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간 월요일] 중풍병자 치유 (루카 5,17-26)

2015. 12. 7. 오후 6:39:53

글자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중풍병자 치유 (루카 5,17-26)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암브로시오 성인은 340년 무렵 이탈리아 트레비리(지금의 독일 트리어)의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법학을 공부한 그는 변호사로 활동하였고, 로마에서 공직 생활도 하였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주교가 된 암브로시오는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정통 그리스도교를 옹호하였다. 그는 특히 전례와 성직의 개혁을 꾸준히 실행하는 한편, 황제의 간섭을 물리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암브로시오 주교의 훌륭한 성품과 탁월한 강론은 마니교의 이단에 깊이 빠져 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교회로 이끌기도 하였다. 397년에 세상을 떠난 그는, 예로니모 성인과 아우구스티노 성인, 그레고리오 성인과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회 학자’로 칭송받고 있다.     

 

복음

<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26
17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18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19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냈다. 20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21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22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23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24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25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26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대림2주간 월요일.제1독서 (이사35,1-10)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5~6ㄱ)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5) 

본절부터 7절까지는, 종말에 선민 이스라엘의 땅에 넘칠 환희과 기쁨을 예고하는 35장 1-2절에 이어, 다시 하느님께서 가져오실 당신 백성들과 그들의 땅의 역동적 회복을 예언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역동적 구원은 부분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에서 성취되었다.

 특히 5절과 6절은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 예수께서 자신이 메시아되심을 입증하면서 답하신 말씀과 동일한 것이다(마르7,37 ; 루카7,22 ; 마태11,2-6).즉 이것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문 서두에 제시된 '그때에' 에 해당하는 '아즈'(az ; then)일차적으로는 메시아 시대 나타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것은 주님께서 도래케 하시는, 온전한 회복의 나라,영원한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을 통해 이루어질 그 나라로 귀결된다. 

한편, 하느님께서 회복케 하시는 역사(役事)가 이루어질 날에 일어나게 될 사건으로 먼저 제시되는 것은 맹인의 눈이 밝아지는 것이다. 

여기서 '열리고'에 해당하는 '티파카흐나'(thiphaqahna) '열다' 의미를 지닌 '파카흐'(phaqah)수동형으로서, '열릴 것이다'는 의미가 된다.

이처럼 이 단어가 수동형으로 사용된 것 그것이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것이다. 

즉 맹인의 눈이 열리는 역사가 전적으로 주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아울러 이것은 문자 그대로 맹인이 눈을 뜨고 보게 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으며, 영적 어두움 속에서 멸망의 길을 걷던 자들이 진리의 빛을 보고, 생명의 길을 가게 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이것은 하느님을 거역하던 백성에게 내려졌던 책벌이 풀리는 것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이사6,10; 29,18). 그들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보게 될 것이며,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참된 가치관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더 이상 무익한 이방의 강대국이나 헛된 이방의 우상이 아닌, 완전한 구원이신 주 하느님만을 의지하게 될 것이다. 

한편, 이어지는 본절 후반부는 '눈먼 이의 눈' 에서 '귀먹은 이의 귀'로 바뀌었을 뿐, 앞 부분과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평행 대구 문장으로 풀이된다. 여기서는 청각기관인 '귀'란 표현이 사용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했던 자들이, 복음의 말씀을 통해 그 귀가 열리고 진리를 깨닫게 되는 역사가 이루어 진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떠뜨리리라.' (6ㄱ)

예수님은 벳자타 못 가에서 서른 여덟 해나 누워있던 병자 치유하셔서 그로 하여금 걷게 하셨으며(요한 5,2-9),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의 '아름다운 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해 그로 하여금 사슴처럼 뛰게 하였다.(사도 3,1-9) 이처럼 메시아 시대가 되면, 절름발이도 건강한 다리를 갖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영적으로 해석하면, 불완전한 신앙을 가졌던 자들이 신앙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고, 죄의 굴레에 얽매여 바르게 사는 데 있어 제한을 받던 자들이, 그 굴레를 떨쳐버림으로 인해, 진리의 길을 마음껏 활보한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란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활 중 갈릴리 지방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하셔서, 그로 하여금 말을 분명하게 하신 사건(마르코 복음 7,31-37)을 연상케 한다. 

이것 역시도 영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과거에는 하느님을 찬양하지 못했던 자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며, 하느님의 진리를 침묵하던 자들이 입을 벌려 담대히 그 진리를 증거하는 자들이 된다는 것으로 알아 들을 수 있다.

한편, 앞의 5절의 경우는, 메시아의 활동으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 표현이 모두 수동형으로 사용되어,하느님의 주도적인 역사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본절의 경우, 발로 걷고 입으로 말하는 역사가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는 강조 능동형과 능동형 동사 사용되었다.

이것은 메시아 시대의 회복의 양상이 하느님의 주도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한 자들의 적극적인 순종과 증거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것임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있는 것이다.



