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후 목요일]해방자 예수 (루카 4,14-22ㄱ)

2016. 1. 7. 오전 4: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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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후 목요일]해방자 예수  (루카 4,14-22ㄱ)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도 사랑해야 하는데,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에게, 사랑의 계명은 힘겨운 짐이 아니다.(1요한 4,19―5,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을 19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20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21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1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2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3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4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시편 72(71),1-2.14와 15ㄷㄹ.17(◎ 11 참조)
◎ 주님, 세상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경배하리이다.
○ 하느님, 당신의 공정을 임금에게, 당신의 정의를 임금의 아들에게 베푸소서. 그가 당신 백성을 정의로,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
○ 그의 눈에는 그들의 피가 소중하기에, 그는 억압과 폭행에서 그들의 목숨을 구하리이다.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늘 기도하며, 날마다 축복하게 하소서.
○ 그의 이름 영원히 이어지며, 그의 이름 해처럼 솟아오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해 복을 받고, 그를 칭송하게 하소서. ◎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가시어 나자렛 회당에서 첫 설교를 하신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파견되신 예수님께서는,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때가 되었음을 선포하신다. 예언서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된다.(루카 4,14-22ㄱ)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15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주님 공현 후 목요일 제1독서 (1요한4,19-5,4)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4,20)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는 사실과 또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 가운데서 본문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사랑한다' 번역된 '아가포'(agapo)하느님 대전에 올려드리는 신앙 고백적인 어투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인정을 받기 위해서 뱉어진 말이다. 그리고 '거짓말쟁이'로 번역된 '프슈스테스'(pseustes)하느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자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는 당연히 형제를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미워하면'으로 번역된 '미세'(mise)의 원형 '미세오'(miseo)강한 의지로 어떤 대상을 싫어하고 증오하는 의미 있지만(히브1,9) 보다 덜 사랑하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로마9,13).

본절인 요한1서 4장 20절에서 사용된 '미세'(mise)는 이웃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감정을 다 포함하는 내용이다. 특히 여기서 이 단어가정법 현재 능동태 사용되어 형제에 대한 지속적으로 이러한 부정적 감정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한1서 4장 20절 후반부에서는 눈에 보이는 형제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대조되고 있다. '눈에 보이는'으로 번역된 '헤오라켄'(heoraken; he has seen)원형 '호라오'(horao)눈으로 보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이다.

하느님께 대해서는 이 동사와 더불어 부정어 '우크'(uk)함께 쓰여 하느님은 인간의 눈으로 절대로 볼 수 없는 분이심이 잘 드러나고 있다.

순수한 영적 존재이신 하느님께서는 그 어느 누구도 볼 수 없다. 인간의 눈으로 영적인 존재를 인식할 수 없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혹 보는 일이 있더라도 부정(不淨)한 인간으로 절대 거룩하신 하느님을 보는 것은 죽음을 가져온다(탈출33,20).

한편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인데, 이렇게 보다 쉬운 형제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사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검증이 잘 되지 않는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형제에 대한 사랑은 쉽게 검증된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의 여부는 형제 사랑의 여부로 확인할 수 밖에 없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자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지적을 사도 요한은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당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떠들어대는 이단들의 거짓말들을 매우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묵상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계명은 사랑의 계명입니다. 여러분도 정말 힘겹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매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매 주일 성경 말씀과 주례 사제의 강론을 통하여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있습니다만, 복음이 우리에게 적지 않은 요구를 한다는 점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객이 전도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사랑해야 한다고 날이면 날마다 듣다 보면, 바로 그 계명이 정말로 힘겨워질 수도 있고, ‘저 강론은 수백 가지 규율을 지킬 것을 촉구하는 바리사이들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구나. 율법에서 요구하는 내용이 형태만 바뀌었을 뿐, 결국 또 하나의 율법을 내세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점입니다. 당연히 강론도, 성경 해석도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성경은 윤리 교과서가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자기 피붙이를 사랑하고 돌보아야 한다고 매일 가르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아 본 자녀들은,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을 자기 자녀들에게 베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하셨는가를 자세히 살펴보는 데에서 출발하고, 또 거기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십시오. 사랑의 계명이 과연 힘겹고 벅찰까요? 하느님의 계명이 힘겹지 않은 이유도 오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주님 공현 후 목요일 복음 (루까4,14-22ㄱ)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0~21)

