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주간 금요일]중풍병자치유 (마르 2,1-12)
사무엘이 나이가 많아지자 이스라엘 원로들은 그를 찾아가 임금을 세워 달라고 요구하는데, 하느님을 임금으로 섬기지 않으려 하는 것이었다. 사무엘은 왕정 제도의 해악에 대해 백성에게 들려주지만, 그들은 고집을 꺾지 않는다.(사무엘상 8,4-7.10-22ㄱ)
그 무렵 4 모든 이스라엘 원로들이 모여 라마로 사무엘을 찾아가 5 청하였다. “어르신께서는 이미 나이가 많으시고 아드님들은 당신의 길을 따라 걷지 않고 있으니, 이제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우리에게 세워 주십시오.” 6 사무엘은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정해 주십시오.” 하는 그들의 말을 듣고, 마음이 언짢아 주님께 기도하였다. 7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이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
10 사무엘은 자기한테 임금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주님의 말씀을 모두 전하였다. 11 사무엘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이 여러분을 다스릴 임금의 권한이오. 그는 여러분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자기 병거와 말 다루는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오. 12 천인대장이나 오십인대장으로 삼기도 하고, 그의 밭을 갈고 수확하게 할 것이며, 무기와 병거의 장비를 만들게도 할 것이오. 13 또한 그는 여러분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 제조사와 요리사와 제빵 기술자로 삼을 것이오. 14 그는 여러분의 가장 좋은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을 빼앗아 자기 신하들에게 주고, 15 여러분의 곡식과 포도밭에서도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 내시들과 신하들에게 줄 것이오. 16 여러분의 남종과 여종과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 그리고 여러분의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오. 17 여러분의 양 떼에서도 십일조를 거두어 갈 것이며, 여러분마저 그의 종이 될 것이오. 18 그제야 여러분은 스스로 뽑은 임금 때문에 울부짖겠지만, 그때에 주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오.”
19 그러나 백성은 사무엘의 말을 듣기를 마다하며 말하였다.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20 그래야 우리도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임금이 우리를 통치하고 우리 앞에 나서서 전쟁을 이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1 사무엘은 백성의 말을 다 듣고 나서 그대로 주님께 아뢰었다. 22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들의 말을 들어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 주어라.” 하고 이르셨다.
시편 89(88),16-17.18-19(◎ 2ㄱ 참조)
◎ 주님, 당신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 행복하여라, 축제의 기쁨을 아는 백성! 주님, 그들은 당신 얼굴 그 빛 속을 걷나이다. 그들은 날마다 당신 이름으로 기뻐하고, 당신 정의로 힘차게 일어서나이다. ◎
○ 정녕 당신은 그들 힘의 영광, 당신 호의로 저희 뿔을 들어 올리시나이다. 저희 방패는 주님의 것, 저희 임금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것이옵니다. ◎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보시고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 율법 학자들은 이것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심으로써 당신께 하느님의 권한이 있으심을 보여 주신다.(마르코 2,1-12)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제1독서 (1사무8,4-7.10-22ㄱ)
사무엘은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정해 주십시오." 하는 그들의 말을 듣고, 마음이 언짢아 주님께 기도하였다.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이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 (6~7)
사무엘서 상권 8장 5절에 나오는대로, 당시 이스라엘 모든 원로들이 왕정을 요구한 이유는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되기 위해서이다. 즉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답게 하느님의 말씀에서 행동의 근거를 찾기보다는 무작정 이방인들의 정치 체제를 모델로 삼았던 것이다.
원로들의 요구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판관이 아닌 다른 모든 민족들과 같은 임금을 세워달라는 것이었다. 이같은 원의가 담고 있는 것은 정치적인 안정이었는데, 그들은 지금처럼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의해 다스려지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강한 임금이 나타나 강력한 리더쉽으로 자신들을 이끌 때 더욱 더 효과적으로 나라가 번영할 수 있고 안정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 사무엘서 상권 8장 6절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모든 원로들의 왕정 요구에 대한 사무엘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
'마음이 언짢아'로 번역한 '와이예라으'(waiyerah; but displeased)는 일차적으로 '떨다'(이사15,4)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야라으'(yarah)를 원형으로 하는데, 이것은 분노나 격정에 휩싸였을 때 몸이 떨리는 것을 나타내므로, '슬프다'(1사무1,8) 또는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하다', '불쾌하다'(1사무18,8)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사무엘이 원로들이 말한 것을 언짢게 여긴 것을, 정치적 권력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무엘을 포함한 지도층과 하층 계급 사이의 대결로 본문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옳지 않다. 만약에 세속적인 의미의 정권 유지에 대한 불만이었다면 사무엘 역시 세속적인 방법들을 통해 반응했을텐데, 사무엘의 즉각적인 반응은 주님께 기도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도하였다'로 번역된 '와이트팔렐'(waithpallel; and prayed)은 계속적 '와우'(wau; and)가 사용된 단어로서,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원로들로부터 마음에 언짢은 일을 당했을 때 인간적인 대처 방법을 구하지 않고 즉시 하느님께 기도하였음을 나타내준다. 사무엘은 이러한 상황에서 믿음의 지도자가 취할 자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기도하였다'에 해당하는 '와이트팔레'(waithpallel)의 원형 '팔랄'(pallal)은 일차적으로 '기도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여기처럼 수동의 뜻이 강한 재귀형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중재(중보)하다'라는 어감을 포함하고 있다.
