12.20-21(◎ 1ㄱ과 3ㄱ 참조)
◎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주님께 새로운 노래를 불러라.
○ 비파 타며 주님을 찬송하고,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불러라.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고운 가락을 내며 환성 올려라.
◎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주님께 새로운 노래를 불러라.
○ 주님의 뜻은 영원히 이어지고, 그 마음속 계획은 대대로 이어진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
○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그분 안에서 우리 마음 기뻐하고, 거룩하신 그 이름 우리가 신뢰하네. ◎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찾아가셨을 때, 엘리사벳 태중의 요한은 성모님 태중의 예수님께서 찾아오심을 알아본다. 아가에서 두 연인이 사랑을 속삭이듯이, 예수님께서는 태중에서 이미 요한을 부르시고 요한은 태중에서 화답한다.(루카 1,39-45)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복음).
대림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아가 2,8-14)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왔다오. 우리 땅에서는 멧비둘기 소리가 들려온다오."(12)
솔로몬은 이제 겨울도 지나고 비가 그친 좋은 계절이 왔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키 힌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키 힌네'(ki hinne)에서 '키'(ki)는 '정녕'(탈출3,12), '진실로'(여호2,24)라는 강조의 뜻을 지니는 단어이고,'힌네'(hinne)는 '자' 혹은 '보라'(see!)라는 뜻을 지닌 불변사이다.
여기서 '지니고'에 해당하는 '아바르'(abar)는 '건너가다', '통과하다'라는 의미이고, '걷혔다오'에 해당하는 '할라프'(hallap)는 본문에서 '아바르'(abar)와 같이 '건너가다'라는 의미를 갖는 동사이지만, 여기서는 같은 단어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단어에 이어지는 '할라크 로'(hallak lo)는 새 성경에서 번역되지 않았다. 이것을 번역하면 '그 자신이 갔다'(he is gone to himself)이다. 여기서 '그'라는 3인칭 단수는 '비'를 의미하는 '학게셈'(haggeshem)을 가리킨다. 따라서 '할라크 로'(hallak lo)는 '장마는 그쳤다오'에 해당하는 '학게셈 할라프'(haggeshem hallap)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즉 '겨울은 지나고'와 '장마는 그쳤다오'라는 표현에 이어 이제 우기가 완전히 지나갔음을 강조하는 표현을 다시 반복하여 술람미 여인으로 하여금 집 밖으로 나올 것을 거듭 촉구하는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의 겨울은 우기에 해당한다. 우기는 10월에 시작되어 다음 해 4월까지 이어진다.
이 가운데 10월 중순이나 하순에 접어들면 본격적인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구약은 이것을 '이른 비'(요엘2,23; '가을비')로 표현한다.
이때 내리는 비는 밀과 보리 수확의 풍년을 가늠하는 중대한 요인이었기에, 사람들은 이 비를 기다렸고 기뻐하였다(시편65,9-14).
반면 4월에 내리는 마지막 호우는 '늦은 비'('봄비')로 표현된다. 팔레스티나 지역의 농사를 위해서는 비가 이때까지만 내리고 중단되어야 헀다. 왜냐하면 5월과 6월은 보리와 밀을 추수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가서 2장 12절의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가 의미하는 것은 '늦은 비(봄비)가 내리는 4월이 지나고 초목이 자라며 꽃이 필 봄이 왔다'는 것이다.
