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간 목요일>(2015. 12. 10. 목)(마태 11,11-15)
<나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너의 구원자이다.> 이사 41,13-20
13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14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
15 보라, 내가 너를 날카로운 타작기로, 날이 많은 새 타작기로 만들리니, 너는 산들을 타작하여 잘게 바수고, 언덕들을 지푸라기처럼 만들리라. 16 네가 그것들을 까부르면 바람이 쓸어 가고, 폭풍이 그것들을 흩날려 버리리라. 그러나 너는 주님 안에서 기뻐 뛰놀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안에서 자랑스러워하리라.
17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물을 찾지만, 물이 없어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탄다. 나 주님이 그들에게 응답하고, 나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리라. 18 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
19 나는 광야에 향백나무와 아카시아, 도금양나무와 소나무를 갖다 놓고, 사막에 방백나무와 사철가막살나무와 젓나무를 함께 심으리라. 20 이는 주님께서 그것을 손수 이루시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그것을 창조하셨음을, 모든 이가 보아 알고 살펴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이사41,13-20)
"보라, 내가 너를 날카로운 타작기로, 날이 많은 새 타작기로 만들리니, 너는 산들을 타작하여 잘게 바수고, 언덕들은 지푸라기처럼 만들리라." (15)
이사야서 41장 15절과 16절에서 주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을 주님의 타작기로 삼으시고 영광을 누리도록 하실 것이라고 약속한다. 농사가 끝난 이후에 최종적으로 이루어지는 타작은 심판의 양상을 나타내는 예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고대 근동에는 두 가지 타작 방식이 있었다. 하나는 소가 돌리는 육중한 맷돌을 이용해 타작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끝이 날카로운 타작기계를 손에 쥐고 타작 마당에서 도리깨질을 하면서 타작하는 방식이다. 본문은 후자의 방식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하느님께서 이방 땅에 있는 이스라엘을 자기 손에 들린 타작기로 삼는다는 것은 이방 사람들을 파괴한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이방 사람들이 그들을 통해 알곡과 쭉정이로 갈리게 될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해 내는 심판의 기준이 될 것을 암시한다.
본문은 종말론적 상황과 관련하여 장차 영적 이스라엘로 세워질 교회와 그 성도들이 만왕의 왕, 만민의 주님으로 영광 중에 재림하실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며, 이 세상을 심판할 것을 나타내는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마태19,28).
한편 앞선 이사야서 14장 14절 상반절에서 이스라엘은 '벌레', 즉 지렁이처럼 사람이 밟고 지나가면 터져서 죽는 초라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묘사되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날카로운 타작기','날이 많은 새 타작기'로 묘사한다. 이것은 너무나도 급작스런 변화, 너무나도 상이한 대상을 묘사한 것이 아닐수 없다. 이것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일으키는 분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주 하느님이시며, 그분이 이스라엘을 도우실 것임을 약속하셨기에 이는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신실하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그대로 시행된 지극히 당연한 일일뿐이다. 아울러 이러한 일로 이제 이스라엘이 회복될 시점이 가까웠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시고 보증하신 그 때가 가까워오고 있으며, 실제로 하느님께서 행하신다면, 사람의 시각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지라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는 산들을 타작하여 잘게 부수고, 언덕들은 지푸라기처럼 만들리라'
본문은 앞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이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처럼 된 결과, 이루어질 일을 나타낸 것이다. 그것은 과거 '벌레'같은 존재로서 이스라엘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산들과 언덕들은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이방인들, 이방 국가, 이방 권세자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권능으로 강해진 그들,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처럼 견고하게 된 그들은, 산같은 힘을 가진 압제자들을 부스러기나 겨와 같이 흩어버리고, 그 압제를 통해 해치고 말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여기서 먼저 제시된 '산들'에 해당하는 '하림'(harim)은 이스라엘을 적대하는 자들 가운데 큰 세력을 가진 존재를 의미한다.
이를 쳐서 부스러기로 만든다는 것은 영적으로 하느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불신자들 가운데서 산들처럼 스스로를 높이는 교만한 자들을 심판할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이어 제시되는 '언덕들'은 앞서 나온 '산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적대하는 불신자들을 지칭한다. 그들의 영향력이 미미하더라도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산들'과 대비되는 '언덕들'에 해당하는'우게바오트'(ugebaoth)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 언덕들은 '지푸라기'(겨)같이 될 것인데, 본문에서 '지푸라기'(겨)에 해당하는 '모츠'(mots)는 탈곡한 곡물 가운데서 알곡이 빠져 나와 버린 쭉정이, 껍질, 왕겨를 의미한다.
