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도나토 한형곤입니다. 지난 일요일 대림2주일을 맞아 4동성당에서 했던 대림특강 내용을 올립니다. 그날 듣지 못했던 형제자매님들의 요청이 있어 부족하지만 올렸습니다. 함께 은총을 위해 기도한다는 마음으로 일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소서, 주 예수여!
+찬미 예수님
형제자매님들,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치3동성당에서 온 도나토 한형곤입니다. 그동안 몇 차례에 걸쳐 배도동 안드레아 신부님으로부터 특강 제안을 받았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이제야 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을 뵙게 되니 반갑기 그지없고 오기를 참으로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신부님은 제가 참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이십니다. 저희가 3동성당으로 분당되어 나가기 전까지 저 성가대 뒷자리에서 비록 어설픈 소리로나마 주님을 찬양하는 입장이었고 또 그렇게 지내는 가운데 신부님도 자주 뵐 수 있었습니다. 4동성당은 저에게 고향성당 같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훌륭하신 여러 형제자매님들과 박식하기로 소문난 안드레아 신부님 앞에서 강론한다는 것이 매우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도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신 것을 매우 고맙고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몇 말씁 드리겠습니다.
I. 대림의 의미
우리는 지금 성탄을 앞두고 있습니다. 빛이며 구원이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참의미를 생각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성탄절을 기다리는 희망의 기간입니다. 예수라는 이름, 우리와 함께 하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당신께 알렐루야 외치며 환영의 인사를 올리고 싶은 우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변화시켜서 거듭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어떠한 변화를 우리에게 심어주시고 또 어떠한 힘을 주실지 날마다의 기도 속에서 깊이깊이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께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다가서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은총의 빛살이 정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림기간을 보내면서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기도하는 가운데 저희 인간의 의지가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자리매김 하기를 소망합니다.
동지섯달 길고긴 밤으로 이어지는 나날들, 춥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겨울밤들이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예정되어 있지 않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기다림의 의미가 더더욱 크고 간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둠 속에서 오시지만 빛으로 오시며 우리에게 빛의 행동을 요구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좇아 살아갈 수 있을까, 이를 곰곰 생각하고 묵상하며 기도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각오를 굳게 다지며 대림기간을 보내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해보는 것입니다.
II. 역경 넘어 희망
요즘은 경제난이다 금융위기다 하여 어수선하고 힘든 분위기입니다. 여러분도 많이 힘드시지요? 막막하고 답답하기 그지없어서 마치 캄캄한 한밤중 들판에 버려져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행여 좋은 소식이 있을까 하여 신문을 뒤적이고, 라디오나 TV 앞에 앉아봅니다만 아직은 이렇다 할 낌새가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참으로 견디기 힘든 나날이 연속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그래도 이제 곧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 신자들에겐 위안이 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예수님 만날 기쁜 마음으로 근심이나 걱정일랑 내려놓고 대림절을 보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주님을 만나려는 소망이 있고, 또 그러기에 우리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이는 곧 대림기간에 받을 수 있는 은총이기도 합니다.
이탈리아에는 아름다운 도시가 참으로 많은데, “꽃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 피렌체도 그중 하나입니다. 르네상스 문화를 활짝 꽃피운 이 도시에 메디치라는 위대한 가문이 있었는데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예술을 진흥시켜 오늘에 이르도록 전승시킨 위대한 가문이었습니다. 그 가문의 수장격인 인물이 로렌초 대제였습니다. 정치가이면서 문예에도 탁월한 제주를 가지고 있던 로렌초 대제는 많은 시를 썼고, 그중의 하나가 풍요와 포도주의 신인 “바카스의 찬가”로서 많이 애송되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시구가 있습니다.
청춘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데 사뭇 달아나고 있구나.
누구나 즐거워지고 싶거든,
그렇게 될 지어다,
내일에 대한 확실성이 없으니.