'시중드는 이'에 해당하는 '휘페레테'(hyperete; the attendant; the minister)기본형 '휘페레테스'(hyperetes)는 원래 '하급 노잡이'(subordinate rower)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는 대다수 자신의 손으로 윗사람을 섬기는 자라는 뜻으로 쓰였다(마태5,25; 마르14,54; 루카1,2; 요한7,32). 여기서는 회당에서 성경 두루마리를 관리하고, 회당을 청소하는 봉사 직책을 담당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내려오는 전통적 순서를 따라 그 사람에게 성경 두루마리를 건네주신다.

일반적으로 회당에 초청된 랍비들은 일어서서 성경을 봉독한 후에 그것을 회당지기, 즉 '핫잔'(hazzan)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에게 주고 마련된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읽은 성경에 대한 가르침을 베푼다. 이때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는 것은 당시의 회당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대목인데, 당시 예수님의 활동에 대한 소문이 퍼져 있었던 것을(루카4,14) 감안한다면, 다른 어떤 랍비들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성경 봉독 후 예수님께서 하신 교훈이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길었고, 내용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루카 복음사가4장 21절과 4장 18절,19절의 내용만으로도 예수님께서 베푸신 교훈의 요지를 전달하기에 부족함이 없기에, 이렇게 압축 요약해서 전달하였다.

여기서 '이루어졌다'로 번역된 '페프레로타이'(peplerotai; is fulfilled)구약 예언의 완성과 성취를 묘사하는 전문 용어 '플레로오'(pleroo)의 완료 수동태로서 이사야서 61장 1절과 2절의 예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회당의 청중들에게 이미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사야서 61장 1절과 2절에 나오는 '주님의 영을 받은 의로운 종'예수 그리스도 당신 자신을 가리키며, 당신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생활을 시작하는 시점에 이미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증명하는 중요한 예언으로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앞으로 계속 성취될 예언이기도 한 것이다.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고, 죄와 죽음의 포로되었던 이들이 자유롭게 되며, 영적으로 눈먼 이들이 진리를 보게 되고, 좌절과 절망에 빠진 이들이 희망 가운데 기쁨을 회복하며, 주님께서 베푸실 구원의 은혜의 해(레위25,8~55참조)도래하는 일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었고, 또한 성취되어 가는 것이다.


 

<해방자이신 예수님>송영진 모세 신부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복음을 선포하실 때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당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선포하셨습니다.
이 선포의 핵심은 '해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해방 선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온갖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해방'은 잃은 자유를 되찾는 일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인간들은 자유를 잃은 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로마 7,21-25)."


인간들은 아담과 하와 때부터 죄의 법에 사로잡혀서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었고,죽음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인간들을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여기서 '구해 주다.' 라는 말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이 말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힘으로는 스스로 그 상태에서 빠져 나올 수 없음을 뜻하고, 누군가가 도와주어야만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 없이는 참된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4-36)."


예수님의 말씀에서 옛날의 노예제도가 연상되는데, 예수님께서 주신 해방과 자유는 노예들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다른 사람들을 노예로 삼고 억압하는 주인들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사실은 그 주인들에게 더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서 억압하는 그 주인들이야말로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국민을 억압하는 독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재자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유 없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 자신은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입니다.그는 세상에서 가장 심하게 죄에 사로잡혀 있는 '죄의 노예'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죄의 노예' 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복음 선포(해방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유와 해방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한 가지 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자유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감옥 문을 열어 주시고 앞장서서 가시는 일입니다.
감옥 밖으로 나가는 일과 예수님을 따라가는 일은 우리 쪽에서 능동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감옥에서 나가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억지로 끌고 가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요한 10,3-4)."
이 말씀에서 "밖으로 이끌어 내다." 라는 말은 "강제로 끌어내다."가 아니라, "밖으로 나오라고 부르면서 인도하다."입니다.


참된 자유와 해방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삶으로' 그 믿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자유와 해방이 완성될 때까지, 즉 하느님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 자유와 해방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자유와 해방을 바로 잃게 될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는 스스로 죄의 노예 상태로 되돌아간 사람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일은 박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흔들려서 잠깐 동안 자유를 잃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회개함으로써 잃은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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