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간 수요일>(2015. 12. 9. 수)(마태 11,28-30)
대림 제2주간 수요일 제1독서 (이사40,25-31)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28)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29)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30)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31)
이사야서 40장 27절에서는 수난과 징계 가운데서 주님께 대한 절대 신앙이 흔들리는 선민을 향한 책망이 소개되었다. 이제 이사야서 40장 28절과 29절에서는 창조자이신 주님의 절대적인 능력과 은혜가 선포된다.
이사야서 40장 28절은 두 번 거듭되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이사야서 40장 21절 상반절과 동일한 질문이지만, 미완료가 아닌 완료 시제가 사용되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미 알고 있으며 들었다는 사실을 보다 더 강조한다.
여기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느님의 구원 능력을 믿지 못하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들은 이미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고, 그들은 그들 조상에게 역사하신 하느님의 권능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그들으르 증거된 율법의 말씀을 통해서도 하느님께서 얼마나 신실하시며 크신 권능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신지를 이미 들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하느님의 사랑과 그분의 신실하심을 의심햇던 것을 향하여 이사야 예언자는 그만큼 그들을 휘감고 잇는 어두움의 잔재가 짙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그들을 향해 하느님의 영원하심, 그분의 전능하심, 신실하심과 한결같으심의 면모를 선포하며 다시금 하느님을 신뢰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 처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느님께서는 두 가지 호칭으로 소개되고 있다. 서두에 나오는 '엘로헤'(ellohe)의 기본형 '엘로힘'(ellohim)은 하느님의 전능하심이나 창조주되심을 강조할 때, 그분의 능력의 크고 위대하심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호칭이다.
이어 제시되는 '예호와'(yehowa ;주님)은 구약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신명(神名)으로 기본적으로는 '스스로 계신 분'이란 의미를 지니며, 구약에서는 하느님과 그 백성 사이의 계약 관계를 성실히 지키시는 하느님의 면모를 강조할 때 사용하는 호칭이다.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지금 그들에게 권고의 말씀을 주시는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 신앙을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그분은 이 피조 세계에 속하지 아니한 창조주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동시에 지금도 그들과 맺은 계약을 잊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계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이러한 하느님의 신명(神名)을 연이어 제시한 것은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당신의 백성과 맺은 계약을 잊지 아니하시고, 그들이 어디 있든 지키시며 보호하실 것이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을 제시되는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라는 명칭은 주 하느님의 창조주 되심을 더욱 구체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땅끝까지'에 해당하는 '케초트 하아레츠'(qetsoth haarets ;the ends of the earth)의 '땅끝'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원래 당하는 시련과 그로 말미암아 위축된 상태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가장 끝에 있는 것, 극단에 있는 것조차도 창조하신 하느님의 전능을 상기시켜 준다. 이러한 명칭은 시련 가운데 위축당한 백성들에게 하느님께서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 분이신지를 알려주면서, 동시에 그들을 극단의 위기 가운데서도 구원하시고 새롭게 조성하실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고' 이사야서 40장 28절은 주 하느님께서 무한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임을 드러낸다. 여기서 '피곤한'에 해당하는 '이아프'(iap ;tired), '지칠'에 해당하는 '이가으'(igah ;weary)인데, 여기서 '이가으'의 원형 '야가으'(yagah)는 힘에 부치도록 심한 노동을 한 결과 기진맥진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혼자서 온 우주를 창조하셨지만 결코 기진맥진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능력의 말씀으로 붙들고 완전한 섭리로 움직이고 계시지만, 결코 피곤을 느끼시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과는 딜리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피곤함을 느끼지 않으시며, 그 능력에 있어서 무한한 분이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피곤하고 지치고 위축되고 쇠약해지면, 하느님의 능력과 역사하심까지도 과소평가하고, 자신의 범주에서 판단하기 일쑤이다(창세18,11-14 ;민수11,14 ;15,21-23).
따라서 이사야는 하느님의 이러한 면모를 강조하며, 그들이 피곤하고 지쳐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피곤하시조 지치지도 않으시기에, 그들을 향한 구원을 포기하지 않고 온전히 성취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고취시키는 것이다.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이 구절은 인간으로서는 하느님의 슬기가 어느 정도까지인지를 결코 파악할 수도 없으며, 헤아릴 수도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여기서 '헤아릴 길이 없다'에 해당하는 '엔 헤케르'(en heqer)에서 '엔'(en)의 원형'아인'(ain)은 '존재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무'(無), '공허'를 의미한다.
그리고 '헤케르'(heqer)는 '측량하다'(1열왕7,47), '숫자를 헤아리다'(예레46,23)는 뜻의 동사 '하카르'(haqar)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속량함', '계산(계수)함' 등의 의미를 지닌다. 즉 이것은 '측량이 절대 불가능함'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느님의 슬기는 인간의 조사 범위를 뛰어넘는 명철함이다. 또한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아무리 연구하고 깊이 생각한다 할지라도, 그 명철함의 한계를 발견해 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잠시 당신 백성을 외면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스러운 일을 계획 가운데서 진행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본절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고난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참으로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하며, 또한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축복이 무엇인지를 약속해 준다.