그렇습니다. 내일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데 걱정은 해서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일단은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표정이 밝아집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 하지요? 찡그리고 다니는 사람들에겐 돈도 빌려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밝은 표정에서 이웃들을 감동시키는 효소가 나오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나 자신에게도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젊은이들은 “내일은 울망정 오늘은 노래하자”라고 합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라는 우리와 비슷한가요? 아무래도 좋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엔,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할 일은:
1. 밝고 기쁜 표정 - 마음의 창
2. 난관 극복하겠다는 의지와 희망
3. 긍정적인 언행 - 자신감
아무튼 우리는 지금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어려움에 처해지면 유혹에 빠지는 수가 허다합니다.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일지라도 모르는 사이에 악마의 덫에 걸려들기 쉽습니다. <집회서> 25장에 “인간은 나약해서가 아니라 그 나약함에 굴복해서 죄를 짓는다.”라는 말씀이 있더군요. 약해지는 마음은 절대 금물이라 생각합니다. 상황이야 사뭇 달라졌지만 10년 전의 외환위기 상황을 극복하면서 우리는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터득한 바 있지 않습니까? 그 노하우에 바탕을 두어 사랑하는 이웃들과 힘을 합치면 보다 더 쉽게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이럴 때 우리 모두에게는 가져야 할 마음이 있습니다.
1. 서로 이해하는 마음 - 토라지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역지사지”의 마음
2. 서로 보듬어주는 마음 - 행여 싸움을 했더라도 따지지 말고 먼저 사과하는 마음
거기에다 우리에겐 또 희망이 있잖은가요? 빛이요, 선이요, 축복이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희망, 그 희망 속에서 죄를 짓지 아니하고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을 보다 더 확고히 하기 위하여 묵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III. 고전의 가르침
저는 개인적으로 어려움에 처할 때나, 특별한 의미가 주어진 날들, 즉 성탄 이브나 12월31일 제야나 제 생일 등등 이런 날에는 그날을 기념해서 좋은 책을 읽는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 출간된 책을 사서 읽기도 하고 때로는 예전에 읽었던 책을 꺼내어 다시 읽거나 혹은 그에 대해서 깊은 명상에 잠겨보기도 합니다. 금년처럼 어려운 사정으로 마음이 산란할 때 저에게는 <성경>의 “욥기”나 단테의 <신곡> “지옥편”이 좋은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단테의 작품은 어려운 시기에 직면할 경우 거의 빼놓지 않고 꺼내드는 책인데, 저에게는 너무나 큰 가르침을 주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신곡>이라는 작품. 이탈리아의 유명한 시인 단테라는 분의 작품인데 여러분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그는 1265년에서 1321년까지 살았던 시인, 아니 시성인데 그가 남긴 <신곡>은 너무나 유명한 고전명작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대체 고전이란 무얼까요? 시대를 초월해서 우리 인류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준 수준 높은 작품이라는 등 여러 가지 정의가 있겠지만, 그건 너무 학문적인 설명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될지 몰라도 고전이란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단테의 <신곡>뿐만이 아니라, 괴테의 <파우스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쉐익스피어의 작품들, <논어>, <장자>,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등등은 너무나 유명한 고전작품들인데, 이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1. 누구나 다 좋은 작품이라 말한다.
2. 누구나 다 읽어보려고 시도한다.
3. 누구도 끝까지 읽어내진 못한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그런데도 그런 고전연구를 전공으로 정하고서 평생토록 연구하고 강의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저와 같이 조금은 덜떨어진 사람이 아닐까요?
배신부님께서는 단테의 <신곡>에 대해 강의해 주실 것을 당부하셨지만, 여기서는 간단한 소개로 그칠 수밖에 없겠습니다. 아무튼 단테의 <신곡>은 종교문학으로서 우리 카톨릭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1300년대 초에 집필된 <신곡>은 우리 카톨릭교리에 바탕을 두어 죽음 이후에 인간의 영혼이 가보게 될 “지옥”, “연옥”, “천국”을 순례하는 일종의 신앙적 환상여행기라 할 수 있습니다. 시인 단테는 이 환상여행 속에서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죄와 벌의 속성을 자세히 따져보고 그 죄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필연코 수행해야 할 구체적인 의무를 숙지시키고, 연옥이라는 곳에서 사함을 받고난 다음에도 아직 남아있는 미세한 찌꺼기 즉 잠벌까지도 깨끗이 정화한 다음 영원한 구원과 축복의 세계인 천국으로 올라 자애로운 성모님의 보살핌 속에서 하느님의 빛을 관상한다는 것입니다.
단테는 인생의 중반, 즉 35세에 이르렀을 때,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아다보게 됩니다. 어두운 숲속에서 길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두운 숲이란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를 이르고, 올바른 길이란 선의 길이요, 하느님께서 가르쳐주신 구원의 길입니다.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며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저 높은 산꼭대기에 한 줄기 빛이 비치는 것입니다. 시인은 저 높은 곳, 그 찬란한 빛을 향하여 나아가고 싶어 발길을 옮기려는 순간 무서운 맹수 세 마리와 마주치게 됩니다. 온갖 무서움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공포에 질려 있는데 사나운 짐승들은 단테를 가로막은 채 으르렁대고 있습니다.
