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2일] 영적 소경

2022. 9. 23. 오전 8:5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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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다보면 각 도시마다 재미있는 역사와 설화들이 있다. 그 중에 이스탐불은 도시가 동서양에 걸쳐있어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이천 년 넘는 세월동안 세계 역사에 중심지였다. 이스탄불, 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에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고대 그리스의 ‘비자스’라는 왕자가 델포이 신전에서 사제들에게 신의 자문 받아서 오랫동안 번성할 도시를 점지해 달라고 했다. 

그때 신탁을 받은 사제들이 “눈 먼 자의 도시의 반대편에 도시를 세워라”라는 말을 전했다. 그러자 그는 살기 좋은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섰다. 마친 보스포루스 해협을 끼고 있는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좋은 서쪽이 아니라 동쪽에 사람들이 자리 잡고 살았다. 마치 소경이 좋은 것을 앞에 두었지만 보지 못해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입지 조건이 좋은 땅을 알아보지 못하고 조상대대로 그곳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들은 좋은 땅을 앞에 두고도 그 가치를 못 알았기에 소경으로 비유 된 것이다. 


성서에서도 앞을 못 보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내용이 나온다. 그러면서 눈을 뜨게 된 사람들에게 이젠 영적인 눈을 뜨라고 암시해주신다. 

우리는 육체적인 눈은 멀쩡하지만 영적으로 눈먼 소경의 삶을 살아갈 때가 많다. 사물이 눈에 보인다고 해서 영적인 것까지 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눈을 뜨고 사물을 보면서도 그 뜻을 모르는 사람을 우리는 ‘맹’이라는 글자를 붙여 부른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문맹’, 컴퓨터를 모르는 사람들을 ‘컴맹’이라고 부른다. 꼭 ‘맹’을 붙이지 않아도 그림에 대한 안목이 없는 사람을 그림을 보는 눈이 없다고 하고, 사람에 대해서 잘 속고 그 사람의 가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사람 보는 눈이 없다고 표현하다. 영적인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이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은 하느님을 보는 눈이 없는 사람이고, 신앙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신앙의 눈이 먼 사람이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도 젊은 시절 방탕한 삶을 회개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눈을 뜬 후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동안 흔하게 보아왔던 꽃과 나비, 새들, 태양과 자연의 모든 사물들이 저마다 새롭게 다가왔다고 한다. 그동안 일상으로 보아왔던 것들이 하느님의 시각으로 볼 때 더 아름답고 소중해 보이기 시작한다. 신앙도 이와 같아서 신앙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면 그게 소경의 삶을 사는 것이다. 


추운 날씨에 자동차 유리창에 성에가 끼여 창밖을 볼 수 없다면 운전을 못한다. 그럴 때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에를 제거한다. 그렇다면 세속적인 욕심 때문에, 세상의 즐거움 때문에 마음에 성에가 끼어서 하느님이 보이지 않고 진리와 구원의 삶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얼마나 방해물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가? 혹시 사물이 눈에 보이지 않는 만큼의 답답함을 갖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당장의 내 삶 속에서 불편함은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하면서도 신앙 안에서 답답함은 소극적으로 해결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다면 어떤 마음이 드실까? 를 생각해보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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