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간 토요일] 길잃은 양을 찾아서 (마태17,10-13)

이사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을 고발하며 심판을 선고하면서도,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바른길로 이끄시는 스승이시라고 선포한다. 이스라엘은 고난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그분의 제자가 되고, 그분의 인도에 따라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제1독서이사야 30,19-21.23-2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다니라고 명하신다. 제자들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는 이들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마태오 복음 9,35―10,1.5ㄱ.6-8).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집회48,1-4.9-11)
"그 무렵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48,1)
'엘리야'란 이름은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다'는 뜻이다. '불','횃불'의 표상은 여기서는 '사랑' '열정' 혹은 '심판'의 의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해석한다.
"엘리야는 그들에게 굶주림을 불러 들였고"(48,27)란 말씀은 48장 3절의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리고" 와 연결이 되어 있다. 가뭄 예언과 관련된 말씀 (1열왕17,1 ; 18,1-3 ; 참조18,45)이다.
하늘 문을 닫고 여는 하늘의 신, 풍요다산의 신인 바알을 숭배하던 아합왕과 이스라엘의 변절된 신앙에 대한 질타로 가뭄이 예언되고, 그 결과로 기근(굶주림)을 체험하는 것이다.
즉 가뭄을 통해 계시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진짜 하늘(햇빛과 비)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자신의 열정으로 그들의 수를 감소시켰다"(48,2ㄴ)는 것은 카르멜산의 대결에서 승리한 후 키손천에서 바알의 예언자 450명을 사로잡아 죽인 사건을 가리킨다(1열왕18,40).
48장 3절에 "세번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는 말씀이 나온다. 이것은 열왕기 하권 1장에 아하즈야왕이 자기 옥상 방의 격자 난간에서 떨어져 다친 후 하느님을 찾지 않고 사자들을 보내어 에크론의 신 바알 즈붑에게 가서 병의 회복에 관한 문의를 하라고 명령한 것에 대한 벌(심판)의 이야기이다.
두 차례나 엘리야가 예언한대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오십인 대장과 부하 쉰 명을 삼켜버린 사건을 말한다(2열왕1,10ㄷ.12ㄷ). 이 두 번과 450명 바알 예언자들과의 카르멜산 대결에서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 버린 사건을 말한다(1열왕18,38).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48,9)라는 말씀은 엘리야와 엘리야 영의 두 몫을 청하는 엘리사의 이별이야기에 나온다. 갑자기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 두 사람을 갈라 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에 실려 올라간 사건을 말한다(2열왕2,11).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48,10)
이 구절은 말라기 3장 1절과 23절에 있는대로, 죽지 않고 산 채로 불수레를 타고 승천한 예언자가 하느님이 세상을 심판하기 직전에 다시 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시키고 열두 부족을 재건할 거라는 말씀이다.
엘리야는 종말 심판자이신 하느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 메시아의 선구자(선주자)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세례자 요한에 이어 예수님이 활약하셨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요한 세례자(=엘리야)가 예수(=메시아)의 선구자(선주자)라는 입장을 취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말라3,1)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려치지 않으리라." (말라3,23-24)
대림 제2주간 토요일 과달루페의 동정 마리아 축일 복음 (마태17,10-13)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10~11)
마태오 복음 17장 10절에 기록된 제자들의 질문은 앞에 기록된 타볼산 현성용의 사건과 엘리야의 나타남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사실 엘리야가 메시야에 앞서 올 것이라는 사실은 말라키서 3장 1절과 3장 23~24절의 예언에 근거한 것인데, 당시 유대인들에게 메시야 출현의 결정적 증거로 여겨졌다.
따라서 타볼산에서의 예수님의 영광과 엘리야의 출현을 목격한 제자들에게 커다란 의문이 생겼던 것이다.
즉 말라키서에 의하면,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 예언자를 보낼 것이며,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는 회복의 사명을 할 것임을 말하고 있음에도(말라3,23~24) 불구하고, 제자들은 엘리야가 메시야 되시는 예수님 출현 이후에 타볼산에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엘리야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더욱 확고하게 예고되는 것도(루카9,31) 제자들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을 것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메시야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엘리야가 모든 것을 회복하리라고 기대하며, 정의와 참 예배의 회복이 이루어질 것을 굳게 믿었으므로(마르9,12), 그들은 이렇게 회복될 환경에서 메시야가 죽임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제자들은 엘리야가 온다는 예언을 옛날의 그 예언자 엘리야가 올 것이라는 사실로 착각하였다.