사무엘은 이미 이스라엘의 모든 원로들이 요구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기도했다고 보기보다는 자신의 불쾌한 감정을 자제하고 하느님께 그들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간구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이해이다.
이제 사무엘서 상권 8장 7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 백성의 요구를 다 들어주라고 명령하신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백성들의 요구가 정당했음을 인정하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왕정에 대한 그들의 요구가 인본주의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아셨지만, 백성들이 생각하고 있는 인본주의적 왕정 체제가 아닌 신본주의적 왕정 체제로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실 것이므로 이것을 허용하신 것이다.
그러나 왕정을 요구하는 그들의 근본 동기가 그릇되었음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사무엘서 상권 8장 7절 후반부에서 그것을 분명하게 지적하시며 그들을 질책하신다.
원문에는 '왜냐하면'으로 번역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ki)와 '배척하다','버리다', '거절하다'는 뜻을 가진 의미의 동사 '마아쓰'(maas) 역시 2회 반복 사용되어 매우 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특히 여기서 두 동사는 모두 완료형으로 쓰여 그들의 배반이 이미 재론의 여지가 없이 굳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강조적 문장으로, 그들의 행위가 겉으로 드러난 것처럼 사무엘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하느님의 임금되심을 배척한 것임을 암시적으로 드러내어 하느님께 대한 반역임을 분명히 했다.
<용서> 송영진 모세 신부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자,
예수님께서 그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 라는 뜻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 말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율법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6-7)"
사람을 심판하는 권한은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마태 7,1). 그래서 용서도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을 심판할 권한도 없고, 용서할 권한도
없습니다.
'심판'이란, 사람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 죄가 있다면 어떤 벌을 얼마나 내릴 것인지, 또는 용서할
것인지 하느님께서 결정하시는 일입니다.
'용서'란, "사람에게 죄가 있지만, 하느님께서 그를 꾸짖지 않고, 벌을 내리지 않고,
그의 죄를 그냥 덮어주시는 일"입니다.
지금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한다고 생각한 것은 잘못한 일이
아니고,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들을 꾸짖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은 실제로는 틀린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병자의
중풍을 고쳐 주십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기적'으로 '보이지 않는 권한'을 증명하신 일입니다.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을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같은 권한을, 즉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는 것.)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사도들에게 위임해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과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을 권한"을 모두 위임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위임'이기 때문에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죄를 용서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주님의 뜻대로만 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권한을 행사한다면 '월권행위'가
됩니다.)
사도들이 받은 권한은
후계자들에게 계승되었고,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후계자들은 주교들입니다. 신부들은 주교들의
보조자들로서 주교로부터 권한을 제한적으로 위임받아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사도의 직무 수행
말고, 형제 사이에 서로 용서하라는 가르침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에 들어
있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라는 말은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용서'는
모든 신앙인이 실천해야 할 '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도들의 권한, 또는 사도들의 직무 수행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받은 용서의
은혜를 형제들과 나누는 사랑입니다.
(권한 행사가 아니라, 사랑 실천이라는 것.)
(사도들은 교회의
직권자로서 용서할 권한과 용서하지 않을 권한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신앙인들에게는 용서할 의무만 있습니다. 지금 말한
'신앙인들'이라는 말에는 사도들도 포함됩니다.
사도들도 직무 수행이 아닌 상황에서는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형제들을 용서할 의무만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용서'는 '무죄 선고'가 아니라 '형 집행 면제' 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용서를 받은 사람 쪽에서 해야 할
'보속'은 남아 있습니다. '보속'은 '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용서의 은총'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했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보속을 할 것입니다.
(고해사제가 주는 보속은 명령이 아니라
'권고'입니다.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권고.)
회개는 용서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일 자체가 '용서'입니다.
그래서 "구원받기
위해서 회개한다."는 말과 "용서받았으니 회개한다."는 말은 사실상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보면 '무죄
선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한 번의 범죄 뒤에 이루어진 심판은 유죄 판결을 가져왔지만, 많은 범죄 뒤에 이루어진 은사는 무죄
선언을 가져왔습니다(로마 5,16)."
여기서 바오로 사도가 사용한 '무죄 선언'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 없는 사람처럼 되었다는 뜻입니다.
(죄가 있는데도 용서를 받아서 벌을
면제받게 되면, 죄 없는 사람처럼 풀려나게 됩니다. '무죄 선언'이라는 말은, 그런 뜻에서 사용한 표현입니다.)
'용서'는
하느님(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총입니다.
우리는 이 은총을 온전히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또 죄인인데도 죄 없는
사람처럼 만들어 주시는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능동적으로 회개와 보속을 실천해야 합니다.