자신의 유한선을 깨닫고 하느님의 무한하심과 전능하심을 깨닫는 자들은 비록 고난 가운데 있더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의 권능과 지혜를 의지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즉 그들은 자신의 무력함과 한계를 인정하며 하느님만이 진정으로 의지할 분이시며, 참되고 온전한 도움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하느님께 도움을 구하게 된다.그렇게 살아가는 자는 하느님의 권능을 힘입으며 이 땅에서 더욱 더 능력있게 살아갈 수 있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에 해당하는 '웨코예'(weqoye)의 원형 '카와'(qawa)는 참을성있게 기다리는 것, 혹은 위를 쳐다보면서 대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어두운 밤이 빛(광명)을 바란다는 문맥(욥기3,7), 하루 종일 노동한 품군이 품삯을 바란다는 구절(욥기7,2), 고난 가운데서 주 하느님의 도우심을 대망한다는 구절 (시편25,5 ;39,8) 등에서 사용되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인생의 고난의 시기일지라도 광명의 아침을 가져다주실 주 하느님을 참을성있게 대망하는 자들은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은 '새 힘을 얻고'라는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에 해당하는 '야할리프 코아흐'(yahalipu koah)는 문자적으로 '그들은 힘을 움트게 할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땅 속에서 새싹이 나오듯이 새 힘이 지속적으로 솟구쳐 오르며 강성해지게 되는 것을 생동감있게 묘사한 것이다.
본문의 동사 '야할리프'(yahalip)의 원형 '할라프'(hallap)는 나무에서 싹이 나는 것(욥기14,7), 땅에서 풀이 돋아나는 것(시편90,5)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사역 능동형 3인칭 복수로 사용되어 주님을 바라는(앙망하는) 자들에게 힘이 솟아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의미한다고 해서 금방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환경 자체를 뒤바꾸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를 의지하는 백성들에게 샘솟듯이 솟구치는 능력, 왕성하고 지속적인 생명력을 부여하신다.
그래서 하느님의 백성들은 그 힘을 의지하며 현실의 어두움에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그 어두움 가운데서도 빛의 삶을 살며,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으로 찬란한 새벽이 여명을 열어 젖히는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것이다.
<멍에, 안식, 자유> 송영진 모세 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1) '질병'은 누구에게나
멍에입니다.
좋은 예가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입니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마르
5,25-26)."
오늘날에도 그 여자처럼 어떤 병에 걸려서 많은 고생을 하고,
의사의 손에 전 재산을 모두 쏟아 부어도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지고,
그래서 희망을 잃고 고통과 불행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복음 말씀에 나오는 여자는
예수님의 옷을 만지고 병을 고쳤습니다(마르 5,27-29).
예수님은 그 여자를 멍에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옷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여자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그 여자가 병을 고친 것에만 만족하고 그냥 떠나버렸다면,
복음서 저자들이 그
여자의 이야기를 따로 복음서에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찾으셨고(마르 5,30-32),
그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 5,3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자는 그때 이미 병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왜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라고 말씀하셨을까?
육신의 병을 고친다고 해서 멍에를
완전히 벗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몸만 건강하고 영혼이 건강하지 않다면, 그것은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몸이 건강하다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따라서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라는 말씀은,
육신의 병이 고쳐졌음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이면서 동시에
영혼까지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당부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2) 재산도(돈도)
멍에입니다.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던
어떤 부자가 좋은 예입니다(마태 19,16).
그가 가지고 있던
많은 재물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게 막는 멍에였습니다(마태 19,22).
누구든지 '예수님만' 믿으면 이 멍에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자기 자신도 이 멍에를 벗으려고 스스로 노력해야 합니다.
재산이(돈이) 부자들에게만
멍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가난한 사람이 재물을 얻으려고(부자가 되려고) 욕심을 부리고 집착한다면,
역시 가난한 사람에게도
멍에가 됩니다.
돈이 있으면 버리지 못해서, 돈이 없으면 가지려고 해서,
돈은 누구에게나 다 멍에가 됩니다.
3)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종교가) 멍에였습니다.
제대로 지키기 어려운 율법 조항들 자체도 멍에였지만,
율법을 제대로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더
멍에였습니다.
따라서 수많은 율법 조항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일반 서민들뿐만 아니라,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또는 지키려고 한)
사제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도
멍에 속에 갇혀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이라고 가르치심으로써
사람들을 율법이라는 멍에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
해방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해방과 자유를 주셨는데도
멍에가 더 좋다고, 자기들은 그게 더 자유롭다고 고집부린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있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는
"나에게 배워서
멍에를 벗어라."이고,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는
"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멍에도 아니고 짐도
아니다."입니다.
이 말씀들을 풀이하고 해석할
때,
"참된 자유와 해방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을 감수해야 한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얼핏 보기에는 맞는 말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새로운 멍에와 짐을 주셨다고 말한 것이기 때문에 틀린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멍에와
짐을 주신 적이 없는 분입니다.
유대교의 무거운 멍에를 그리스도교의 가벼운 멍에로 바꿔 주신 분이 아니라,
멍에와 짐 자체를 완전히
없애 주신 분입니다.
지금의 교회법이나 여러 가지 교회 규칙들은 멍에도 아니고 짐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기 위한
안전장치들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계명과
가르침과 교회법을 멍에와 짐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유대교보다는 훨씬 더 가벼운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은 사랑도
기쁨도 없이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해방과 평화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4) 우리의 인생 자체가
하나의 멍에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이 천막집에서 우리는 탄식하며,
우리의 하늘 거처를
옷처럼 덧입기를 갈망합니다(2코린 5,1-2)."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인생이라는 멍에를 벗은 다음에는
하느님 나라에서 완전하고 영원한 자유와 안식과 행복을 누리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희망
때문에, 또 노력하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2015년 12월 9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11,2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