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주간 화요일] 예수님의 권위 (마르 1,21ㄴ-28)

2016. 1. 11. 오후 5:2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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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예수님의 권위 (마르 1,21ㄴ-28)

 

 실로에 있는 주님의 성전에 찾아가 한나는 하느님께 아들을 허락해 주시기를 청하면서, 아들을 주신다면 주님께 봉헌하겠다고 서원한다. 엘리 사제는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리라고 대답하는데, 집으로 돌아간 한나는 사무엘을 낳는다.(사무엘상 1,9-20)
그 무렵 9 실로에서 음식을 먹고 마신 뒤에 한나가 일어섰다. 그때 엘리 사제는 주님의 성전 문설주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10 한나는 마음이 쓰라려 흐느껴 울면서 주님께 기도하였다. 11 그는 서원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만군의 주님,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저를 기억하신다면, 그리하여 당신 여종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 여종에게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고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않겠습니다.”
12 한나가 주님 앞에서 오래도록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엘리는 그의 입을 지켜보고 있었다. 13 한나는 속으로 빌고 있었으므로, 입술만 움직일 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엘리는 그를 술 취한 여자로 생각하고 14 그를 나무라며, “언제까지 이렇게 술에 취해 있을 참이오? 술 좀 깨시오!” 하고 말하였다.
15 그러자 한나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나리!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닙니다. 저는 마음이 무거워 주님 앞에서 제 마음을 털어놓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16 그러니 당신 여종을 좋지 않은 여자로 여기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너무 괴롭고 분해서 이제껏 하소연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17 그러자 엘리가 “안심하고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당신이 드린 청을 들어주실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18 한나는 “나리께서 당신 여종을 너그럽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는 그길로 가서 음식을 먹었다. 그의 얼굴이 더 이상 전과 같이 어둡지 않았다.
19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일찍 일어나 주님께 예배를 드리고 라마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엘카나가 아내 한나와 잠자리를 같이하자 주님께서는 한나를 기억해 주셨다. 20 때가 되자 한나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한나는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 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다.


1사무 2,1.4-5.6-7.8ㄱㄴㄷㄹ(◎ 1ㄱ 참조)
◎ 저의 구원자 주님 안에서 제 마음 기뻐 뛰나이다.
○ 주님 안에서 제 마음이 기뻐 뛰고, 주님 안에서 제 얼굴을 높이 드나이다.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기에, 제 입은 원수들을 비웃나이다. ◎
○ 힘센 용사들의 활은 부러지고, 비틀거리던 이들은 힘차게 일어선다. 배부른 자들은 양식을 얻으려 품을 팔고, 배고픈 이들은 더는 굶주리지 않는다. 아이 못낳던 여자는 일곱을 낳고, 아들 많은 여자는 홀로 시들어 간다.
○ 주님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며, 저승으로 내리기도 저승에서 올리기도 하신다. 주님은 가난하게도 가멸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높이기도 하신다. ◎
○ 주님은 비천한 이를 땅바닥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가난한 이를 잿더미에서 들어 높이시어, 존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      


첫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고,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그것을 내쫓으심으로써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셨다.(마르코 1,21ㄴ-28)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제1독서 (1사무1,9-20)

사무엘은 '샤울 메엘'(Shaul Meel : 1사무 1,17.27-28) 에서 나온 이름으로 '하느님께 청을 드린'이란 뜻이다.  

"만군의 주님,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저를 기억하신다면, 그리하여 당신 여종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 여종에게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고,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않겠습니다."(10절 참조)

실로에 있는 성전에서 한나는 '마음이 쓰라려 흐느껴 울면서' 이렇게 기도하고 서원하였다(10). 그리고 한나는 '오래도록' 기도하였고(12), 입술만 움직이며 속으로 빌었다(13).

얼마나 혼신을 다해 속으로 신음하면서 기도했으면, 얼굴이 뻘겋게 달아 오르고 상기되어서, 엘리 사제가 그를 '술취한 여자'로 생각하고 나무랐겠는가?

한나는 '마음이 무거워, 주님 앞에서 제 마음을 털어놓고 있었을 따름'이며(15), '너무 괴롭고 분해서 이제껏 하소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16).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자가 자식을 못 낳는 것은 심각한 문제인 것 같다. 우리나라는 이런 여자를 '석녀(石女: 돌계집)이라고 부르고, 의학적 용어로는 성기능 장애의 질병인 '불감증'에 걸렸다고 말할 수 있다.

영어로는 '불감증'을 'Frigidity'라고 하는데, 이것은 '얼다'라는 뜻의 'Freeze'에서 파생된 말로, '돌'이란 단어처럼 차갑고 단단하다는 느낌을 준다.

