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4주간 수요일] 세례요한 탄생 (루카 1,57-66)

2015. 12. 22. 오후 6:3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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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4주간 수요일] 세례요한 탄생 (루카 1,57-66)


주님을 맞이하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구약 성경의 마지막 구절은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시리라고 예고하는데, 그는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으며, 사람들이 주님을 맞을 수 있게 준비시킬 것이다.(말라키 3,1-4.23-2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23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24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시편 25(24),4-5ㄱㄴ.8-9.10과 14(◎ 루카 21,28)
◎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 ◎
○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
○ 주님의 계약과 법규를 지키는 이들에게, 주님의 모든 길은 자애와 진실이라네.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와 사귀시고, 당신의 계약 그들에게 알려 주신다. ◎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전해 주는 부분에서 사람들은 그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음을 알아본다. 말라키서 마지막 부분의 예언이 장차 그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는 예언자로서 주님께서 오실 길을 준비할 것이다.(루카복음 1,57-66)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회개를 외치는 말라키 예언자>

대림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말라키 3,1-4.23-24)

이미 말라기 예언자와 시대 상황에 대해서는 다른 독서 말씀에서 언급했으므로 생략한다.  '말라기'(malaki)란 이름은 '나의 사자(使者)'라는 3,1에서 나왔다.

기원전 539년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이 하까이와 즈카르야의 독려에 힘입어 예루살렘 성전을 복구하고(BC520-515년), 성전 전례를 완전히 회복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특히 백성을 올바로 인도하고 가르쳐야 할 사제들이 스스로 제사와 전례 규정을 지키지 않았고, 백성들은 십일조 규정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서 이방 민족과 통혼하며,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자기 주체성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3,3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다.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은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오늘 독서의 말씀은 말라기의 네 번째 신탁(2,17-3,5)에 포함된다. 여기서 예언자는 주님의 공정 또는 정의(justitia)를 선포한다. 공정은 정의와 더불어 하느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에 속한다. 그분은 자애로우실 뿐만 아니라 공정하시므로, 이스라엘의 악을 적당히 보아 넘기지 않으신다. 

따라서 주님께서 악인들을 좋아하신다고 말하고, 주님께서 어디 계시냐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은 그분께 대한 모독이다. 

그분은 대장간의 불이 금과 은에서 쇠똥을 걸러 내듯, 빨래터의 잿물이 옷에서 더러운 때를 빨아내듯,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정화하실 것이다. 주님은 심판과 정화의 날에 앞서, 먼저 당신의 사자를 보내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준비시킬 것이다.(3,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그가 온다.  그는 제련사의 불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1-2참조) 

사자를 보내어 주님의 길을 미리 닦아 놓는다는 생각은 이사40,1-11과 맥을 같이 한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나의 백성을,  ~~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 ~~ " 

주님께서 성전에 나타나신다는 것은, 그곳이 주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장소이기 때문에 당연하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주님께서 심판하실 자들의 목록이 3,5에 열거된다. 주술사, 간음하는 자(배우자를 배신하는 것과 우상숭배 모두를 뜻함),

거짓 맹세 하는 자, 품팔이 꾼의 품삯을 떼어 먹는 자, 과부와 고아와 이방인을 억압하는 자,주님께 불경하는 자들이다. 

말라기의 마지막 세 절(3,22-24)은 신탁 여섯 개에 덧붙은 부록 같지만, 엘리야 예언자를 시켜 새 시대를 준비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주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호렙 산(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내린 율법과 계명을  되새기라고 당부하신다.(22)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불마차를 타고 승천했던 엘리야 예언자(2열왕2,11)를 보내시어, 이스라엘 공동체의 기초가 되는 가정을 화목하게 만드실 것이라는 말씀이 선포된다.(23-24)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24ㄱ) 

오늘 복음에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하느님은 은혜로우신 분'이라는 뜻)의 탄생 예고가 나온다. 구약의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을 예고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 성탄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이고, 회개를 통해 주님을 잘 맞이하라는 메세지를 주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에 대한 예언(누가복음 1:5-17)


<세례자 요한의 출생>  송영진 모세 신부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그와 함께 기뻐하였다(루카 1,57-58)."


