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연중 제1주간 월요일]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4-20)

연중시기(年中時期 )
교회력에 있어 성탄 시기 다음에서부터 즉 주의 공현 후 주일부터 사순시기 전까지와 성령강림 후 월요일부터 재림시기 전까지의 때를 말한다(1월 초순∼2월 중순, 5월 말경∼11월 말경). 33주간 혹은 34주간 계속되는 이 기간 동안은 그리스도 신비의 특수한 면을 축하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축하한다. 특히 연중 주일에 그렇게 한다. 연중시기의 전례색은 생명의 희열과 희망을 나타내는 녹색으로 사제는 녹색의 제의(祭衣)를 입는다
사순 시기 전까지 사무엘기와 열왕기를 묵상한다. 다윗과 솔로몬의 역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에서 왕정이 수립되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무엘의 탄생에 대하여 전하는데,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아이가 없어 괴로움을 겪던 여인이었다.(사무엘상 1,1-8)
1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 춥족의 라마타임 사람이 하나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엘카나였는데, 에프라임족 여로함의 아들이고 엘리후의 손자이며, 토후의 증손이고 춥의 현손이었다.
2 그에게는 아내가 둘 있었다. 한 아내의 이름은 한나이고, 다른 아내의 이름은 프닌나였다. 프닌나에게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3 엘카나는 해마다 자기 성읍을 떠나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주님께 예배와 제사를 드렸다. 그곳에는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가 주님의 사제로 있었다.
4 제사를 드리는 날, 엘카나는 아내 프닌나와 그의 아들딸들에게 제물의 몫을 나누어 주었다. 5 그러나 한나에게는 한몫밖에 줄 수 없었다. 엘카나는 한나를 사랑하였지만 주님께서 그의 태를 닫아 놓으셨기 때문이다. 6 더구나 적수 프닌나는,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으므로, 그를 괴롭히려고 그의 화를 몹시 돋우었다.
7 이런 일이 해마다 되풀이되었다. 주님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프닌나가 이렇게 한나의 화를 돋우면, 한나는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8 남편 엘카나가 한나에게 말하였다. “한나, 왜 울기만 하오? 왜 먹지도 않고 그렇게 슬퍼만 하오? 당신에게는 내가 아들 열보다 더 낫지 않소?”
시편 116(115),12-13.14와 17.18-19ㄱㄴ(◎ 17ㄱ 참조)
◎ 주님, 당신께 감사 제물 바치나이다.
○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 ◎
○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께 나의 서원 채우리라. 당신께 감사 제물 바치며, 주님 이름 부르나이다. ◎
○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께 나의 서원 채우리라. 주님의 집 앞뜰에서, 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
연중 시기를 맞이하여 마르코 복음을 처음부터 묵상한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시고 당신을 따를 첫 제자들을 부르신다.(마르코 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제1독서 (1사무1,1-8)
"더구나 적수 프닌나는,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으므로, 그를 괴롭히려고 그의 화를 몹시 돋우었다."(6)
한나의 불임 사실이 사무엘 상권 1장 5절에 이어서 6절에서도 반복됨으로써 한나의 절망적 상황이 다시 한번 더 강조된다.
5절의 '주님께서 그의 태를 닫아 놓으셨기'에 해당하는 원문은 '와이흐와 싸가르 라흐마흐'(waihwah sagar rahmah; but the Lord had closed her womb)인데, 6절에서는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으므로'에 해당하는 원문이 '키 싸가르 예흐와 뻬아드 라흐마흐'(ki sagar yehwa bead rahmah; because the Lord had closed her womb)로서, '뻬아드'(bead)라는 전치사가 더 첨부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뒤에'(behind), '위에'(up)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뻬아드'(bead)와 '못하게', '닫아'로 번역된 '싸가르'(sagar; had shut)와 결합하여 강조의 의미가 6절에 부가되었다.
사무엘서 저자는 주어 '주님께서'에 해당하는 '와이흐와'(waihwah)를 문장 서두에 배치시켜서, 한나가 임신하지 못하는 것이 한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
5절의 본문을 직역하면 '그러나 주님께서 그녀의 자궁을 닫았다'인데, 이것은 아이를 임신하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에 대한 히브리식의 완곡어법이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은 신(神)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겨졌다. 구약에서도 다산(多産)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상징으로서 자녀가 없음은 축복받지 못한 결과로 많이 나타난다(창세13,16; 15,5; 16,10).
그런데 여기 본문의 경우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 특별한 경우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한나의 경우에는 하느님의 특별한 계획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특별한 계획으로 하느님께서 여인의 자궁(태)을 닫아 임신하지 못하게 한 경우가 성경에 가끔 나타난다. 하느님께서는 사라이의 태를 닫으셨으며(창세16,2), 레베카의 태를 닫으셨고(창세25,21), 라헬의 태(창세29,21)도 닫으신 적이 있다.
이들은 모두 구세사의 중요한 인물들인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아내들로서 고통스러운 불임의 시기를 지난 후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사악, 야곱, 요셉과 같은 아들을 얻었다.