연중 제1주간 금요일 복음 (마르2,1~12)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4~5)
'중풍 병자'에 해당하는 '파랄뤼티코스'(paralytikos; the sick of the palsy)에서 영어 단어 'paralysis'가 나왔다. 이 병은 뇌출혈(cerebral hemorrhage)등으로 몸의 일부분이나 전신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증상을 갖는다.
마르코 복음 2장 3절에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침상)에 실어서 예수님께로 옮겨졌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중풍 병자를 옮긴 사람들은 그의 종들이라고 간주하는 경우도 있고, 가족이나 친구들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 2장 5절에서 중풍 병자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치유하셨다는 구절을 볼 때, 주인의 명령에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종들은 아니라고 본다.
한편 '지붕을 벗기고'에 해당하는 '아페스테가산'(apestegasan; they uncovered; they made an opening in the roof)의 원형 '아포스테가조'(apostegazo)는 '지붕의 덮개를 벗기다'(unroof)는 정도의 뜻이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는 지붕이 평평하고 외부의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계단을 통해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었으며, 팔레스타인에 있던 서민들의 집의 지붕은 들보를 중심으로 나무들을 걸치고 짚으로 덮고 진흙을 발라 놓은 것이었기 때문에 쉽게 벗겨 낼 수가 있었다.
중풍 병자가 누운 들것을 멘 자들은 군중들이 너무 많아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려 가기 힘들자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집의 지붕으로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집의 지붕을 갑자기 벗겨 내고 구멍을 내어 들것을 내림으로써, 방 안에 모여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흙 먼지가 쏟아져 내리게 하고, 느닷없이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그 가운데로 달아내리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여기 치유 기사의 주인공이 된 사람도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데에는 '군중들'이라는 장벽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유에 대한 확신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갔고, 그 결과 중풍 병자는 질병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그들의 믿음'에 해당하는 '텐 피스틴 아우톤'(ten pistin auton; their faith)에서 '아우톤'(auton; their)은 3인칭 복수 인칭 대명사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병을 가진 당사자만의 믿음이나 반대로 그를 예수님께로 이끌고 나간 동료들의 믿음만이 아닌, 그들 모두의 믿음의 결과였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여기서 '보시고'에 해당하는 '이돈'(idon; saw)의 원형 '호라오' (horao)는 어떤 대상을 시각적으로 관찰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인지적으로 상대를 파악한다는 뜻도 갖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것은 단순히 나타난 행동 뿐만 아니라 그 마음 속에 있는 믿음도 꿰뚫어 보셨다는 뜻이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얘야'에 해당하는 '테크논'(teknon; son)은 '자녀'(마태2,18)를 가리킨다. 히브리적으로는 신적인 존재에 대한 추종자(1베드1,14), 영적인 상하 복종 관계에서의 따르는 자(에페5,8)라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서 그렇게 부르시는 것은 예수님 당신의 치유 능력을 믿고서 자신의 몸을 맡기는 믿음을 보시고 당신을 따르는 자라는 의미로 불렀다고 본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에 해당하는 '테크논, 아피엔타이 수 하이 하마르티아이' (Teknon, aphientai sou hamartiai; Son, your sins are forgiven)에서 드러난데로,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 행위는 중풍 병자의 죄를 먼저 제거함으로써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모든 병이 직접적으로 죄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의 중풍 병자는 죄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병에 걸렸으므로, 예수님께서 죄사함을 선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죄의 용서의 선포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 자신에게 죄를 사하는 권한이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해서였다(마르2,10).
원래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고유 권한이기에(시편50,1.2; 130,4; 느헤9,17; 이사1,18),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다는 것은 당신 자신이 성자 하느님이시며(로마9,5), 당신에게 죄사함의 권한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많은 병이 죄에서 비롯된다고 믿었고,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하고 말씀하시면서 중풍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정말로 믿으십니까? 이렇게 직설적으로 묻는 것은, 이미 용서를 받은 죄에 얽매여 살아가는 분들을 자주 만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많은 세월이 흘러갔지만, 아주 오래 전에 잘못한 자신의 죄를 곱씹으면서, 그 일 때문에 자기 집안에 불행한 일들이 계속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그리스도교적인 생각이 아니며,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의심을 품는 율법 학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미신적인 요소까지 끼어들어 올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라는 점도 잘 압니다. 지나간 죄가 자꾸만 우리의 발목을 붙잡기에, 그 사슬을 끊어 버리기는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의 믿음이 분명히 요구됩니다. 다른 사람과 잘못한 점에 대하여 진정으로 화해를 하고, 그것을 더 큰 사랑으로 갚으려는 노력은 좋고 아름다운 일입니다만, 이 경우에도 상대방으로부터 내가 용서받았다는 믿음이 필요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든 하느님이든, 내가 한 번 잘못했기에 나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생각은 믿음과 희망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며 하나의 유혹입니다. 이러한 유혹이 엄습해 올 때 자비하신 하느님, 용서의 주님께 믿음을 더해 주시도록 간청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