이러한 본문이 전달하는 표면적 의미는 이스라엘이 강성하여 주변 여러 나라들을 허무하고 무가치한 부스러기나 '지푸라기'(겨)처럼 만들어 버리며 짓밟을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이 그만큼 강하게 성장하고 영예로운 지파에 설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의 삶과 관련된 것으로 풀이된다.
세례자 요한이 그러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활동이 그러하였듯이 하느님 말씀을 증거하는 성도들은 높은 산을 낮추며, 거만한 자들을 하느님의 권세와 그 말씀 아래 굴복시키는 일을 행할 것이고, 하느님의 권능 앞에서 악인들과 불신앙적인 삶을 사는 교만한 자들이 얼마나 무력하고 초라한 삶을 살게 될 것인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마태 11,11-15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13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14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15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회개>송영진 모세 신부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3-15)."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라는 말씀은, "구약성경은 세례자 요한에 '이르기까지만' 예언하였다." 라는 말이고,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이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라는 말은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이라는 말씀은, 요한이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라는 말씀은, "요한은 구약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 즉 신약시대(메시아 시대)를 준비하는 예언자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도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구약성경 말라키서에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 3,23)." 라는 예언이 있습니다. 이 예언은 하느님의 심판이 있기 전에 엘리야 예언자가 먼저 와서 사람들을 회개시킨다는 뜻입니다.
엘리야 예언자의 말을 듣고 회개한다면 하느님의 심판 때에 살아남을 것이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파멸 당하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고 세례를 베푼 것은 엘리야 예언자가 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는 바로 그 일을 한 것입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고,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이미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세례자 요한의 활동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의 일'은 '메시아의 일'을 준비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세례자 요한이 죽은 다음에 태어난 사람들은 '요한의 일'과 상관이 없지 않은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교회를 보면, 세례자 요한은 여전히 중요한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고, 그의 탄생일은 중요한 대축일로 경축되고 있고, 그의 활동과 그가 한 말은 복음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도 그의 선포와 활동이 유효하고,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고 떠났지만, 그가 선포한 회개는 아직도 마무리되지 않았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은 떠났어도 그의 선포는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는 요한이 대신해 주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또 회개는 한 번 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계속해야 하는 일입니다. 언제까지? 심판을 받게 되는 그날까지.
그런데도 "나는 죄가 없기 때문에 회개할 필요가 없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영세를 받을 때 이미 회개했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몇 년 전에 벌써 회개했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자꾸만 회개하라고 말하면, 듣기 싫어하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바리사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바리사이들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말로 죄가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성모님 외에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죄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자기가 한 일이 죄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또는 죄가 있는데도 없는 척 하는 위선자들이거나...
영세를 받을 때 전에 지은 죄가 모두 씻어진다는 것이 교리입니다. 그러나 영세를 받은 뒤에 지은 죄는 어떻게 하나? 영세를 다시 받으면 되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고해성사를 세워 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이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7-8)."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말은 '위선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라는 말은,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이 진심으로 회개를 해서 세례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그저 심판 받는 것이 무서워서 왔음을 꾸짖는 말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라는 말은, 회개하는 척만 하지 말고 진심으로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회개는 형식이 아니라 '삶'입니다. 고해성사를 본다고 자동적으로 회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회개한 다음에 고해성사를 보아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서도 고해성사만 본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이사야 예언서 제2부(40―55장)에는 매우 아름답고 심오한 말씀들이 많이 소개되지만, 이 말씀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벌레 같고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은 아무 힘이 없는 미약한 존재입니다. 나라도 패망하여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신세이므로, 그저 밟혀 죽을 수도 있는 보잘것없고 미천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희망도 이미 다 잃어버리고 그저 주저앉아 있는 이들에게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그들을 돌보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이사야 예언서 신학의 핵심이요 요약입니다. 이사야는 주님을 만나 뵙고서는 “나는 이제 망했다.”(이사 6,5)라고 탄식할 정도로, 하느님께서는 위대하시고 초월적이시며 절대적이신 분이시기에, 벌레 같은 인간이 감히 다가갈 수도, 범접할 수도 없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너의 구원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구원자”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고엘’입니다. ‘고엘’은 빚 때문에 팔려 간 사람을 속전을 주고 되찾아 오고, 어쩔 수 없이 땅을 팔아야 할 처지가 되었을 때, 그 땅을 사 주는 가까운 친족, 곧 ‘구원자’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벌레 같은 야곱”과 친족 관계를 맺으시어, 그 야곱을 끝까지 돌보아야 할 책임을 당신 스스로 부과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벌레 같은 야곱”에게 매여 계십니다. 크신 하느님께서 작디작은 우리를 돌보십니다. 그분께서 오늘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