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후 금요일] 나병환자치유 (루카 5,12-16)

요한 사도는 그릇된 가르침으로 신자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이들을 경계하라고 권고하면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말씀으로 우리의 신앙을 요약한다. 이를 증언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며, 이 믿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1요한 5,5-13)
사랑하는 여러분, 5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6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7 그래서 증언하는 것이 셋입니다. 8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9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증언은 더욱 중대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느님의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 관하여 친히 증언해 주셨습니다. 10 하느님의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이 증언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에 관하여 하신 증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1 그 증언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12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13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시편 147(146-147),12-13.14-15.19-20ㄱㄴ(◎ 12ㄱ)
◎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시온아, 네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은 네 성문의 빗장을 튼튼하게 하시고, 네 안에 사는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신다. ◎
○ 주님은 네 강토에 평화를 주시고, 기름진 밀로 너를 배불리신다. 당신 말씀 세상에 보내시니, 그 말씀 빠르게도 달려가네. ◎
○ 주님은 당신 말씀 야곱에게, 규칙과 계명 이스라엘에게 알리신다. 어느 민족에게 이같이 하셨던가? 그들은 계명을 알지 못하네. ◎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고백하는 나병 환자를 치유하심으로써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신다.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으신 예수님께서는, 그가 깨끗하게 되어 다른 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신다.(루카 5,12-16)
12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1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14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시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셨다.
15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1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주님 공현 후 금요일 제1독서 (1요한5,5-13)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5~6)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5)
'누구입니까'로 번역된 '티스 에스틴'(tis estin)에서 의문 대명사 '티스'(tis)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 바로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설의법적 표현이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승리를 매우 구체적이며 개인적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원리와 수단이기는 하지만(1요한5,4), 삶속에서 실제적으로 세상과 싸워 이기는 주체는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본문에서 '이기는 사람'으로 번역된 '호 니콘'(ho nikon)에서 '니콘'(nikon)은 현재분사로서 계속적으로 '쳐부수는 자','정복하는 자'라는 뜻이다.
즉 완성적 차원의 승리가 아니라 계속되는 전투에서 계속적인 승리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것은 성도들이 계속되는 사탄의 유혹을 극복하면서 승리하는 것을 뜻한다.
당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많은 이단들의 속임이 있었는데, 그분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을 끝까지 지켜 나감으로써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그리스도론적인 메시지와 함께 당시에 있었던 이단들을 염두에 두고 이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6)
사도 요한은 이제 요한1서 5장 6~9절에서 육화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성령과 물과 피의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확실한 믿음의 대상임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물'로 번역된 '휘다토스'(hydatos)와 '피'로 번역된 '하이마토스'(haimatos)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이견들이 많다.
첫째는 물과 피가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를 의미한다는 견해이다.
둘째는 물과 피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물과 피로써 수난을 상징한다는 견해이다. 히포의 주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본절의 물과 피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연관시켜 해석하였다.
세째로 물과 피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심과 동시에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사건과 마지막 생애를 마감하실 때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사건이라는 견해이다. 이 세번째 견해가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인간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 오신 주님께서 물세례(수세; 水洗)를 받으심으로써 공생활을 시작하셨고,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죄인의 모든 죄를 대속(代贖)하셨다는 해석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공생활 활동의 시작을 상징하는 물과 공생활 활동의 완성을 상징하는 피란 표현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행하신 활동 전체를 포괄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새 성경은 '오신'으로 번역되었지만, 원문은 '오신 분'(호 엘톤; ho elthon)이다.
'엘톤'(elthon)의 원형 '에르코마이'(erchomai)는 기본적으로 '오다'(come),'가다'(go)란 뜻인데, 여기에서는 부정 과거 분사로 사용되어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이미 우리에게로 오셨다는 역사적 사실을 가리킨다.
당시 이단들 가운데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었다. 사도 요한은 그들의 그릇된 주장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 되심이 세례와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증명되었음을 선포하고 있다.
또한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이것은 영어의 'not~ but'의 용법과 같이 전자를 부정함으로써 후자의 긍정적 의미를 보다 강조하는 '우크~알르'(uk~all)란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물만이 아니라'에서 '만'(only)에 해당하는 '모논'(monon)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을, '물' 단 하나와만 연관시키는 자들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영지주의 이단 가운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에 떠났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수님께서 공생활 기간 잠시 동안만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했다고 보는 견해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즉 사도 요한은 '단 하나 그것만'이란 매우 강한 배타적 의미를 지닌 단어를 사용하여 이러한 이단 사상의 입장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며, 또한 '우크'(uk)란 부정어를 사용하여 이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특히 후반절의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로 번역된 '엔 토 휘다티 카이 엔 토 하이마티'(en to hydati kai en to haimati)에서는 '토'(to)란 정관사와 더불어 '~안에'란 뜻이 있는 전치사 '엔'이 '물'과 '피'란 단어 앞에 개별적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물'뿐 아니라 '피'도 독립적인 가치를 지니며, 둘 다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됨을 역설하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증언하시는 분'으로 번역된 '토 마르튀룬'(to martyrun)의 원형 '마르튀레오'(martyreo)는 법적 용어로서 어떤 사실을 공적으로 증언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사도22,5; 1코린15,15).