이웃과 친척들이 아기 탄생을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당연한 일이지만, 세례자 요한의 탄생 경우에는 이웃과 친척들은 진짜로 기쁜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라는 말은, 이웃과 친척들이 아기 탄생을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셔서 아기를 낳게 해
주신 일"로만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아직 요한의 사명도,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자기들에게 큰 기쁨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기뻐하였다.' 라는 말은, 메시아 강생에 대한 기쁨은 없이, 아기를 낳지 못하던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은 것만 축하했다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의 축하와 기쁨 속에서 태어났지만, 예수님의 경우에는 이웃과 친척들의 축하는 없었던 것 같고, 그 대신에 동방 박사들의 경배와(마태 2,11) 목자들의 방문이 있었습니다(루카 2,16).
요한의 탄생은 그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는데(루카 1,65), 사실은 그 '지방에서만' 화제가 된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란' 일이었고(마태 2,3), 하늘에 나타난 그분의 별을 보고 동방 박사들이 찾아왔으니(마태 2,2) 온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표징이 나타난 일이었습니다.
요한의 경우에는 즈카르야의 예언이 있었는데(루카 1,64), 예수님의 경우에는 시메온과 한나의 예언(루카 2,25-38) 외에도 천사의 찬양이 있었습니다(루카 2,8-14)


이렇게 비교를 해 보면,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예수님의 탄생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똑같이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지만, 요한의 탄생은 다른 예언자들의 탄생과 별로 다르지 않은 일, 즉 인간 세상의 일이었고, 예수님의 탄생은 하늘과 온 세상을 움직인 일, 즉 전 우주적인 일이었습니다.
요한의 탄생은 '메시아의 선구자'의 탄생이었고, 예수님의 탄생은 '메시아'의 탄생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루카 1,68-79)'는 구원자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이기도 하고, 메시아께서 하실 일과 세례자 요한이 하게 될 일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76절과 77절만 요한이 하게 될 일을 말한 구절이고, 전체적으로는 메시아께서 하실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메시아께서 하실 일에 대한 예언이고 찬미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종합하면,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는 사실은 '메시아의 탄생' 이야기의 서론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의 탄생에 관한 소문을 들은 이들이 했다는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라는 말은, 사람들이 아기에 대해 큰 기대감을 가졌음을 나타내는데, 동시에 사람들의 눈에는 태어난 아기가 그냥 아기로만 보였다는 것도 나타냅니다.
'나중에'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게 만들더라도, 아기는 그냥 아기일 뿐입니다. 요한은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아기로 태어나서 나중에 예언자가 되고 메시아의 선구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범한 아기로 태어나서 나중에 메시아가 되신 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구원자로(그리스도로) 태어나신 분입니다. (성탄절은 '나중에' 구세주가 되실 분이 태어나신 날이 아니라, 구세주께서 태어나신 날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으로 오신 날입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루카 1,78)"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탄생과 요한의 탄생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입니다.


요한의 탄생 장면에서 가장 부각되고 있는 내용은 즈카르야가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믿지 못해서 말을 못하고 있었던 즈카르야는 "믿음이 없거나 부족해서 메시아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는(또는 말하지 않는) 사람들" 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말을 하게 된 즈카르야는 "메시아를 믿고, 그 믿음을 증언하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탄생은 그저 옛날의 신화나 전설로만 생각될 것이고, 성탄절의 여러 가지 장식물들과 행사들은 한 종교의 전통과 풍습과 문화로만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은, 메시아와 메시아의 구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또 그 구원을 받으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연말연시와 성탄절이 만들어내는 들뜬 분위기에 휩쓸려서 놀기만 합니다.