지붕을 뚫고 내려온 중풍병자대림 2주 - 깨어 있어라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 


12월 7일의 복음 말씀은,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루카 5,17-26).'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보시자마자 바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루카 5,20),
그 병자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일은,
또 가장 중요한 일은 '죄의 용서'였기 때문입니다.
몸의 병을 고쳐 주는 일도 필요했지만,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우선 먼저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 병자 자신이 먼저 '죄의 용서'를 청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중풍 병자였기 때문에
예수님께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하기 위해서 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고정관념입니다.)
그 병자는 용서와 치유를 모두 청했겠지만,
그래도 죄의 용서를 '먼저' 청하고,
병의 치유는 '그 다음에' 청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요즘에도 어떤 병에 걸렸을 때,
입원을 하기 전에, 또는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고해성사를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 때문에 병에 걸린 것이 아니더라도,
병 때문에 죄가 더 생각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는 너의 죄를 용서했다." 라는 뜻인데,
이 말씀을 좀 더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간음죄로 붙잡혀 온 어떤 여인에게 하신,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요한 8,11)."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용서'는 어떤 죄를 죄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일이 아니라,
지은 죄에 대한 처벌을 면제해 주는 일입니다.
(용서는 '무죄 선고'가 아니라 '형 집행 면제'입니다.)


 


지은 죄에 대한 처벌을 면제해 주는 일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즉 용서의 권한은 하느님에게만 있습니다.
그래서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루카 5,21)"
라는 바리사이들의 말 자체는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는 틀린 말이 됩니다.
(그 중풍 병자가 예수님께 죄의 용서를 청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병자는 예수님을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고 믿었다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이웃의 죄를 용서하는 일은,
하느님의 권한을 행사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용서의 은혜를 이웃과 나누는 일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웃의 죄를 용서하는 일은,
이웃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이웃 대신에 내가' 하느님께 청하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리신 예수님께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3,34)." 라고 기도하신 것은,
죄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께 사람으로서 청하신 일입니다.
(그리스도이신 분의 말씀으로 생각한다면,
죄인들을 용서한다는 그리스도 자신의 선언이 되기도 합니다.)
 


어떻든 그 중풍 병자는 자기가 지은 죄들을 뉘우치고 있었을 것이고,
그 죄들 때문에 받게 될 하느님의 벌을 두려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뉘우침과 두려움은 회개로 이어지고, 용서받을 준비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용서한다." 라는 현재형이 아니라,
"용서받았다." 라는 과거형이라는 점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고,
회개는 용서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에 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말씀은,
"너는 이미 죄를 용서받았으니,
이제부터는 보속을 하면서 살아라." 라는 뜻이 됩니다.
 


그가, 또는 우리가 실제로 용서를 받은 '시점'은 구체적으로 언제인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 자체가 하느님의 용서를 뜻하는데,
거슬러 올라가면, 메시아를 약속하신 때(창세 3,15),
그때 이미 하느님의 용서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용서하셨지만,
그 용서를 받는 것은 인간들 자신들에게 달려 있는 일입니다.
회개는 이미 주신 용서를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고,
회개하지 않는 것은 용서를 주셨는데도 안 받겠다고 거부하는 일입니다.
 


복음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라고 말씀하신 뒤에
그 병자의 중풍을 고쳐 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루카 5,24).
이 말씀만 보면, 병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권한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의 병을 고쳐 주신 것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고, 용서를 먼저 말씀하신 다음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예수님의 원래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의 논쟁이 없었어도
예수님께서 그 중풍 병자의 중풍을 고쳐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된다는 것.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권한과 권능이 입증되었고,
그 중풍 병자는 용서와 치유를 모두 얻어서 돌아갔고,
그 일을 목격한 사람들은 놀라서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면 정말로 그것으로 다 끝난 것인가?
 


그 병자가 이제부터 할 일은,
보속을 하면서 구원의 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몸이 건강해진 것으로 그치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가 얻은 용서와 치유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됩니다.
또 사람들이 놀라서 하느님을 찬양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도 역시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됩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대림2주에..

어제에 이어 길에 대한 표상들이 계속 이어집니다. 귀향길에 대하여 언급하는 이사야서 35장은 특수한 본문이지요. 위치상으로는 이사야서 제1부에 속해 있지만 유배 중에 작성된 이사야서 제2부와 많은 공통점을 보이기에, 이사야서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연결하려고 끼워 넣은 부분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광야의 길은 하느님께서 유배 중인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어 고국으로 인도하시는 길을 뜻하는데, 그 길에서 이집트 탈출 때의 기적, 곧 황량한 사막에 꽃이 피고, 거칠고 메마른 광야에서 물이 터져 나오는 기적이 다시 일어날 것이기에, 이스라엘은 환호하며 시온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광야의 이 길은 주님의 오심을 다시 준비하는 우리 마음의 길과 중첩되는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부류의 사람은 그 길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주님의 오심은 은총이고 선물이지만, 어떤 이들은 그 선물을 받아들이고 어떤 이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중풍 병자와 그를 데려온 이들은 주님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심을 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아직도 정리해야 할 많은 골짜기와 산과 언덕이 남아 있어, 주님께서 오실 길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사막에 꽃을 피우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아니지요! 주님께서 단단하고 완고한 우리 마음에 은총의 비를 내려 주시어 당신에 대한 믿음을 길러 주시고, 당신의 오심을 타당하게 준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겸허하게 청하면서 주님 안에서 노력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대림 2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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