여기서 사도 요한은 이 단어를 성령의 역사(役事)를 묘사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곧 성령께서 친히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느님의 아드님 되심을 증언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르튀룬'(martyrun)은 현재 분사이므로, 그 증거의 활동이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낸다(요한15,26; 16,13.14).
'성령은 진리입니다'로 번역된 '호티 토 프뉴마 에스틴 헤 알레테이아'(hoti to pneuma estin he alletheia)를 직역하면, '왜냐하면 성령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because the Spirit is truth)가 된다.
성령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은 그 성령이 진리의 영이기 때문이며, 그가 진리 자체이시므로 그가 증거하는 내용 역시 진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 역시 진리인 것이다. 성령께서 진리라는 사실은 예수께서도 말씀하신 내용이다(요한14,17).
한편 본문의 시제는 직설법 현재 시제이다. 그리스어에서 직설법 현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변치 않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성령이 진리'라는 사실은 예수님 활동 당시에도, 초대 교회 당시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변치않는 진리임을 나타낸다.

주님 공현 후 금요일 복음 (루카5,12-16)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13)
루카 복음 5장 12절부터 15절까지는 나병환자 치유 기사이다. 이것은 공관 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오 복음에서는 산상설교를 마치신 직후에 일어난 사건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실상은 예수님의 제1차 갈릴래아 활동 기간 가운데 산상설교가 주어지기 이전에 있었던 사건이다(마태8,2~4; 마르1,40~45). 그리고 마태오 복음에서는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라고 되어 있고(마태8,2), 마르코 복음 역시 '와서'라고 되어 있다(마르1,40).
이것은 나병환자가 동네 밖에서 격리된 채 살아야 한다는 율법의 규정 (레위13,45.46)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의 본문은 마치 나병환자가 동네 안에 있다가 예수님을 보고 다가와 엎드린 것처럼 되어 있다. 하지만 루카 복음사가가 마태오나 마르코 복음서와 같이 그 정황을 상세하게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지, 나병환자가 동네 밖에 있다가 예수님이 계시는 동네에 들어온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당시 사회적 통념이나 정결례법으로는 나병환자가 부정하게 취급되었다. 따라서 건강한 사람은 그들과 접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나병환자에게 몸소 손을 대시며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예수님께서 직접 손을 대셨다는 것은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가엾이 여기는 마음(마르1,41), 즉 측은지심(연민의 정)과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 그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셨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행동 가운데는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이 잘 담겨져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깨끗하게 되어라'에 해당하는 '카타리스테티'(katharistheti; be clean)는 '깨끗하게 하다'라는 동사 '카타리조'(katharizo)의 과거 수동태 명령형이다.
그런데 '깨끗하게 되다'라는 말 속에는 깨끗하게 되는 대상의 상태가 불결하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이 불결함의 이유는 일차적으로 '나병'이 전염성이 강한 불결한 병이기 때문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도 이러한 표현가운데에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병은 레위기의 정결에 대한 규정(레위기13장과 14장)과 연결되어 있는데, 거기에서 나병(악성 피부병)은 부정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고, 죄의 속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카 복음 5장 13절의 표현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셨다는 뜻과 더불어 그 나병환자의 영적 질병인 죄의 문제까지 해결하셨다는 뜻까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만이 이러한 전인적 치유가 가능하며, 예수님을 제외하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이러한 온전한 치유를 베풀 수 없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송영진 모세 신부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 5,12)."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이것은 예수님과 어떤 병자의
대화입니다.
지금 병자가 한 말은, 예수님의 능력은 믿지만 예수님의 의향이 어떤지는 모른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의 말을
뜻에 따라 다시 정리하면, "주님! 저는 주님께서 저를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고쳐 주기를
원하십니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나는 원한다. 깨끗해져라."입니다.
여기서 "깨끗해지다." 라는 말에는 "건강해지다." 라는 뜻도 있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함께 지낼 수 있는 상태가 되다." 라는 뜻도 있고, "성전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상태가 되다." 라는 뜻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깨끗하지 않은, 즉 부정한 사람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나는 원한다." 라는
예수님 말씀에는 당신의 사명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하느님의 집으로(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시려고(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원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분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려면 먼저 깨끗해져야 합니다.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1,4).