믿는 사람들까지 그런 식으로 성탄절을 지내면 안 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신 분이 왜 사람으로 오셔야만 했는지, 즈카르야가 말한 '속량'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탄절이 어떤 날인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온 삶으로' 증언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와 악과 죽음의 억압을 받고 있는 인간들을 해방시키려고 오셨음은 생각하지도 않고, 안 믿는 사람들처럼 죄와 악에 물들어 있는 어떤 세속적인 즐거움에만 휩쓸려서 들뜬 모습으로 성탄절을 지낸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대림 제4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1,57-66)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59~60)

'할례식에 갔다가'로 번역된 '페리테메인'(peritemein; to circumcise)의 원형 '페리템노'(peritemno)는 원래 '둘레를 자르다', '칼자국을 내다' 등의 뜻을 가진 단어로서 할례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가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자 성기의 포피를 잘라내는 할례식을 통해 그들이 이방인들과  구별된 백성임을 드러냈고(1사무17,26), 또한 하느님과의 계약의 표징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임을 인정받았다.(창세17,11)

그리고 이 할례는 출생 후 여드레째 되는 날에 시행했는데, 그 이유는 아이를 출산한 여자가 이레 동안 부정했듯이(레위12,2) 그 아이도 부정한 것으로 여겨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를 통해 이레 동안의 부정을 깨끗히 씻어 버리고, 하느님의 약속에 힘입어 새롭게 태어남을 상징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갔다가'로 번역된 '엘톤'(elthon; came)'오다'의 뜻을 가진 '에르코마이'  (erchomai)부정(不定) 과거 3인칭 복수형으로서 '그들이 왔다'는 뜻이다. 

여기서 '그들은' 루카 복음 1장 59절 후반절에서 아기의 이름까지 지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아 즈카르야의 가까운 친척들이거나 아웃들로 여겨진다.

원래 자녀의 할례는 가장(家長)에 의해 시행되는데, 친척들과 이웃들이 함께 참석하여 공개적인 의식으로 치러진다. 가까운 친척들과 이웃들은 아기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로 짓고자 한다. 

여기서 '부르려 하였다'로 번역된 '에칼룬'(ekaloun; they called; they were giong to name)'부르다', '이름하다' 등의 뜻을 가진 '칼레오'(kaleo)미완료 과거로서 이름을 짓고자 했던 자들의 강한 의지를 나타낸다.

즉 행동의 반복이나 계속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가 사용된 것은 그들이 그 아기의 이름을 '즈카르야'로 부르고자 계속 고집했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러한 고집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기의 이름을 짓던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 풍습과 이름을 중요시했던 유다인들의 사상적 배경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아기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친척들과 이웃의 주장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따를 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엘리사벳은 루카 복음 1장 13절'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천사의 예언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이름에 따라 자식의 이름을 짓는 사회적 통념에도 불구하고, 자신있게 아기의 이름을 '즈카르야'가 아닌 '요한'으로 주장할 수 있었다. 엘리사벳의 이러한 담대함은 하느님의 약속을 확신하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한편 '요한'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인의 이름으로는 흔한 것인데(1역대12,5.13), '주님의 은총', '주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뜻의 히브리어 '요하난'(yohanan)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따라서 '요한'이라는 이름은 늙어서 수태할 수 없었던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에게 부어주신 하느님의 은총과, 세례자 요한을 메시야의 길을 미리 예비하는 자로 세우셔서 사람들을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하느님 은총의 통로가 되었기에, '요한'이라는 이름은 너무나 큰 은총이 잘 표현되고 있는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루카 1,64)

여러분은 말주변도 없고
하느님을 마음껏 찬미하고 싶지만 잘 안될 때가 많지요?

어떨 때는

내가 생각지도 않은 지혜로운 말이 술술 나와 나도 놀랄 때도 있고

입만 열면 하느님 찬미하는 노래가 흥얼흥얼 흘러 나오는 그런 날도 가끔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즈가르야 사건을 적용시켜 보면
우리가 하느님의 계획을 그냥 웃어 넘기며 대수롭지 않게 여길 때
우리의 말문은 막히게 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소리는 나올 수가 없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중요한 것으로 확신하게 되면
우리 입이 열려 비로소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성탄을 코밑에 두고있는 오늘
나와는 다른 하느님의 계획을 진지하게 여기고 그 뜻이 무엇일까 생각해 봅시다.
진정 성탄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난하게 오셔야만 하는 하느님의 역설적인 계획에
진지한 '예'를 해야만 우리 입이 성탄의 기쁨을 참으로 노래할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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