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작가 모파상은 그가 쓴 소설 <여자의 일생>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리쏜 숙모는 어린 조카에게 하느님을 깊이깊이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얘기를 했다. 어린 조카는 작은 엄마에게 이렇게 물었다.
“작은 엄마,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나요?”
“저기 저 하늘에, 하지만 착한 하느님께서는 어디에든 계시지 꼭 교회에만 계시는 것도 아니란다.”
모파상도 그의 작품을 통해 하느님이 하늘에 계심을 밝혔다. 그리고 우리 곁에 늘 계시다는 것과 어디에든 계시다는 것도 강조했다. 그런데 우리가 구태여 우리 곁에 계시는 하느님을 교회까지 가서 만나는 이유는, 믿음을 작은 정성으로나마 증거하기 위함이며 교회가 하느님이 머물고 계시는 하느님의 집이란 점에 있다.
교회는, 찾아가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할 수 있는 기회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 그리고 기쁨을 찾게 해주는 희망의 장소가 된다. 그래서 거룩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뵙는다는 단단한 준비없이 교회를 가는 것은 교회를 찾는 의미를 퇴색시킨다.
여기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적당한가하는 고민을 하게 되지만 신앙인으로서 어머니를 언급하고 싶다. 어머니는 봉헌금으로 항상 새 돈을 준비하셨다. 만약 갖고 있는 신권이 없으면 가지고 계신 돈 중에서 상태가 좋은 돈으로 골라서 다리미로 다려서 매일미사책 사이에 넣어서 성당에 봉헌을 하셨다. 주일 봉헌금을 정성없이 준비하는 것이 싫어서라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 주일미사를 가실 때는 꼭 목욕을 하셨다. 그리고 갖고 있는 옷 중에서 상태가 제일 좋으면서 단정한 옷을 입으셨다. 주일날 입고 계셨던 옷은 예쁜 옷이나 값비싼 옷을 의미하진 않는다. 유명 메이커가 만든 옷도 아니다. 하느님을 만나는데 결례가 되지 않는 정도의 옷을 뜻한다.
하느님이 보시고 기뻐할 수 있는 옷이면 된다. 깨끗하게 다음어진 옷이면 충분하다. 깨끗한 몸으로, 깨끗한 옷차림으로, 하느님 앞에 나가 하느님을 뵙는다는 것은 허영으로 사치를 풍기는 태도와는 거리가 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대하는 당연한 모습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고 기쁨을 찾게 되는 거룩한 교회를 드나들면서 마음과 외모가 준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그런 일들이 습관이 되어서 반복이 되면 자신의 믿음에 흠결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동안 몰라서 아니면 알면서도 그런 행동을 반복했다면 지금부터라도 바꾸어 나가는 것은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