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후 수요일]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 (마르 6,45-52)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전한 다음, 요한 1서는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 머무르신다.(요한 1서. 4,11-18)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17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시편 72(71),1-2.10-11.12-13(◎ 11 참조)
◎ 주님, 세상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경배하리이다.
○ 하느님, 당신의 공정을 임금에게, 당신의 정의를 임금의 아들에게 베푸소서. 그가 당신 백성을 정의로,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
○ 타르시스와 섬나라 임금들이 예물을 가져오고, 세바와 스바의 임금들이 조공을 바치게 하소서. 모든 임금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모든 민족들이 그를 섬기게 하소서. ◎
○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약한 이,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았을 때 제자들이 탄 배는 맞바람을 만나 어려움을 겪는다.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어 그들에게 가시며, 용기를 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마음이 완고해진 제자들은 놀라 넋을 잃을 뿐이다. (마르코 6,45-52)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45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46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47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48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4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50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51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52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주님 공현 후 수요일 제1독서 (1요한4,11-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좇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8)
여기서 '두려움'으로 번역된 '포보스'(phobos)는 심판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뜻한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예수님의 큰 기적과 기적적인 일앞에 사람들이 보인
두려움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었다(마르4,1; 루카2,9; 요한7,13).
또한 가까운 미래에 닥칠 고난과 환난으로 인한 두려움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묵시18,10).
요한 1서 4장 18절은 후자의 의미로서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진
두려움을 나타낸다.
성령의 내주하심과 하느님의 임재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을 가진 자는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
이 영적 담대함을 가진 자는 심판 때 죄인들이 갖게 되는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된다.
사도 요한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는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쫓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완전한'으로 번역된 '텔레이아'(telleia)의 원형 '텔레이오스'
(telleios)는 '온전한','성숙한'이라는 뜻이다(1코린14,20; 콜로4,12; 야고3,2).
사도 요한은 이 단어를 통해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인 사랑안에서
성도들이 목표로 삼고 이루어야 할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완전한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삶속에 실현하는 사랑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랑은 최후의 심판 자리에서의 두려움조차 쫓아낸다.
한편 '쫓아냅니다'로 번역된 '엑소 발레이'(ekso ballei)는
'밖으로 내던지다'라는 뜻이다.
먼저 '내어'로 번역된 '엑소'(ekso)는 장소적 이동을 뜻하는 전치사로
'안에서 밖으로'라는 뜻이며, '좇아'로 번역된 '발레이'(ballei)의
원형 '발로'(ballo)는 '던지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엑소 발레이'는 내부에 있는 어떤 것들을 밖으로 던져
이동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의 완전한 사랑이 그 사람 내부에 있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자신의 생각과 마음 밖으로 던져 제거한다는 뜻이다.
참된 사랑안에 머무는 자에게는 궁극적인 두려움이 없고,
오히려 그는 그것을 담대하게 극복할 수 있다.
이처럼 사랑과 두려움은 서로 공존할 수 없다.
사랑이 지배하는 자에게 두려움은 설 자리가 없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두려움은 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로 번역할 수 있다.
즉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형벌이 따르게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가지는
그분께 대한 합당한 존경의 감정이지만,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심판을 두려워하는 죄인들이 갖는 감정으로서
그곳에서는 반드시 합당한 형벌이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이 형벌을
인식함으로 인하여 더욱 더 두려워지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이
형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벌'로 번역된 '콜라신'(kollasin)의 원형 '콜라시스'(kollasis)는
신약에서 본절과 마태오 복음 25장 46절에 단 2회 사용되었다.
마태오는 이 단어를 최후의 심판의 날, 죄인들이 받게 될
영원한 벌을 가리킬 때 사용했다.
여기서도 '콜라신'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죄인들에게 내려질 영원한 지옥벌을 뜻한다.
한편 본절에서 사랑과 두려움을 대조하며 공존할 수 없는 관계로
묘사하면서 사도 요한은 하느님께 대한 비정상적인 두려움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있어서 큰 장애물임을 시사하고 있다.
<주님이신 예수님> 송영진 모세 신부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마르 6,48-51)."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목격했다는 제자들의 증언은, 예수님께서 자연도 지배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직접 보았다는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마태 28,18), 제자들은 바로 그 권한을 직접
목격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증언은 "예수님은 참으로 주님이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의 주인이신 분'이라는
뜻이지만, 하느님(예수님)은 사람에 대해서만 주님이신 분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만물에 대해서도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여기서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라는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것은,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에 오르시기 위해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호수를 건너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것.)
