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2부 1권 와닿은 구절 찾기
22쪽 : 옛날에는 말 없이도 다스러졌던 여자가 어느새 거인이 되었고 사내는 힘 잃고 이 빠진, 천부의 자긍심만은 잃지 않으리라 몸부핌치는 한 마리의 늙은 사자, 월선이로 인한 사랑의 투정이라면 얼마간의 연민도 가질 수 있는 용이였다. 그러나 비참했던 이력 때문에 버림당하지 않는 것만이 살 길인 줄 믿었던 지난날의 임이네는 아니었다. 남편 없어도 돈 있으면 산다는 배짱이었다.
32쪽 : 길상은 얼굴을 반듯하게 쳐들고 지나가는 것이지만 목덜미는 벌겋게 물든다. 노상 젊은 여자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젊은 여자뿐만 아니라 용정촌에서 길상을 탐내는 사람은 많았다. 스물여서, 총각 나이론 늙은 편이지만 말수가 적고 어딘지 모르게 근심띤 톡특한 표정은 사람의 마음을 끌리게 한다. 대부분 두만강 연변에서 일찍부터 건너온 이곳 사람들은 남도 사람들처럼 반상을 가리는 기풍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해서 길상이 비록 하인의 신분일망정 준수한 외모와 침착한 행동거지, 학식도 녹록잖게 들었다는 점에서도 좋게 생각들 하는 것 같았다. 자연 혼담이 생기고 유복한 집안에서 딸을 주겠다고 자청해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웬 까닭인지 서희는 완연하게 불쾌해하는 낯빛이 되었다.
54쪽 : “과일도 익어야 제맛이 나고 곡식도 알이 차야 먹을 것이 있는 법이야. 너는 아직 익지도 않았고 알이 차지도 않았다.” (이동진이 아들 이상현에게 하는 말)
69쪽 : “원초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첫째 부정(不淨)한 마음을 갖지 말라. 그런 다음은 인내이니라. 풀뭇간에서 땀을 흘리는 대장장이도 부정하고 인내 아니한다면 어찌 서릿빛 칼을 만들겠느냐? 하물며 부처님께 발원하여 장엄하는 그림을 부정한 마음으로 인내하는 마음 없이 어찌 그리겠느냐? 청정한 마음으로 인내, 만 번 인내 속에 한 번쯤 기쁨이 오느니, 그것이 법열(法悅)이니라” (원초스님이 길상에게 해 주었던 말 회상)
202쪽 : “천천히 먹어. 체하면 안 돼.”(길상이 옥이에게 한 말)
산새는 산에 두어 자연의 섭리에 맡길 일이었다. 병이 났다 하더라도 어미에게는 병에 대한 처방이 있었을 게 아니냐. 그러고 보면 살려야 한다는 마음이 죽인 결과가 되었다. 때에 따라서 애정이란 이렇게 참혹한 것일까? 길상은 술을 마시며 옥이를 바라본다.
212~213쪽 : 여전히 강한 자긍심과 어릴 적부터 익혀온 당당하고 의젓한 언행에는 변화가 없었다. 사람들은 서희의 그런 태도를 당연지사로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그가 짊어지고 온 문벌도 문벌이려니와, 타고난 미모도 미모려니와, 사람들은 무엇보다 이미 거상으로 군림하게 된 그의 재력을 두려워했고, 그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대담하고 결단성에 넘쳐 보이는 그 저력에 한풀 꺾이고 마는 성싶었다.
214쪽 : ‘내 원수를 갚기 위해선 무슨 짓인들 못할까보냐, 내 집 내 땅을 찾기 위해선 무슨 짓인들 못할까보냐, 삭풍이 몰아치는 이 만주 벌판까지 와가지고 그래 독립운동에 부화뇌동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될 수는 없지. 그럴 수는 없어. 내 넋을 이곳에 묻을 수는 없단 말이야! 원수를 갚을 수만 있다면 내 친일인들 아니할손가? 아암요, 이 부삭댁 서방님, 친일파 절에다가 나는 시주를 했소이다......중략.... 내 돈이 아까워 군자금을 아니 낸 건 아니었소. 당신네들에게 협력을 한다면 나는 내 희망을 버려야 하는 게요. 나는 원수의 힘을 빌려 원수를 칠 것이요....중략... 내가 써야할 군자금이 마련되는 그날 나는 돌아갈 것이오. 그리고 싸울 것이오. 내 원수하고, 섬진강 강가에 뿌린 눈물을, 내 자신에게 한 맹세를 나는 잊지 않을 것이오. 이 원을 위해 서방님을 잊어야 한다면 내 골백번이라도 잊으리다.’ (서희가 이상현을 생각하며 한 독백)
229쪽 : 권필응 씨 그분은 훌륭하다기보다는 무라 했으면 좋을까? 허름한 옷차림 속에, 찌들고 주름진 속에 지혜와 열정과 용기의 영롱한 구슬을 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그 눈은..... 슬픔과 통곡과 무서운 결의와, 그럼에도 맑디맑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송장환이 권필응에 대해 하는 말)
264쪽 : 우리 좀 적게 먹지 하며 퍼주기를 잘하는 공노인댁이요, 공 노인 역시 돈 떨어진 나그네 그저 재워주고 먹여주고 일자리 마련해주고, 그의 말대로 그것은 당연지사로 알고 있었으니 장 밑에 돈이 모일 까닭이 없다.....중략.... 공 노인은 간도 땅의 조선사람들을 수풀에 앉은 새로 봤을 것이다. 뿌리를 박을 수 없는 남의 땅, 제비는 제비끼리, 물오리는 물오리끼리 날듯, 철 따라서 무리지어 떠날 때 날개 하나만 믿고 떠나듯이 공 노인은 방랑의 자기 생애에서 용정 땅을 반드시 종착역으론 생각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방랑자에겐 많은 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310쪽 : 용이 머릿속에 불현듯 십 년 전의 일이 떠오른다. 날마다 마을에서 송장이 나가던 무서운 그 해,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스러지던 황막한 시기를 살아남았을 때 용이는 방종과 무기력의 수렁에서 기어나와 자기 자리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번에는 용정을 휩쓸고 지나간 화재 뒤끝의 폐허 속에서 생활에 순응하던 구역질나는 자기 자신과 작별할 수 있었다.....용이는 잘게 갈라졌던 신경이 굵게 뭉쳐지면서 메말랐던 바닥에 물이 고여드는 것을 깨닫는다. 사내로서의 자부심이 풍요한 사랑의 물길이 되어 흐르는 것을-용이는 월선의 체취를 강하게 느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