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위령성월이다. 발 아래 뒹구는 낙엽을 보니 죽은 영혼들을 생각하는 위령성월이 11월인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떨어진 낙엽은 거름이 되어 새봄에 새순으로 생명을 다시 얻듯 비록 육신은 땅에 묻히지만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됨을 11월의 늦가을에서 배운다. 죽은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성월을 맞으며 자신의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도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장자의 아내가 죽자 친구인 혜자가 조문을 갔다. 그런데 장자는 편안히 앉아서 장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자가 놀라 물었다.
“자네의 아내는 자네와 평생을 같이 살았고 함께 자식을 낳아 길렀으며 자네를 위해 살다가 늙었고 죽지 않았는가? 그런 부인을 두고 곡을 하기는커녕 장구를 치며 노래까지 하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장자가 대답을 했다.
“친구여, 아내가 죽었는데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금 내 아내는 천지라는 거대한 방안에서 편안히 잠자려는 것이니 내가 시끄럽게 곡을 하기보다는 기쁘게 축원해 주어야 옳지 않겠는가?”
이 이야기를 듣고 보니 장자는 우리가 믿는 부활에 대한 신앙은 없었지만, 죽음은 단지 끝이 아닌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안목을 갖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영원한 삶으로 건너가는 과정이고 부활의 문이며,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한한 인간이기에 삶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이 있더라도 그것을 현세의 눈으로 볼 수 없기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슬픔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좋은 때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또 자신을 부르신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죽음은 사랑했던 사람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줄 수 없게 만들지만, 우리 대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해주심을 믿으면서 슬프지만 평화로운 마음으로 받아들어야 한다. 울음 보다는 부활의 노래를 부르면서, 지상에서 그와 함께 나눌 수 있었던 모든 것에 대해서도 감사드려야 한다. 죽음은 우리를 만드신 하느님께로 돌아가 우리의 온 존재를 그분께 내맡기는 행위다. 죽음을 통해서 하느님은 우리를 온전히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신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