우리나라는 '석녀'에 대한 형벌이 가혹했던 나라였다. 자식을 낳지 못라는 것은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하나였다. 농가에서 볍씨를 뿌리거나 감자를 심을 때, 콩 씨앗을 뿌릴 때는 여자 품을 샀는데, 이때 다산한 여인은 대우를 받았지만,석녀는 제외 당했다. 

물론 다산한 여인의 번식력을 통해 풍년을 기원하는 속내가 담겨 있지만, 아이를 못 낳으면 품도 팔 수 없다는 절박함이 바로 자식욕으로 나타나고, 이왕 낳을 바에는 아들을 낳겠다는 남아 선호 사상을 잉태시켰다. 전통적으로 민간에 전해 오던 '석녀'를 면하기 위한 이야기는 여기서 생략한다.

유대인들의 자녀 출산은, 욕정의 만족과 더불어 선민 이스라엘의 종족 번식과도 관련되어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협력하는 일이 된다. 

그런데,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하느님께서 여성의 태를 열어 주셔야 임신이 가능하므로,자녀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에서 제외된 불행한 삶이다. 따라서 종교 율법적인 유대인 사회에서, 항상 소외되고 손가락질을  받는 불행한 처지와  神의 저주받은 죄인 신세를 면하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한나처럼, 성모님의 어머니 안나처럼,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처럼, 늘 하느님께서 자식을 점지해 주시도록, 광야에서나 성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제물을 바쳤던 것이다.

한나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청하며 기도드렸고, 일찍 일어나 주님께 예배를 드렸다(19ㄱ). 주님께서는 한나의 속 마음을 보시고 기억해 주셔서(19ㄴ), 때가 되어 훌륭한 예언자가 될 사무엘을 낳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사람들은 그분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놀랍니다. 그 놀람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말씀 한마디로 쫓아내신 데서 절정을 이룹니다. 인간의 영혼을 타락과 파멸로 이끄는 악마를 복종시키신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 우리들의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합니다. (정미연 소화데레사)


<예수님>   송영진 모세 신부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2)."


예수님의 가르침에 권위가 있어서 사람들이 몹시 놀랐다는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압도되었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낀 것 같습니다.
지금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아직 예수님을 잘 모르고,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닌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낀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힘은 바로 예수님 자신에게서 나온 힘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이 비교되고 있는데,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
옛날의 유명한 학자들의 가르침을 인용해서 전달하는 방식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가르침은 사실상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성서학자들이나 사제들도 지식 자랑만 할 때가 많습니다.)
만일에 율법학자들이 스스로 기도하고 묵상하고,
또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했다면,
그렇게 권위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일부는 믿었을 것이고, 일부는 놀라기만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놀라기만 하고 안 믿었다고 해도
그것은 예수님 탓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의 탓입니다.
믿음이란 강요할 수 없는 일입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하는 일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만으로 마귀를 쫓아내신 것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


'새롭다.' 라는 말은, 전에는 본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 가운데에도 구마 예식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루카 11,19),
그들은 하느님께 마귀를 쫓아내 달라는 예식을 행했을 뿐이고,
그들 자신들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힘과 권위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그것도 복잡한 예식이 아니라, 말씀만으로...)


여기서 말하는 '권위'는 마귀들이 복종할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권위와 권능을 뜻합니다.
그런데 만일에 마귀들이 '사람에게서' 나가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면,
그것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마귀들은 지옥으로 쫓겨나서 갇히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귀들은 예수님께 지하로 물러가라는 명령을 내리지 말아 달라고 청하였다(루카 8,31)."
(여기서 '지하'는 '지옥'입니다. 지옥은 마귀들도 무서워하는 곳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신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전멸시키신 것도 아니고, 인간 세상에서 완전히 쫓아내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마귀 들린 사람들을 구원해 주신 일입니다.
마귀들은 아직도 인간 세상에서 활동 중입니다.
(종말의 최후의 심판 때에는 완전히 멸망당하겠지만...)
그래서 우리가 마귀들과 맞서 싸우는 일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그 싸움을 할 수 없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마귀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시지 않았을까?
이 질문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왜 끊임없이 박해와 고난을 겪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이것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인간들 쪽에서도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모든 일을 다 완벽하게 마무리하셨다면, 제자들이(신자들이) 할 일이 하나도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냥 종말 상태가 됩니다.
종말이 되기 전까지는 신앙인들이 할 일이 많습니다.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라는 말에는, 사람은 당연히 복종해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마귀들도 복종할 정도라면, 인간은 더욱더 복종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복종하게 되었을까?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해서 실제로 복종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생각만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생각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 생각이 실제로 '삶으로' 실천하는 믿음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


