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후 월요일] 공생활 시작 (마태 4,12-17.23-25)

2016. 1. 3. 오후 6: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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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후 월요일] 공생활 시작 (마태 4,12-17.23-25)


그리스도의 적’이 나타났음을 경고하는 요한 1서는, 신자들에게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라고 권고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음을 고백하는 영은 하느님께 속한다.(1요한 3,22―4,6)
사랑하는 여러분, 22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23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24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알고 있습니다.
4,1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갔기 때문입니다. 2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을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 3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영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적’의 영입니다. 그 영이 오리라고 여러분이 전에 들었는데, 이제 이미 세상에 와 있습니다.
4 자녀 여러분, 여러분은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거짓 예언자들을 이미 이겼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그분께서 세상에 있는 그자보다 더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5 그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세상에 속한 것을 말하고 세상은 그들의 말을 듣습니다.
6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고,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진리의 영을 알고 또 사람을 속이는 영을 압니다.


시편 2,7-8.10-11(◎ 8ㄴ)
◎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주리라.
○ 주님의 결정을 나는 선포하리라.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 ◎
○ 임금들아, 이제는 깨달아라. 세상 통치자들아, 경고를 받아들여라. 경외하며 주님을 섬기고, 떨며 그분 발에 입 맞추어라. ◎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다음, 갈릴래아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신다. 이로써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 이루어진다. 갈릴래아는 본디 이민족들의 땅으로 여겨졌는데, 그 어두운 땅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오른다.(마태 4,12-17.23-25)
그때에 12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13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14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1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17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23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24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25 그러자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오늘의 묵상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군중이” 이방인의 땅인 갈릴래아에 계신 분을 찾아온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요즘도 여러 지방 사람들이 모이려면, 어디서나 교통이 잘 연결되어 있는 대도시에서 모이는 것이 보통이지요. 시골 작은 동네에서 모임을 가지려면 기차역도 없고 고속버스도 없습니다. 그런데 온 사방에서 사람들이 갈릴래아로 모여듭니다.
나자렛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두고 나타나엘이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하고 묻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나타나엘도 갈릴래아 출신으로 보이지만, 나자렛에 대한 그의 인상은 갈릴래아를 대하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태도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이민족의 갈릴래아”라는 표현이 말해 주듯,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침략했을 때에 이민족에게 점령당하여 갈릴래아는 이미 천대받던 땅이 되었고(이사 8,23 참조), 더욱이 예루살렘 이외의 지역에서 메시아가 나타난다는 것은 일반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전혀 뜻밖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도 유다인의 임금으로 나신 분을 찾아 다른 곳이 아닌 헤로데의 왕궁으로 갔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 호수 북쪽 카파르나움을 복음 선포의 중심지로 삼으십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아시리아 임금 티글랏필에세르의 제국주의 식민 정책에 따라 이곳을 포함한 이스라엘 북쪽 지방은 다른 민족들이 이주하여 살게 되어 이방인들의 땅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천시하던 땅, 어둠과 죽음이 머무르던 곳, 이곳이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고 사시는 곳이었으며 복음을 전하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곳이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그곳으로, 갈릴래아로 가야 합니다. 엉뚱한 곳에서 예수님을 찾아 헤매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희망이신 예수님>  송영진 모세 신부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마태 4,23-24ㄱ)."


'어둠'과 '죽음의 그림자'는 '절망'을 나타냅니다. '빛'은 '희망'으로 해석됩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은 '희망이신 분'입니다.


여기서 '희망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온 인류를 가리킵니다. 당시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살고 있었습니다(마태 9,36). 목자이신 주 하느님을 믿고 있었던 유대인들 경우,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살게 된 것은 그들 자신들 탓일 수도 있고, 지도자들 탓일 수도 있는데, 어떻든 그들은 절망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기득권층 사람들은 세속적인 권력과 재산만 추구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 역시도 참된 희망 없이 살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안 믿고 있었던 이방인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희망이라는 것은 항상 현세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희망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도 희망 없이 살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루카복음에 나오는 시메온과 한나는 메시아를 만나게 되기를 희망하면서 살던 사람들인데(루카 2,25-38), 그들의 경우는 예외적인 것이었고, 그런 사람의 수는 극히 적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신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헛소문이라고 비웃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희망은 항상 믿음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다면 희망도 없고, 희망이 없다면 믿음도 없습니다.)
그랬다가 실제로 예수님 덕분에 병을 고친 사람이 와서 자기가 정말로 병에 걸렸었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그 병을 고쳐 주셨다는 것을 증언한다면, 그 소문이 헛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자기도 예수님을 만나봐야겠다고 희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그런 증언을 들어도 믿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희망'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있는 희망입니다.


(살아 있는 희망이라는 점에서, 복음서에 '소문'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들 가운데에는 '소문'이 아니라 '소식'이라고 번역해야 할 말들이 많습니다.
1월 4일의 복음 말씀에 나오는 '소문'이라는 말도 실제로는 '소식'에 더 가까운 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기쁜 소문'이라고 풀이하지 않고 '기쁜 소식'이라고 풀이하는 것은 복음의 내용들이 '확실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라는 말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이라는 말은, 그 당시의 인류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오늘날의 인류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지금의 세상 모습을 보면, 예수님께서 처음 복음을 선포하실 때보다 어둠이 더 짙은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쟁, 테러, 독재, 세속주의, 물질주의, 향락주의... 기타 등등. 그리고 질병, 자연 재해, 재난 등도 여전히 인류를 괴롭히고 있고.