그러나 말라키서에서 지칭되는 엘리야는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루카1,17) 오는 사람, 즉 세례자 요한이었다.
한편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르코 복음사가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서로 묻는 사실을 기록하여(마르9,10) 제자들의 질문에는 메시야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분명히 결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11)
여기서 '모든 것'로 번역된 '판타'(panta; all things)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고, 죄 중에 살고 있던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죄를 지적함으로써(루카3,3~14) 사람들의 죄스런 속성의 회복을 시도했지만, 완전한 회복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 자신조차 헤로데 안티파스의 죄를 지적하다가 죽임을 당했고, 그리스도 역시 십자가의 수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이 이것을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모든 것'의 의미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온 세례자 요한으로 부터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선포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사탄이 왕노릇하는 지금까지의 세상의 모순된 모든 것들이 회복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여기서 '모든 것의 회복'은 세례자 요한이 완성한다고는 보기 힘들고, 다만 그의 등장으로부터 모든 것이 회복되는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의미를 강조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회개>송영진 모세 신부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마태 17,10-13)."
제자들은 높은
산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마태 17,1-9).
그래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게
되었지만,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는 율법학자들의 주장이 마음에 걸려서
그것을 예수님께 묻고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의 질문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엘리야가 벌써 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엘리야는
이미 왔고, 자기의 임무를 수행했지만,
사람들이 그를 죽였다. 이제 사람들은 메시아도 죽일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엘리야가 와서 모든 사람을 회개시킬 것이다." 라는 뜻인데,
이 말씀에 대해서,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를 회개시키지 못하고 살해당했으니
임무 수행을 제대로 못한 것이 아닌가? 예언이 틀린 것이 아닌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임무는 회개를
선포하는 것,
그리고 제대로 회개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까지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회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요한의
임무가 아니라,
사람들이 각자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요한의 회개 선포를 듣고 회개한 사람들이 많은데(마태
3,5-6),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헤로데는 회개하기는커녕 요한을 죽여버렸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헤로데에게 살해당한 일은 '요한의 임무 실패'가 아니라,
헤로데 쪽에서 스스로 구원받기를 거부한 일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회개 선포는, 그리고 사람들이 그의 선포대로 회개해야 하는 일은
아직도 진행 중인
일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구원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실패가 아닙니다.
사람들 쪽에서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셨다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12월 12일의 복음 말씀의 주제는 12월 10일의 복음 말씀의 주제와 같습니다.
12월 10일의 복음
말씀에도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마태 11,14)." 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게 됩니다.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말라키서에 예언되어
있는 '엘리야의 일'은
하느님의 심판 전에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파멸당하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말라 3,23-24).
따라서
세례자 요한의 일도 사람들을 심판에서 구하기 위한 일입니다.
(단순히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 자신도 직접
그것을 말했습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
3,10)."
이 말은, 심판이 임박했으니 빨리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소개하는 메시아의 모습은
구세주보다는 심판관 쪽에 더 가깝습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1-12)."
그러나 예수님은 심판관이
아니라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나중에 재림하실 때에는 심판관으로 오시겠지만...)
그러면 세례자 요한이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맞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나중에 예수님을 심판관으로만 만나게 될 것입니다.
(구원을 거부하는 것은 심판과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면서 심판을 말한 것은
심판관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기 전에 먼저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라는,
즉 심판을 받기 전에 예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라는 권고입니다.
종말과 심판이 언제
이루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세주로 믿고 있는 예수님이
언제 심판관으로 오실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구세주이시고 자비로우신 분이니까 냉정하게 심판하지는 않으시겠지."
라고 방심하면서 회개를 미루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자비를 바란다면, 지금 바로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 말에서 '죄인'은 회개를 미루거나 거부하는 죄인이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을 뜻하는 말입니다.
스스로 회개하지 않는 것은, 주시는 자비를 스스로 거부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