이런 이스라엘 족장들의 역사를 잘 알고 있던 사무엘서의 독자들은 이러한 본문의 내용을 통해 이제 앞으로 한나도, 사라이가 이사악을 낳고 라헬이 요셉을 낳은 것처럼, 위대한 신앙의 인물을 낳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이러한 일들이 만군의 주님이신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의 역사하심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짐작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본문은 사람의 잉태가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하느님께서 태를 닫으시면 새로운 생명을 볼 수 없고, 반대로 하느님께서 태를 여셔야 사람이 새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생명의 원천은 하느님께 있으며, 동시에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의 역사하심은 한나 개인의 삶을 뛰어넘어 이스라엘 전체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적수 프닌나는'
원문에는 '프닌나'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고, '(그) 적수'로 번역된 '차라타흐'(tsarathah) 가 나온다. '차라타흐'(tsarathah)는 '고통', '환난'의 의미의 명사 '차타'(tsarah)에 여성 3인칭 단수 소유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로서 직역하면 '그녀의 고통'이다.
여기서는 이 단어가 의인화되어 '그녀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자'라는 의미의 '대적', '적수'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영어 성경은 '경쟁자'(rival)나 '적대자'(adversary)로 번역하였다.
프닌나를 이처럼 한나의 적수로 표현한 것은 한나 자신의 평가가 아닌 사무엘서 저자의 평가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무엘서 저자가 평가를 통해 남편인 엘카나가 '특별히 좋은 것이나 가치있는 것을 주었다'는 의미의 '한몫'을 준다는 이유(1사무1,5)와 또 아이를 못낳는다는 이유로 한나를 멸시한 프닌나의 악하고 교만한 성품을 알 수 있다.
프닌나는 자신에게 자녀들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축복을 이용하여 상대적으로 위축된 상태에 있는 한나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적대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프닌나가 괴롭히려고 그의 화를 몹시 돋우게 한 것에 대한 한나의 반응은 단지 울기만 하고 아무 것도 막지 않으며(1사무1,7),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뿐이었다(1사무1,10).
'그를 괴롭히려고 그의 화를 몹시 돋우었다'
프닌나는 자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으로부터 자신보다 더 사랑을 받는 한나를 시기 질투하여 괴로움과 고통을 주면서 한나를 적대했다.
'화를 몹시 돋우었다'에 해당하는 '웨키아쌋타'(wekiassatha)의 원형 '카아쓰'(kaas; provoke)는 '분노를 일으키다'(신명4,25), '진노하시게 하다'(신명31,29), '화를 돋우다'(판관2,12) 등으로도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주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 때문에 나타내신 격렬한 감정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신명9,18; 1열왕14,7; 2역대33,6).
또한 '그를 괴롭히려고'에 해당하는 '빠아부르 하레이마흐'(baabur hareimah)에서 '빠아부르'(baabur)는 '때문에'(for)라는 의미의 전치사이며, '하레이마흐'(hareimah; to make her fret; in order to irritate her)는 원형 동사 '라암'(raam)의 사역형 부정사 연계형인데, 직역하면 '그녀를 괴롭히려고', '그녀를 괴롭게 만들기 때문에'이다.
프닌나가 한나를 어느 정도로 고통스럽게 했는지는 '괴로움을 당하다'라는 의미의 '라암'(raam)이라는 단어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사무엘서에서 이 단어는 모두 네 번 사용되는데, 이 본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연 현상 중의 하나인 '천둥', '우뢰'( 1사무2,10; 7,10; 2사무22,14)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늘에서 벼락과 함께 들리는 천지를 뒤엎을 듯한 '천둥 소리'는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는데, 사무엘서 저자는 바로 이 단어를 사용해서 프닌나에게 고통을 받고 있는 한나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 단어는 한나의 기도와 함께 특별한 의미를 갖는데, 사무엘서 상권 2장 10절에서 한나는 하느님께서 맞서는 자를 '천둥'으로 호령하실 것이라고 고백함으로써, 현재는 프닌나가 한나의 마음을 '천둥'과 같은 상태로 괴롭히지만, 결국에는 하느님께서 '천둥'과 같은 심판으로 그 서러움을 갚아 주실 것임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회개, 믿음> 송영진 모세 신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이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복음)입니다.
때가 찼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 라는 말은,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종말의 날을 정하는 것은, 또는 하느님 나라를 언제 완성할 것인지 정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이라는 것도
나타냅니다.
(종말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결정하시고 실행하실 때 종말이 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인간 세상 근처 어디쯤에 와 있다는 뜻도 아니고,
시간적으로
가까워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중간 상태에 있어야 하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고 나서 이천 여 년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같은 말을 되풀이 하고 있는가?")
지난 이천 여 년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일 뿐입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2베드 3,8)."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회개하고 나를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회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는 일입니다.
"복음을 믿어라." 라는 말씀에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메시아로서 이
기쁜 소식을 선포한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말은 진리이지만,
'믿기만 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다고 해도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7,21).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17.26).
