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간 목요일](2016. 1. 21. 목)(마르 3,7-12)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아녜스 성녀는 3세기 후반 또는 4세기 초반 로마의 유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열네 살 무렵의 어린 나이에 순교하였다. 청혼을 거절한 데 대한 앙심을 품은 자의 고발에 따라 신자임이 드러났으나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유약한 나이에 보여 준 그녀의 위대한 신앙의 힘’을 높이 칭송하였다. 교회는 아녜스 성녀를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증언하고자 정결을 지킨 순교자로 기억하고 있다. 성녀는 한 마리 양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표현되고 있다
전쟁에서 사울보다 더 큰 공을 세운 다윗을 백성들이 환영하자,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여 그를 죽이려 한다. 사울의 아들 요나탄은 아버지를 설득하여 그가 다윗을 죽이지 않도록 하고, 다윗은 전처럼 다시 사울 곁에서 지내게 된다.(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8,6-9; 19,1-7
그 무렵 6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죽이고 군대와 함께 돌아오자,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 손북을 치고 환성을 올리며,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울 임금을 맞았다. 7 여인들은 흥겹게 노래를 주고받았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8 사울은 이 말에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 명을 돌리니, 이제 왕권 말고는 더 돌아갈 것이 없겠구나.” 9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게 되었다.
19,1 사울이 아들 요나탄과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 요나탄은 다윗을 무척 좋아하였기 때문에, 2 이를 다윗에게 알려 주었다. “나의 아버지 사울께서 자네를 죽이려고 하시니, 내일 아침에 조심하게. 피신처에 머무르면서 몸을 숨겨야 하네. 3 그러면 나는 자네가 숨어 있는 들판으로 나가, 아버지 곁에 서서 자네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겠네. 그러다가 무슨 낌새라도 보이면 자네에게 알려 주지.” 4 요나탄은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좋게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임금님, 임금님의 신하 다윗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임금님께 죄를 지은 적이 없고, 그가 한 일은 임금님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5 그는 목숨을 걸고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죽였고, 주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임금님께서도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공연히 다윗을 죽이시어, 죄 없는 피를 흘려 죄를 지으려고 하십니까?” 6 사울은 요나탄의 말을 듣고,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다윗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 하고 맹세하였다.
7 요나탄은 다윗을 불러 이 모든 일을 일러 주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을 사울에게 데리고 들어가, 전처럼 그 앞에서 지내게 하였다.
시편 56(55),2-3.9-10ㄱㄴ.10ㄷ-11.12-13(◎ 5ㄴ)
◎ 하느님께 의지하여 두려움이 없으리라.
○ 하느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를 짓밟는 사람들이 온종일 몰아치며 억누르나이다. 적들이 온종일 짓밟나이다. 드높으신 하느님, 저를 몰아치는 자들이 많기도 하옵니다. ◎
○ 저는 뜨내기, 당신이 적어 두셨나이다. 제 눈물을 당신 자루에 담으소서. 당신 책에 적혀 있지 않나이까? 제가 부르짖는 그날, 그때 원수들은 뒤로 물러가리이다. ◎
○ 하느님이 내 편이심을 나는 아네. 하느님 안에서 나는 말씀을 찬양하네. 주님 안에서 나는 말씀을 찬양하네. ◎
○ 하느님께 의지하여 두려움 없으니,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느님, 제가 당신께 드린 서원, 감사의 제사로 채우리이다. ◎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에 계실 때, 유다와 예루살렘, 티로와 시돈 등 곳곳에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이 그분을 찾아 몰려든다. 더러운 영들은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외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을 금하신다.(마르코 3,7-12)
그때에 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8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9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10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11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목요일 제1독서 (1사무18,6-9;19,1-7)
여인들은 흥겹게 노래를 주고 받았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7)
'노래를 주고받았다'에 해당하는 '왓타아네이나'(wathaaneina)의 원형 '아나'(ana)의 기본적인 의미는 '노래하다'이다. 그러나 '아나'(ana)는 '대답하다'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왓타아네이나'는 '한쪽에서 부르고 다른 한 쪽에서는 화답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는 노래의 종류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흥겹게'로 번역된 '하메사하코트'(hamesahaqoth; as they danced; as they played; '뛰놀며')의 원형 '사하크'(sahaq)는 부정적 의미로도 쓰이는 표현이다.
즉 능동형으로 사용된 경우에는 '비웃다', '조소하다'라는 부정적 의미를 나타내고, 여기처럼 강조 능동형으로 사용된 경우에는 '악기를 연주하다', '기뻐하다'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가져, 어떻게 보면 비웃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온몸으로 즐거워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러한 독특한 표현을 통해서 이스라엘 군대의 개선 퍼레이드의 축제적 분위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한편 '수천'에 해당하는 '빠알라파이우'(baalapaiu; as thousands)는 '천'을 뜻하는 '엘레프'(ellep)의 복수형에 남성 3인칭 단수 소유격 어미가 붙은 형태로서 문자적으로는 '그의 수천명'을 의미하고, '수만'에 해당하는 '뻬리브보타이우'(beribbothaiu; his tens of housands)는 '만'을 뜻하는 '레바바'(rebaba)의 복수형에 남성 3인칭 단수 소유격 어미가 붙은 형태로서 문자적으로는 '그의 수만명'을 뜻한다.