'권위' 라는 말에서 모세의 일이 연상됩니다.
모세가 하느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파라오에게 가서 하느님 말씀을 전했을 때, 파라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주님이 누구이기에 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내보내라는 것이냐?
나는 그 주님을 알지도 못할뿐더러, 이스라엘을 내보내지도 않겠다(탈출 5,2)."
파라오가 보기에 모세는 아무런 권위도 힘도 없는 히브리 노예였을 뿐입니다.
그랬었는데, 파라오는 하느님께서 내리신 여러 가지 재앙을 겪고 나서 비로소 완전히 기가 꺾여서 굴복하게 됩니다(탈출 12,31-32).


지금 모세의 일을 말한 것은, 모세가 뭘 잘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 '사람'일 뿐인 모세와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차이점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모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고 주님이신 분입니다(요한 1,1; 20,28).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오늘의 묵상

바빌론 유배 때부터 유다인 남자 열 명 정도가 모여 사는 곳에서는 회당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는 기도와 시편 낭송, 모세 오경 또는 예언서 봉독, 이에 대한 설교와 해설, 신앙 고백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성전이 예배와 제사를 바치는 곳이었다면, 회당은 예배와 일종의 교육 장소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회당장의 부탁을 받으시고 회중에게 한 말씀 하신 것 같습니다.
강의 시간에 토론의 여지가 있는 사안에 대하여 가끔 개인의 견해를 밝히면서, 이것은 어느 학자의 학설이 아니라 개인적인 주장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저명한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각주에 참고 문헌까지 달아 주면 학문적으로 어느 정도 권위가 있지만, 저의 개인적인 견해를 피력할 때에는 권위는 뒷전에 두고 그냥 사견임을 전제하면서 설명합니다.


이런 방식의 권위 개념이라면 율법 학자들의 가르침이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훨씬 더 권위가 있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율법을 연구한 율법 학자들은, 자기 스승이 누구라고 내세우기도 하면서 학파의 역사와 전통에 의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처음으로 등장하신 데다가, 요즈음 말로 가방끈도 짧으셔서 그저 당신 자신의 말씀을 하실 뿐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강조하는 권위는 이와는 사뭇 다른데, 후반부에서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의 능력을 입증하시기 때문입니다.


탁상공론이 아니라 힘이 있는 말씀, 더 쉽게 표현한다면 말발이 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곧바로 그 권위를 알아봅니다.

우리도 수많은 학자들을 인용하는 가르침 앞에서는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을지 몰라도, 살아 움직이는 말씀 앞에서는 경탄하며 귀를 기울입니다.

정보가 넘쳐나고 말이 많아진 세상, 아무 힘이 없이 허공을 떠도는 말들이 너무나 자주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살아 있고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 그리워집니다.



연중제1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1,21ㄴ-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5~26)

마르코 복음 1장 24절에서 더러운 영이 예수님께 대하여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고 부른다.

나자렛이 예수님의 출생지는 아니지만, 유년 시절을 보내신 곳이므로 실질적인 출신지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나자렛은 유대인에 의해 경멸받던 지명이므로(요한1,46), 더러운 영이 갈릴래아를 대표할 수 있는 큰 도시인 카파르나움에서 사람들 앞에 예수님을 그렇게 부른 것은 예수님의 권위를 떨어뜨리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리고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에 해당하는 '티 헤민 카이 소이'(Ti hemin kai soi; what do you want with us)를 직역하면, '우리가 당신에게 무엇입니까?'이다.

말하자면 예수님과 더러운 영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우리를 괴롭히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더러운 영은  자신들을 가리켜, '우리','저희'라는 표현으로 쓰고 있는데, 더러운 영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자신을 복수 위격으로서 말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더러운 영이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의 입을 빌어 말하는 악한 영이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을 썼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는 표현은 악한 영들이 내용적으로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조롱하며 자신을 방해하는 투설의적 형태의 문장이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상당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던 악한 영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탄의 권세를 멸망시켜서 사탄의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고통 당하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마르2,10; 1요한3,8). 그리고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에 해당하는 '호 하기오스  투 테우'(ho hagios tou theou; the Holy One of God)마르코 복음 1장 23절'더러운 영'에 해당하는 '프뉴마티 아카타르토'(pneumati akatharto; an evil spirit; an unclean spirit)대조되는 개념으로서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정확하게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다 (잠언1,7; 야고2,19).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꾸짖으시니

여기서 '꾸짖으시니'이 해당하는 '에페티메센'(epetimesen; rebuked)의 원형 '에피티마오'(epitimao)'엄하게 경고하다','책망하다'는 뜻이다.