여기서 '기쁜 소식'이라는
말을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쁜 소식'은 "나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이고,
"들었을 때 내가 기뻐하게 되는
소식"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려면
먼저 그 소식을 희망하고 있었어야 합니다.
희망하지 않았다면, 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면,
소식을 들어도 기뻐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만 기쁜 소식이 됩니다.
(만일에 하느님 나라의
반대쪽에 있는 나라를 원하고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소식은 기쁜 소식이 되기는커녕 슬픈 소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해야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셨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긴 해도 회개하는 것은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소식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귀찮은 소식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르
1,17-18)."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신 일과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일이
바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 복음서를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첫 제자들인 어부들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은" 첫 신자들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회개하지도
않고 복음을 믿지도 않은 어부들을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시고 사도로 삼으셨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회개했고, 복음을
믿었기 때문에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로 불러 주시기를 희망하고 있었을
것이고,
부르심을 기다리면서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모습은,
그들이 회개와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했음을 나타내는 모습입니다.
'회개'란, 우리를 붙잡고 있는 세속적인
것들을 모두 버리는 일입니다.
신앙의 열매를 제대로 맺으려면,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마르 4,19).
'믿음'이란,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일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은
제자들만(사도들만) 실천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주일미사 참례를 온전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적어도 그 시간 동안에는 모든 것을 버리게 됩니다.
놀러가자는 유혹도 뿌리치고, 뭔가
중요한 일들도 포기하고...
미사 중에 휴대 전화를 꺼놓는 것도 모든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만일에 미사 참례를 하면서도 전화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면,
그것은 미사 참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떠나 있다면 몸이 성당에 앉아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일도,
즉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함께 하느님 나라로 가자고 권하고 인도하는 일도,
사도들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성경에서는 제자들과 신자들을 구분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마태 28,19)"
이것은 신앙인은 모두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니 모든 신앙인은 제자로서 복음
선포의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연중 제1주간 월요일 복음(마르1,14~20)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7)
한글 새 성경에 '오너라'라고 번역된 '듀테'(deute; follow)는 둘 또는 그 이상을 부를 때 사용되는 부사로서 동사적 의미도 갖는다.
즉 이 단어가 동사로 쓰일 때에는 '이쪽으로 오다', '자 오라' 등의 뜻으로 상대를 재촉하고 명령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따라'로 번역된 '오피소'(opiso; after)는 장소적 의미로서는 '~뒤에', 시간적 의미로서는 '~후에'라는 의미를 가진 전치사이므로, '내 뒤에 오라'(follow me)는 뜻이다. 그런데 이 명령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단호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제자로 부르시면서 내린 단 한마디 '나를 따라오너라'는 명령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순전히 당신 자신만을 뒤따를 것을 원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그들이 자신의 계획에 따라 자신들이 스스로 인생 행로를 결정하고 그것에 책임지는 삶을 살아 왔지만, 이제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에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고, 오로지 그분의 뜻만을 쫓아 살아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시면서 외형적인 직업이나, 재산, 그리고 가족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버려야 하는 자아 부정의 삶과 그러한 결단을 요구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and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사람낚는 어부'로 번역된 '할리에이스 안트로폰'(halieis anthropon; fishers of men)에서 '안트로폰'(anthropon)은 보편적인 '사람'을 뜻하는 명사 '안트로포스'(anthropos)의 소유격 복수이다.
명사의 소유격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목적의 의미로 쓰였다. 말하자면 고기를 그물로 잡아들이는 어부와 같이, 사람들을 복음으로써 포획한다는 은유적 표현으로서, '사람들을 그물로 잡는 어부'의 의미로 '할리에이스 안트로폰'(halieis anthropon)이 쓰였다.
특히 여기서 관사없는 복수형으로 사용해서 어느 특정한 사람이 아닌, 모든 인류를 복음 전파의 대상으로 해야 함을 암시한다.
사실 복음 선포자는 죄악과 어둠과 오류의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는 인간들을 구원의 배안으로 모아들이는 사람 낚는 어부인 것이다.
여기서 특징적인 단어인 '포이에소'(poieso; I will make)는 '만들다','되게 하다'는 뜻을 지닌 동사 '포이에오'(poieo)의 미래 능동태 1인칭 단수이다.
따라서 그 '만드는' 행동의 주체가 부름받은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아닌 부르신 예수님 당신 자신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 스스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예수님 당신께서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도록 만들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제자로 부름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걱정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한편 당시 고대 그리스나 근동의 문화적 관습은 제자될 사람들이 스승을 찾아가 스스로 제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인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스승이신 예수님 당신 자신이 먼저 찾아가 능동적으로 제자들을 선택하여 부르신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1장 17절에서 '나를 따라오너라'(Come, follow me)는 말씀은 현재인데,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and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는 말씀은 미래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부르시는' 현재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미래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적어도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함께 한 3년간의 시간들, 즉 성령 강림 이후 초대 교회에서 본격적으로 그들이 주님의 사도로서 활동을 했다면, 그 기간들은 수련 및 양성 기간, 오늘날의 사제 서품 전의 신학교 과정과 종신 서약 전의 수도 생활이 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