'빛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고, 이천 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 수도 엄청나게 증가되었지만)그때보다 세상이 더 밝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이 세상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을 괴롭히는 온갖 종류의 절망을 모두 다 극복하기에는 아직도 인간들의 힘이 너무나도 미약하다는 말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려면 아직도 먼 길을 가야 한다는 말에도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세상이 어둠 속에 있는 것은 예수님 탓이 아닙니다. 제대로 응답하지 않는 인간들 탓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희망을 따라가지 않고, 자기들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일에만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이기심과 욕심을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해서 '희망'을 말해야 합니다. 죽음과 같은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더 '희망'을 말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예수님께서 주신 희망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고 보증되어 있는 희망이기 때문에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절망은 구원받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희망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서는 희망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길을 찾고,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얻고, 예수님 뒤를 능동적으로 따라가야만 희망이 현실이 됩니다.
따라서 바오로 사도가 말한 '인내'는 소극적으로 참기만 하는 일이 아니라, 희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희망이신 분입니다. 그 희망은 절대로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주님 공현 후 월요일 복음 (마태 4,12-17.23-2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15~16) 

마태오 복음 4장 15절의 '즈불룬 땅'에 해당하는 '게 자불론'(ge Zaboulin; land of Zebulun)갈릴래아 호수 남서쪽의 지역으로서 즈불룬 지파가 거주하던 땅이며, '납탈리 땅'해당하는 '게 네프탈림'(ge Nephthalim; land of Naphtalim)은 갈릴래아 호수 북서쪽의 지역으로서 납탈리 지파가 거주하던 땅이다. 

그리고 '바다로 가는 길''즈불룬과 납탈리 지역에서 해변으로 펼쳐진 곳'이거나 '갈릴래아 해변'을 뜻하며, '요르단 건너편'은 갈릴래아 해안 동쪽 지역을 말한다.

또한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팔레스티나 가운데서도 이방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모든 지역들은 당시 정치, 경제, 사회, 종교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서, 한마디로 전통적으로 유대 사람들에게 소외되고 배척되었던 갈릴래아 주변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마태오 복음 4장 16절의 '어둠'으로 번역된 '스코테이'(skotei; darkness)의 원형 '스코토스'(skotos)'어두움','흑암'으로도 번역되는데, 신적(神的)인 것에 관계된 인간의 의무에 관한 무지, 그리고 거기에 따라오는 불신앙과 불경건, 부도덕, 비참한 결과 등의 의미를 갖는다.

또한 '앉아있는'으로번역된 '호 카테메노스'(ho kathemenos; living; which sat)에서 '카테메노스'(kathemenos)'앉다'는 뜻의 동사 '카테마이'(kathemai)현재분사형으로서, 현재 계속적으로 그런 상태에 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율법도 모르고, 불신앙과 불경건으로 하느님의 생명에서 떠나 계속적으로 비참한 운명에 처해 살고 있는 갈릴래아 지역의 주민의 영적 상태를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백성들만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니지만, 당시 그 지역은 보다 짙은 영적 어두움으로 덮여 있던 곳이기에, 주로 이곳에서 활동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큰 빛'으로 번역된 '포스~메가'(phos~mega; great light)에는  관사가 붙어 있지 않아 어떤 한정된 구체적인 빛을 의미하지 않고, 진리로서 온 세상을 비추는 메시야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마태오 복음 4장 16절(ㄴ)의 '고장'으로 번역된 '코라'(chora; the land; the reign)'땅','지역' 또는 '지방'을 의미하는 명사이다. 그러니까 본문은 '고장과 그림자가 모두 죽음에 속해 있다'는 뜻이다.

'고장'에 해당하는 '코라'(chora)'그림자'에 해당하는 '스키아'(skia; shadow)가  등위 접속사 '카이'(kai; and)로 연결되어 있고, 이 명사구 뒤에 '죽음'을 의미하는 명사 '타나토스'(thanatos; death)의 소유격 '타나투'(thanatou)가 나오기 때문이다. 

한글 새 성경은 칠십인역(LXX)을 참고한 것 같은데, 이것은 '죽음의 그늘로 뒤덮여 있는 땅'이라는 의미로서, 앞의 '어둠 속에'라는 표현과 좋은 대구를 이룬다.

본문도 역시 하느님의 율법과 은혜도 모르며, 오직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심판만이 있는 죽음의 땅인 갈릴래아 지역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마지막으로 '빛이 떠올랐다'로 번역된 '아네테일렌'(aneteilen; has dawned; is sprung up)의 원형 '아나텔로'(anatello)는 해나 별 따위가 '떠오르다','일어나다'는 뜻의 동사이다.

여기서는 부정 과거 능동형으로 쓰여서 갈릴래아 지역에 찬란한 빛으로 오신 메시야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지역 위에 떠올라 그들에게 구원과 생명의 빛을 비추었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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