하지만 여기서 비교되는 요소인 '천'과 '만'에 해당하는 '엘레프'와 '레바바'는 숫자적 의미 이상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히브리어에서 '레바바'(rebaba)는 '수없이 많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레바바'와 동일한 어근에서 파생된 명사 '라브'(rab)는 '무수한'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 선두에 있다는 의미로 '우두머리'라는 뜻도 가진다.
그런 차원에서 다윗이 죽인 자의 수효로 묘사된 '수만' 혹은 '만만'이라는 숫자는 보통 군인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뛰어난 '우두머리'나 행할 수 있는 용맹스러운 전과임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다.
따라서 사울은 '수만', '만만' 보다 적은 '수천' 혹은 '천천'으로 자신의 치적을 노래한 산술적 의미 때문에 노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 그 노래에는 다윗이 사울 임금보다 더 훌륭한 우두 머리라는 의미까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불쾌해 하면서 몹시 노했던 것이다.
사울이 사무엘서 상권 18장 8절에서 "이제 왕권 말고는 더 돌아갈 것이 없겠구나"라고 불편한 심기를 표현한 배경에는, 바로 본문의 내용이 왕권 혹은 왕위로 이해될 수 있는 '우두머리'라는 의미까지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은 엉뚱한 부분이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치유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여러 곳에서 많은 이들이 찾아와 예수님을 따라다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많은 이들의 병을 고쳐 주실 때, 그분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이들은 치유받은 이들이 아니라 “더러운 영들”입니다. 성서 신학적으로 말해서 치유 기적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이적이지만,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병자들이 그분이 누구신지를 깨달았는지에 대해서는 본문에도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까지 당신의 신원이 밝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에 남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명하셨지만, 사람들보다 더 영특한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더러운 영들’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들은 과연 구원을 받았을까요? 그들의 처지는, 마치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까지 물을 안 마시고 죽고 마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기에 그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앎은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지 못하고, 그들은 ‘더러운 영’으로만 머물고 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우리의 신앙은 과연 우리의 삶 안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혹시나 우리도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외치고 다니면서도, 구원과는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 않은지 오늘 하루 조용히 살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군중이 호숫가로 모여들다.>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마르 3,7-8)."
안식일 문제로 예수님과 다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마르 3,6).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마태 12,15) 호숫가로 가십니다. 이것은 바리사이들이 무서워서 피하신 일은 아닙니다. 그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더 많은 사람에게 더 자유스럽게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열린' 곳으로 가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널리 퍼져서
이스라엘과 주변 지역에서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거의 대부분 병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일 것입니다.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순수하게 메시아를 찾아서 온 사람들도 조금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마르 3,9-10)."
그때 이미, 예수님에게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아마도 사람들은 남들보다 '먼저' 예수님에게 손을 대려고 다투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랬다면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먼저 선포하기를 원하셨습니다(마르 1,38). 그래서 거룻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과 거리를 두십니다.(군중은 뭍에 서 있고, 예수님은
군중과 조금 떨어진 호수 위에 계시고.) 이것은 사람들을 밀어내신 일도 아니고, 병자 치료를 거절하신 일도 아닙니다.
사람들을 더 잘
가르치기 위해서, 즉 사람들이 '말씀의 은총'을 더 잘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가르치신 다음에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지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들의 절박한 심정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들으라는 말씀은 안 들으려고
하고, 예수님에게 손을 대는 일만 생각하는 것은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만진 사람도
있었겠지만, 믿음도 없이 기적만 바라고 만진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 관심도
없이...
또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데도 받으려고 하지 않고, 덜 좋은 것만 달라고 요구하는 모습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나쁜 것'이 아니라 '덜 좋은 것.)
'구원의 복음'이 가장 좋은 것이고, 치유의 은혜는 부수적인
것입니다. 만일에 몸만 고치고 복음을 듣지 않는다면, 건강을 되찾았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빵의 기적' 후에 예수님을
따라간 군중도 같은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그들이 배불리 먹은 일은 분명히 은총을 받은
일이었지만, 몸의 배부름만 원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가 받은 은총을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됩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이라는
말을 '썩어 없어질 몸'으로,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라는 말을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영혼'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몸'은 나이를 먹을수록 늙고 병들다가, 죽으면 먼지가 되어 사라지지만, '영혼'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몸의 건강보다 영혼의 구원을 먼저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몸의 건강은 좋은
일이고 중요한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일일 뿐입니다. 요즘 세상의 모습을 보면, 몸의 건강과 아름다움에만
너무 집착하는 것을 볼 때가 많습니다. 언젠가는 먼지가 되어서 사라질 껍데기일 뿐인데도...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11-12)."
마귀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리는 것과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라고 소리 지르는 것은 그들의 방어 전술입니다. 겉으로만 굴복하는 척 하면서
예수님의 공격을 피하고, 자기들이 계속 인간을 지배하려는 것이 그들의 속셈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신 것은, 마귀들에게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말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도 않는 마귀들이 하는 말은 신앙고백이 될 수가 없고, 글자 그대로 '마귀의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은
진리이지만, 진리는 진리 편에 선 사람이 말할 때에만 진리가 됩니다(마태 12,30).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진리의 반대편에 선
사람이 하는 말은, 그 진리를 부정하거나 비아냥거리거나 훼손시키는 말이 될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