새로운 계절이 왔다는 이러한 표현은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과의 관계에 대한 상징으로 볼 수도 있는데, 이 표현은 두 연인이 서로 떨어져 있는 시기가 지나고, 이제 재상봉을 통해 다시금 사랑의 꽃을 피우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왔다오'
본문은 땅에 봄기운이 완연히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준다. '꽃에 해당하는 '한닛차님'(hannitsanim; the flowers)의 원형 '닛찬'(nitsan)은 '빛나다', '번쩍이다'라는 뜻을 지닌 '나차츠'(natsats)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이것은 '꽃'이 눈이 부시듯한 아름다움을 지녔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드러내고'에 해당하는 '니르우'(niru)는 '보다', '바라보다'라는 뜻을 갖는 '라아'(raah)의 수동형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계절 순환의 역사에 따라 꽃이 지면에 드러나 보여지는 모습을 시적(詩的)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노래의 계절'로 번역된 '힛자미르'(hizzamir; the season of singing)는 정관사 '하'(ha)에 '노래'를 의미하는 '자미르'(zamir)가 결합된 형태이다. 또한 '다가왔다오'에 해당하는 '힉기아으'(higgiah)는 '~에 이르다', '~에 닿다'라는 뜻을 지닌 '나가으'(nagah)의 사역 농동형이다. 여기서 사역형을 사용한 것은 하느님의 뜻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자연의 순환을 암시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표현 가운데는 하느님께서 자연을 주관하시어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는 아름다운 계절이 오게 하신 것처럼,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 자신의 사랑도 아름답게 꽃을 피우게 하실 것이라는 솔로몬의 희망이 담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 땅에서는 멧비둘기 소리가 들려온다오'
본문은 이스라엘 땅에 봄이 왔음을 '멧비둘기 소리'를 통해 나타낸다. '멧비둘기'에 해당하는 '핫토르'(hathor)의 원형 '토르'(thor)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비둘기와는 다른 종류의 새로서, '돌아다니다', '살피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투르'(thur)에서 유래하며, 먼 지역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를 잘 살피는 특성을 지닌 야생 비둘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새 성경은 '멧비둘기'라는 단어를 번역했는데, '(얼룩진)무늬가 있는 산비둘기'라는 말이다. 이 비둘기는 4월초 곧 봄이 이를 때에 팔레스티나로 돌아오는 철새이다. 따라서 이런 야생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서 들린다는 표현은 바로 이스라엘 땅에 봄이 왔음을 청각적 이미지를 통해 나타낸 것이다.
솔로몬은 이처럼 봄이 도래했음을 '장마는 걷혔다오','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왔다오', '멧비둘기 소리가 들려온다오'라는 회화적 이미지를 통해 매우 감성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 '우리 땅에서는'에 해당하는 '뻬아르체누'(beartsenu; in our land)에서 1인칭 복수 접미어 '누'(nu)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 땅'은 일차적으로 왕이 다스리는 이스라엘 전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지금 두 사람이 만나고 있는 술람미 지역의 평원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엘리사벳의 믿음과 기쁨> 송영진 모세 신부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1-42)"
여기서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라는 말은,
엘리사벳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성령께서 시키시는 대로 로봇처럼 외쳤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모든 것을 깨닫게 되었고, 믿게 되었고,
그래서 기뻐서 외쳤다는 뜻입니다.
깨닫고 믿은 것도
엘리사벳 자신이 한 일이고,
기뻐서 외친 것도 엘리사벳 자신이 한 일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도와준 것은 성령께서 하신
일이고.)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라는 말은,
엘리사벳 태중에 있는 세례자 요한도 기뻐했다는 뜻인데,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
말은, 자기 태중의 아기에게도 성령의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엘리사벳이 느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나타났을 때 아기에 대해서,
"그는...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루카 1,15)."
라고
예언했었습니다.
나중에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에게,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 라는 말을 하게 되는데,
그의 기쁨은 이미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시작된 기쁨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서 마리아가 차지하는 위치와 비중에 대한 증언입니다.
마리아
태중의 아기, 즉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구원 사업을 직접 하실 분이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복되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복 자체이신, 즉 은총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분이라는
말은,
한 인간에 대한 찬양이기 때문에 특별한 말이 됩니다.
마리아는 메시아의 어머니가 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에 있게 된 분입니다.
(엘리사벳의 찬양은,
사실은 한 인간에게 그런 복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여인들 가운데에서'
라는 말은, '남자들은 제외하고'가 아닙니다.
이 말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라는 뜻입니다.