당시에 마술사들은 독특한 도구를 사용해서 주술적 행위를 하여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는 시늉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당신 자신의 말씀의 권위를 사용하셔서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셨다.

그리고 구마행위를 하시는 예수님의 선포'조용히 하여라''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두 가지 명령으로 나눌 수 있다.

'조용히 하여라'는 첫번째 명령은 더러운 영이 이미 알고 있는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발설을 엄하게 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전에 미리 알려지면, 사람들에 의해 정치적 메시야로 옹립되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데 지장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조용히 하여라'에 해당하는 '피모테티'(phimotheti; he quiet; hold your peace)의 원형 '피모오'(phimoo)라는 단어가 '입에 재갈을 물리다'라는 의미가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까지 그 함구령이 얼마나 비밀스럽게 지켜져야 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나가라'에 해당하는 두번째 명령은 직접적으로 '치유 행위'와 관련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항변하는 더러운 영을 잠잠케 하시는 데 그치지 않고, 이어서 더러운 영에 들려 고생하는 부마자로부터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구마 행위를 하신다.

여기서 '나가라'에 해당하는 '엑셀테'(ekselthe; come)기본형은 '에르코마이'(erchomai)인데, 앞에 '안으로'에 해당하는 '에이스'(eis; into)라는 접두사가 붙으면 '들어가다'는 뜻의 '에이세르코마이'(eiserchomai)가 되고, 앞에 '밖으로'에 해당하는 '에크'(ek; out of)라는

접두어가 붙으면 '나가다'라는 뜻의 '엑세르코마이'(ekserchomai)가 된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 1장 21절의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에 해당하는 '에이셀톤'(eiselthon; he entered)과 마르코 복음 1장 25절  '나가라'에 해당하는 '엑셀테'(ekselthe; come)대조가 되어, 예수님께서 '회당 안으로 들어오심'더러운 영의 '회당 밖으로 (사람 밖으로) 쫓겨남'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들어 오심과 더러운 영의 쫓겨남 사이에는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의 선포가 놓여 있다(마르1,22).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자로서의 신적 능력과 권세가 있었다. 그래서 더러운 영은 자신의 지혜에 근거한 항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거주하던 사람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당신의 장면을 '경련을 일으켜 놓고'에 해당하는  '스파락산'(sparaksan; had torn; shook violently)과  '(큰 충격에 의한) 큰 소리'에 해당하는 '포네 메갈레'(phone megale; with a shriek; with a loud voice)라는 두 단어를 사용해서 더러운 영이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 아래 저항하지 못하는 모습을 시각과 청각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더러운 영이 자신이 머물렀던 사람에 대해서 행하는 최후의 학대 장면인 경련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리면서도,  그가 내지르는 죽음에 이르는 듯한 비명과 통곡의 소리를 동시에  표현함으로써 더러운 영의 극한 상실감과 마지막 저항을 묘사했다.

이것은 공관 복음서 안에서 마르코 복음사가만의 독특한 표현인데, 사탄의 세력의 완전한 패배를 강력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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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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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4.[연중 제1주간 목요일]나병환자 치유 (마르 1,40-45)16.01.13조회 49[연중 제1주간 수요일] 시몬의 장모치유 (마르 1,29-39)16.01.12조회 77[연중 제1주간 화요일] 예수님의 권위 (마르 1,21ㄴ-28)16.01.11조회 119[연중 제1주간 월요일]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4-20)16.01.10조회 69[주님 공현 후 토요일] 예수의의 세례 (요한 3,22-30)16.01.08조회 47[주님 공현 후 금요일] 나병환자치유 (루카 5,12-16)16.01.08조회 46[주님 공현 후 목요일]해방자 예수 (루카 4,14-22ㄱ)16.01.07조회 76[주님 공현 후 수요일]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 (마르 6,45-52)16.01.05조회 73[주님 공현 후 화요일] 오병이어 (마르 6,34-44)16.01.04조회 50[주님 공현 후 월요일] 공생활 시작 (마태 4,12-17.23-25)16.01.03조회 49[성 대 바실리오와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세례자 요한의 증언 (요한 1,19-28)16.01.01조회 119[2016. 1. 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예수 (루카 2,16-21)15.12.31조회 50[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요한 1,1-18)15.12.31조회 122[성탄 팔일 축제 내 제6일]한나의 감사기도 (루카 2,36-40)15.12.30조회 62[성탄 팔일 축제 내 제5일] 봉헌 (루카 2,22-35)15.12.28조회 85{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15.12.27조회 70[12월 26일 토요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파견 (마태 10,17-22)15.12.25조회 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