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신체는 참으로 신비하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몸 안에 있는 것도 신기할 뿐만 아니라 기능도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사람의 신체 기능은 한쪽 기능이 없어지거나 약해지면 다른 기능이 더 강해지고 발달한다. 눈이 멀어 앞을 못 보게 되면 사람의 청력은 전 보다도 훨씬 발달하게 된다.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는 것을 귀로 들어서 보충하려는 본능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처럼 자신의 나쁜 점을 보는 눈이 어두운 사람은 그 대신 이웃의 나쁜 점을 듣는 귀는 밝다. 자신의 단점을 충고하는 말을 잘 듣지 못하는 사람은 그 대신 이웃의 단점을 잘 본다.
재판을 하는 법정에서는 서로 다른 세 부류의 사람이 죄인을 상대로 자기 주장을 한다. 죄의 결과만을 보고 준엄하게 단죄하려는 검사와 정상을 참작해서 용서하자는 변호사와 죄를 공정하게 판결하려는 판사가 있다. 검사의 역할은 가능한 죄를 캐내어 처벌하는 것이다. 정상 참작이나 사건의 앞뒤를 보기보다는 그 자체 행동 만을 단죄한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죄를 밝혀내 판사에게 형을 가하라고 부추킨다.
변호사는 결과만을 보지 않고 정상을 참작해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최대한 죄인의 입장에서 말한다. 그리하여 가능한 한 죄가 없음을 증명하고, 혹시 죄가 있다면 죄를 가볍게 하려고 갖은 노력을 한다. 가능한 판사에게 선처를 부탁한다.
판사는 검사와 변호사의 서로 다른 의견을 충분히 듣고 나서 객관적이고 공평하게 판결을 내리려한다.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있는 죄를 없다고 하거나 무거운 죄를 가볍게 만들지 않도록 그야말로 공정하게 사실에 입각해서 진실대로 처리한다.
법정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항상 일어난다. 어떤 사람은 이웃을 볼 때 검사처럼 나쁘게만 본다. 이웃의 단점과 결점 만을 들추어내어 나쁘다고 판단하고 단죄한다. 어떤 사람은 변호사처럼 이웃을 좋게만 본다. 혹시 나쁜 결과가 나왔어도 정상을 참작하고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고려하여 좋게 보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판사처럼 객관적으로 진실에 다가 서려고 노력한다. 사실보다 더 나쁘게 보지도 그렇다고 더 좋게 보지도 않으려한다. 나쁜 점만을 들춰내지도 않지만 좋은 점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이 세 사람 중 어디에 속할까요? 검사처럼 이웃의 나쁜 점을 보나요? 아니면 변호사처럼 이웃의 좋은 점을 보나요? 아니면 판사처럼 이웃의 장점과 단점을 있는 그대로 볼려고 노력하나요? 예수님께서는 루카복음 6장 42절을 통해서 당신의 속내를 분명히 말씀하셨다. ‘자신의 허물을 먼저 보고 남을 판단하라’고 하셨다. 사실 판사처럼 이웃의 잘못을 정확히 보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검사처럼 이웃의 잘못만 보거나 변호사처럼 이웃을 좋게만 보는 경향이 있다. 만약 나 보고 고르라면 판사처럼 볼 자신이 없다면 검사보다는 변호사처럼 사람을 좋게만 보는 시각을 선택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