경기침체, 금융위기, 핵위협 등의 험악한 현실 속에서 불안하기 그지없는 우리네 입장과 다를 게 없을 것입니다. 비극적인 상황이지요. 이런 상황에서는 모든 가치기준이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가다듬고 극복의 희망과 의지를 가져야 하는 것은 단테나 우리나 마찬가집니다. 단테는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 높은 곳의 빛을 향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지금 주님을 기다리며 어려운 현실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소망하고 기도하고 있는 우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 모든 길과 그 모든 방법으로
나를 속박에서 자유에로 이끄신 그대,
모든 것을 이루시는 힘을 지니셨습니다.
그대의 너그러움을 내 안에 간직하여
그대가 건강히 치유해준 나의 영혼이
그대 뜻을 따라 육체에서 풀려나게 하소서.
<천국편> 31곡 85-90
(베아트리체에게 보내는 노래이지만 성모님을 향한 기원이기도 합니다. 베아트리체는 영원한 여성입니다. 문학적 상상에 의한 인물이지 실존한 여인은 아닙니다. 시인에겐 산타 마리아의 의미로 다가오는 선의 총체로서 하느님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신곡>에는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 등 세 편의 시편이 각각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또한 각편은 33곡으로 되어 있고 전 작품의 서곡에 해당되는 곡이 첨가되어 있으니 모두 100곡으로 되어 있는 정형시입니다. 3이라는 숫자가 전반적으로 강조되는데 이는 곧 우리 천주교 교리의 3위1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설명드린 바와 같이 시인 단테가 35세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인생을 돌아다보니 죄가 많고, 또 자신이 살고 있던 현실사회가 타락하고 부패했던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나는
어두운 숲 속에 처해 있었다.
아, 거칠고 사납던 이 숲이
어떠했노라 말하기 너무 힘겨워
생각만 하여도 몸서리쳐진다.
“지옥편” 1곡 1-6
이를 벗어나서 올바른 선의 길로 나아가 하느님의 구원을 받고 싶은데 세 마리의 짐승에게 가로막혀 난관에 봉착했다고 했지요? 세 마리 짐승은 표범과 사자와 늑대인데, 이들은 과연 무엇을 상징할까요?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속성이라 하겠습니다.
1. 표범(부절제) - 경기침체 - 의지의 결핍=애욕, 탐욕 및 폭식, 인 색과 낭비, 분노
2. 사자(폭력) - 금융위기- 사랑의 결핍=이웃에 대한 폭력, 자신에 대한 폭력, 하느님과 자연에 대한 폭력(이교도)
3. 늑대(사기-악의와 배반) - 핵위협 - 신뢰의 결핍=(1)유혹하는 자, 아첨군, 고성죄인, 요술쟁이와 점장이, 탐관오리, 위선자, 도둑 놈, 사기꾼 정치가, 분열주의자, 위조범들
(2)친족배반자들, 조국을 배반한 자들, 손님을 배반한 자들, 은 인을 배반한 자들
단테가 본 지옥이란 어둠과 증오와 영원한 저주의 세계입니다. 성모님의 뜻에 따라 베아트리체의 도움으로 영겁의 세계를 벗어나 구원에 이르기 위해 정죄와 희망의 왕국인 연옥(Purgatorio)을 순례합니다. 연옥에는 구원은 받았으나 천국에 들어 올림을 받기에는 부족한 영혼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시인이 그 다음에 순례하는 곳이 천국(Paradiso)입니다. 천국은 빛과 춤과 찬가가 넘치는 완전한 환희와 덕성이 풍성한 축복의 나라입니다.
그러니 맹수들을 만나 벌벌 떨고 있는 단테도 굳은 의지로 사지에서 벗어나려 하는데, 우리에겐 든든한 빽이 있잖은가요. 그 영원한 후원자이신 하느님이 계시니 초라한 마음으로 지낼 것이 아니라 그분께 의지하며 이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 은총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또 그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IV. 더불어 사는 지혜
그러기 위해 일단은 우리 모두 이제 곧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러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금년도 4동성당의 사목목표에 “더불어 한 마음”, “나보다도 우리”라고 되어 있고 3동성당은 “기도하는 성당”, “함께하는 신앙생활”로 되어 있는데 다분히 서로 통하는 사목지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 이웃을 위해 따스한 위로의 마음으로 내가 먼저 손을 내밀고
2. 작은 일에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3. 나를 믿게 하려면 먼저 이웃에게 신뢰감을 보내면서 우리들 사이에 맺어진 풍요로운 인간관계 속에서 “더불어 한 마음”으로 “함께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으로 풀이하면 어떨까요?