또
물 위를 걷는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나를 믿으면 너희도 나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다." 라고 가르치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로
가시려고 했는데, 아마도 타고 가실 배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물 위를 걸어가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신
것은, 맞바람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는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한마디
말씀만으로도 바람과 파도를 고요하게 만드실 수 있는 분이니까(마르 4,39) 제자들 쪽으로 가시지 않더라도 뭍에서
"고요해져라!" 라고 명령하셨어도 될 텐데, 왜 그렇게 그들에게 가셨을까?
'맞바람'을
제자들이(교회가) 겪는 박해와 고난의 상징으로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신 것은 그들과 함께 계시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몸으로' 함께 계시지 않더라도 언제나 항상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쪽에서는
아직은 그런 믿음이 없거나 부족했던 때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 그들에게 가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라는 믿음.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라는 말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입니다. 도와주시려고 가셨으면서도, 왜 지나가려고 하셨을까? 이 말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같은 당신의 권능과 권한을 드러내셨다."로 해석됩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지나가다.' 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모세 앞을 지나가며 선포하셨다(탈출 34,6)."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1열왕 19,11)"
제자들이 물 위를 걸어서
다가오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생각하고, 겁에 질리고, 비명을 지르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초자연적인 일, 또는 이해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일을 보고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그들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그들의 믿음이 아직 부족해서 유령 같은 것을 두려워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라는
말씀은 병자를 고쳐 주실 때 자주 사용하신 말씀인데(마태 9,2), 여기서는 맞바람과 파도와 두려움 때문에 지쳐 있고 기가 꺾여 있는
제자들에게 힘을 주기 위한 말씀입니다.
"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실 때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라고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여기서는 "나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다."로 해석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날 때 사용되는 표현과 같습니다(루카 1,13). 여기서 이 말씀은, "나를 두려워하지 마라."입니다. ("나는 너희의 주님이고 스승이니 나를 두려워하지 마라.") 맞바람과 파도를(박해와 고난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항상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두려움 때문에 하느님께 복종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이신 분께 순종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서 복종하는 것과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신앙생활은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사랑하니까 하는
생활입니다.
믿음은 사랑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 없는 믿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멎었다고 되어 있는데, 저절로 멎은 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바람을 고요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제자들 쪽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만으로도 맞바람 같은 것은 금방 잊어버릴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함께 계시는 것만으로도' 라는 말을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기만 해도', 또는 '함께 계신다는 믿음만 있어도'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온 세상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
주님 공현 후 수요일 복음 (마르6,45-52)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51)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태오 복음 11장 28~31절에 나오는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오시는 분이 예수님임을 확인하고, 자신도 예수님의 허락을 받아
물 위를 걸었지만, 바람을 보는 순간 두려움으로 결국 물에 빠진 사건을 생략하고,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배에 오르시자 풍랑이 그친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이 기사만을 묘사하더라도, 제자들의 불신앙과
예수님의 하느님 아들로서의 신적인 능력을 부각시키는 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르시니'에 해당하는 '아네베'(anebe; he climbed into; he went up)와
'멎었다'에 해당하는 '에코파센'(ekopasen; ceased; died down) 두 개의
부정 과거 동사가 접속사 '카이'(kai; and)에 의해 연결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두 개의 동사를 연결하고 있는 접속사 '카이'(kai)는 여기서 거의
동시적인 사건을 가리키는 용법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마자 곧바로 바람이 멎게 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님의 하느님 아드님 되심과 초자연적인 능력이 잘 드러나는 실례로서,
당신이 자연을 초월하며 주관하는 '자연의 주'이기도 하시다는 것을 계시한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여기서 '놀라'에 해당하는 '엑시스탄토'(eksistanto; they were completely
amazed)의 기본형 '엑시스테미'(eksistemi)는 '~밖으로'라는 뜻의 전치사
'에크'(ek)와 '두다'는 뜻의 동사 '히스테미'(histemi)가 결합된 형태로서
그 어원적 의미는 '어떤 물건을 밖에 두다'이다.
이 동사가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정신을 잃다'는 의미가 되며, 성경에서는
'정신이 나가다','미치다'(2코린5,13), '놀라다'(사도8,13) 등으로 번역된다.
여기서도 이 동사는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로 크게 놀랐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이 동사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 사용되어, 정신이 나가 어안이 벙벙해하는
제자들의 상태가 어느 정도 계속 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르코 복음 6장 50절의 '겁에 질렸던 것이다'는 표현과
6장 52절의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신 사건을 믿음과 신뢰의 차원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두려움과 공포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제자들의 성숙하지 못한
신앙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