따라서 "나는 원한다.
깨끗해져라." 라는 말씀을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영혼까지 깨끗해져서 구원을 받는
것이다.
너도 몸의 병을 고치는 것만 바라지 말고 영혼까지 건강하게 되어서 궁극적인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여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이라고 믿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일인데, 그렇다면 우리 자신도 정말로 그것을 바라고 있는가?
벳자타 못 가에서 서른여덟
해나 누워 있었던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건강해지고 싶으냐?" 라고 물으신 일이 있습니다(요한 5,6).
그때 그
병자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요한 5,7).
이 말의 뜻은, "제가 바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못 속에 들어가는
일입니다."입니다. 물론 건강해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남들보다 먼저 못 속에 들어가기를 원한 것이겠지만, 그의 말에는 이기심이
들어 있습니다.
또 사람들에 대한 원망, 미움 같은 것도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몸만 병든 것이 아니라 영혼도 병든
상태입니다.
그 병자가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에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도 몰랐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는 "남들보다 먼저" 라는 이기심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 덕분에 건강을 되찾았으면서도 바로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요한 5,15).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뭔가를 청하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라고 먼저 물으셨습니다(마르
10,36).
그때 두 사도는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라고 대답했습니다(마르 10,37).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그냥 높은 자리가 아니라, 다른
사도들보다 더 높은 자리를...)
우리는 그들이 그때는
그랬지만, 나중에는 각자 위대한 사도가 되고 순교자가 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자기들이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마르 10,38) 세속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서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를 청했지만, 나중에는 정말로 청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것을 얻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았고,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죽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도들보다 더 높은 자리는 아니고, '섬김'을 실천할 때 하느님께서 높여
주시는 자리인데, 그런데 그 자리는 그들이 처음에 청했던 자리보다 더 높은 자리입니다.)
예리코의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가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루카 18,38-41).
그러자 그는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고 청했습니다. 그의 청을
겉으로만 보면 특별한 점이 없고, 볼 수 없는 처지이니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한 것으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다시 볼 수 있게 된
그는 다른 길로 가지 않고 바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루카 18,43). 그래서 우리는 그가 청한 것이 '구원'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청한 것이 아니라, 메시아를 따라갈 수 있는 눈을 달라고 청한 것, 또는 메시아의 뒤를
따르는 새 인생을 청한 것.
만일에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고 새 직업을 구하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또는 "네가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고 물으신다면?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만 원하고 청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어떤 경우에는 죄를 짓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생각하지 않고 세속의 재산만 원하고 청한다면 바늘귀를 통과하지 못하는 낙타가 될 것입니다(루카
18,25).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저만한 높이의 믿음에 도달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정말로 놀라운 믿음입니다.
온몸이 나병에 걸린 환자라면 어떤 방법으로도 깨끗하게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지난여름 메르스로 많은 사람이 철저하게 격리되어 생활을 해야 하던 때, 성경의 나병 환자들이 특별히 생각났습니다. 메르스 환자들은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음압 병실에 격리되어, 가족의 위로도 제대로 받을 수 없었고, 장례마저도 가족이 정상적으로 치를 수가 없었습니다.
마을에서 떨어져 살아야만 했고 길을 가면서도 “나는 불결한 사람이요!” 하고 다른 이들이 가까이 오지 않도록 자신이 환자라고 외치면서 다녀야 했던 나병 환자들의 고통은, 상처 때문에 오는 아픔보다 가정과 사회로부터 추방된 소외의 고통을 감내하기가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메르스의 경우처럼, 사실 다른 사람들도 그들을 피해 다녔습니다. 그래서 수치심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포를 느끼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환자가, 예수님께서 자기를 고쳐 주실 수 있다고 전혀 의심하지 않고 믿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그분의 뜻에 내맡깁니다. 다른 어느 병자처럼 “하실 수 있으면”이라고 의심을 달지도 않고, 예수님을 유혹하던 악마처럼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라고 토를 달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저의 병을 고쳐 주셔야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을 수 있겠습니다.”라고 예수님을 시험하거나 자기 믿음에 조건을 붙이지도 않습니다. 더욱이 자기를 고쳐 주셨기 때문에 그분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신 전능하신 주님이심을 굳게 믿으면서, 자신의 고통을 자애로우신 주님의 뜻에 맡기며 의탁합니다.
그래서 나병 환자의 믿음에 그저 탄복할 따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믿음을 보면서 그저 감탄만 할 때는 아니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