그러기 위해서 나부터 이웃에 대해 좋은 생각들을 가져야 하고 그 생각들은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각에 불과합니다. 미안한 일이 있으면 지체 말고 빨리 사과하며, 용서할 일 있으면 아낌없이 용서하고 감사할 있으면 정중하게 표현해야 하겠습니다. 표현되면 다짐이 되고 다짐은 곧 행동으로 옮겨집니다. 이와 같은 일은 가정에서부터 실행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강남은 교육의 중심지라 합니다. 그러나 나는 교육의 중심지 보다는 사랑의 중심지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족간의 사랑이 무엇보다도 우선합니다. 부모가 그렇게 사랑하고 섬기며 서로를 배려하고 사이좋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학교나 학원에서 배울 수 없는 고귀한 것들을 자연스럽게 배우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사랑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법이지요. 사랑. 참으로 중요합니다. 단테가 <신곡> “천국편” 33곡에서 성베르나르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동정녀 어머니, 당신 아들의 따님이시여,
어느 피조물보다 더 겸허하시고 높으신 분이시여,
영원한 성지의 확고부동한 끝이시여,
당신은 인간의 본성을 고귀하게
높이신 분이기에, 창조주께서 스스로
피조물이 되시는 것을 꺼려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복중에 사랑이 불타올랐고 그 사랑의
뜨거운 열기를 통해서 이 꽃이 이토록
영원한 평화 안에 싹을 틔울 것입니다.”
<천국편> 33곡 1-9
성모님 가슴 속에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를 이어주는 불같은 사랑이 있고, 천국에서는 성모님이 곧 찬란한 사랑의 빛이라고 찬미하면서 하느님을 완전히 깨달을 수 있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단테는 <신곡>에서 구원을 위한 기도를 갈구합니다. 구원이란 결국 하느님과의 일치를 의미하며, 그 일치를 위한 필수요건이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인간은 저마다 자유의지를 부여받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자유의지가 무한한 자유의 틀 속에서 활보할 수만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의지와 부합하는 한도 이내에서 그 자유는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단테는 산타 마리아를 바라봄으로써 하느님께 향한 마음과 소망을 키우고 마침내는 하느님의 빛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완전하게 인식하는 것 자체가 최상의 즐거움이요 최고의 행복입니다. 단테는 하느님의 빛을 바라보고 그 자신이 마침내 그 빛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얻게 되는 환희를 명료하게 정리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직접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분이 발하시는 빛을 바라볼 뿐입니다. <탈출기> 33장에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가 없다”라는 경고성 언급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소망의 목적” 즉 하느님께 가까워졌다고 보았을 때 우리 자신 안에 자리하고 있는 “소망의 열정이 마무리”짓는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거듭나야 할지에 대하여 묵상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합니다.
끝으로 오래 전에 “기도”라는 제목으로 시를 한 편 쓴 일이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한 동안 냉담하다가 다시 돌아온 심정을 나타낸 것입니다. 여기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여러분이 올리는 기도에도 주님의 응답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기도
기다림의 세월은
아무런 기약일랑 남기지 않고
자꾸만 물결 따라 흘렀습니다.
까닭 없이 돌아선 뒤에도
때때로그리움이 안으로 감돌았지만
감동의 눈물은 없었습니다.
믿음과 소망이 소곤거릴 때,
당신은 이 두 자매 껴안아
사랑과 이어 주었습니다.
깊어가는 어둠이기에
당신은 더더욱 빛났고
오래만의 우리네 만남,
다시는 헤어짐 없을 우리 만남이
주름진 마음의 자락
곱게 펼쳐 주리라 기도합니다.
예수님 오실 날 여러분 모두에게 축복이 내리시길 간구하면서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묵시록> 맨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약성경> 맨 마지막 구절입니다.
<“내가 곧 간다” 하시는 말씀에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주 예수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이 말씀 속에 강림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 모두의 바램이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우리 몸에서 힘을 빼고 있는 그대로 보여드립시다. 자, 우리 모두 큰 소리로 함께 외쳐봅시다 “오십시오, 주 예수님!”
영광송으로 저의 말씀을 마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08.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