'가장 복되시며' 라는
말은,
마리아가 받은 복과 사람들이 받게 될 복을 비교해 볼 때 가장 크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서, 또 사람들보다 먼저
받으셨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마리아가 가장 먼저 받은 그 '복'은, 또 가득히 받은 그 '복'은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로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루카
1,43-44)."
엘리사벳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 첫 번째 인물입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엘리사벳과 마리아 사이에 더 많은 대화가 있었을 것 같은데,
어떻든 지금
엘리사벳은 이 모든 일이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믿고 있고,
마리아 태중의 아기가 메시아라는 것도 믿고 있습니다.
(자기
태중의 아기가 하게 될 일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찌 된 일입니까?" 라는 말은 놀랍고 감사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의 기쁨을 나타낸 말이기도 하고,
엘리사벳 자신의 믿음과 기쁨을 나타낸 말이기도
합니다.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신 일은, 태중에 있는 아기들도 기뻐하는 일입니다.
온 인류의 구원이 시작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여기서 '행복하십니다.'는
'복되십니다.'로 바꿔야 합니다.
이 말은 앞의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라는 말과 뜻이 같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은총이 가득하다고 말했었습니다(루카 1,28).
그러나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같은 은총을(복을) 다른 관점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하느님 쪽에서
보면, 마리아의 복은 하느님께서 가득히 주신 것이고,
마리아 쪽에서 보면, 믿음으로써 가득히 받은 것입니다.
(가득히 주셔도 안
받으면 못 받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엘리사벳의 기쁨이 남의 일을 보고 축하하면서 함께 기뻐하는 그런 기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기쁨이라는
점입니다.
메시아께서 세상에 가져다주시는 기쁨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엘리사벳 자신도 그 '모든 사람' 속에
포함됩니다.
'모든 사람의 기쁨'은 '나의 기쁨'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기쁨을
보고 함께 기뻐해 준 것이 아니라,
자기도 정말로 기뻤기 때문에 기뻐한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하느님께서 마리아와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에 주신 기쁨을 받고 기뻐한
첫 번째 인물이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받은 은총은
마리아만의 것이 아니라
마리아를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은총입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받은 은총은 곧 믿는 이들이 받게 되는
은총이기도 합니다.
엘리사벳은 믿었고, 그 은총을 함께 누렸습니다.
성탄절은 옛날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회상하고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이루어진 일을 기뻐하는 날입니다.
('남의 날'이 아니라 '나의
날, 우리의 날'입니다.)
단,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믿고, 믿는 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만.~
아가서는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는 성경입니다. 아가는 결혼식 때 또는 연인들 사이에서 사랑을 고백할 때 주로 사용하던 노래였으나, 이 노래에 메시아적 성격을 부여하여 이해함으로써 성경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오늘 독서로 아가의 한 단락을 선택한 것은 어떤 특정한 해석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고대와 중세 그리스도교 교부들은 아가의 연인(남자)을 예수 그리스도로 보고 그 애인(여자)은 교회로 또는 신자 개인으로 주로 해석하는데, 특히 여기서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는 연인의 모습을 말씀의 육화로 이해합니다. 연인은 그렇게 다가와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제 꽃피는 봄이 되었으니 사랑의 때라고 말하면서, 사랑을 속삭이며 여인을 부릅니다.
“유다 산악 지방”으로 엘리사벳을 찾아가시는 성모님,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성모님의 태중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언덕을 넘어오는 이 아가의 연인과 중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다가가시고, 그에게 이제 때가 가까이 왔다고 일러 주십니다. 태중의 아기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선포해야 할 그분이 바로 눈앞에 계심을 알게 하시고, 그가 태중에서 뛰놀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가까이 오시어, 이미 “우리 집 담장 앞에서” 우리의 창문에서 사랑을 속삭이십니다. 우리를 “나의 애인, 나의 아름다운 여인, 나의 비둘기”라 부르시며 우리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분을 알아 뵙고 태중에서 뛰놀았듯, 연인의 목소리에 가슴이 떨리는 여인의 마음으로 화답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