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

2014. 6. 15. 오후 9:52:29

글자

제가 쓴 소논문이에요... 이 글은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을 읽고 쓴 것입니다.

한국 현대시에 드러난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연구

-박형준 ⁃ 오규원 시를 중심으로

                       목 차

Ⅰ. 들어가며

Ⅱ. 몽상의 시학이 드러난 한국 현대시

1. 몽상에 대한 몽상, 말의 몽상가

1) 낱말의 몽상

2) 오규원과 박형준의 시에 드러난 말의 몽상

2. 몽상에 대한 몽상, 아니무스와 아니마

1) 아니무스와 아니마

2) 박형준과 오규원의 시에 드러난 아니마

3.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

1) 어린 시절의 몽상

2) 박형준 시에 드러난 어린 시절의 몽상

4. 몽상가의 코키토

5. 몽상과 우주

Ⅲ. 나오며

※ 참고문헌

 

Ⅰ. 들어가며

본 연구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을 현대시에 접목해 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바슐라르는 시학의 대가로서 물질의 4원소 (불・ 물・ 공기・ 대지)에 대한 상상력을 각각 연구한 바 있다. 즉, 불의 정신분석, 물과 꿈, 공기와 꿈, 대지와 의지의 몽상, 대지와 휴식의 몽상을 통해 물질적 상상력, 질료적 상상력, 현상학 등을 이론화 시킨 사람이다. 사람에게 상상력이 없으면 생명은 유지될 수 있으나 제대로 살아 있는 생명이라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슐라르가 정립한 상상력 이론과 몽상의 시학은 우물 속 저 밑바닥 너머의 새로운 우주가 연결되어 있으리라는 옛 이야기가 현실화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나아가 그의 저술은 팍팍한 기계 문명 속의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만드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사람이 생존하기 위한 필수 조건인 4원소에 상상력을 접목했기 때문에 사람이 생존하는 순간순간이 모두 그의 시학과 관계를 맺고 있다 하겠다. 여기에 자연은 존재 이상의 가치로 옆에 늘 함께하고 있다. 마치 호흡처럼 절대자처럼 사랑으로 공존한다.

연구자가 바슐라르의 시학 중 <몽상의 시학>을 선택한 이유는 비교적 나중에 쓴 저서이고 앞에 이미 말해 온 것들을 뛰어 넘는 무언가가 있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연구자가 관심 있는 시인의 경향이 몽상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시를 습작하는 연구자 역시 몽상의 시학이 가장 어울리는 경향이라 생각하여 이를 연구하게 되었다.

<몽상의 시학>은 몽상을 위한 몽상-말에 대한 몽상, 몽상을 위한 몽상-아니무스와 아니마,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 몽상가의 코키토, 몽상과 우주 등 다섯 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서론에서 충분히 전체적인 이야기를 담아 설명하고 있다 하겠다.

낱말이 생명력을 갖고 사람처럼 시인에게 간택되기를 기다린다거나, 낱말이 짝을 이루어 외롭지 않으려고 한다거나, ‘아름다운 낱말은 이미 치유제’ 라는 언급은 바슐라르만의 독창적인 시학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독자는 시어를 선택할 때 좀 더 곰곰이 생각할 힘을 얻게 되고, 시어들이 공중에 그냥 오가는 것 같아도 틀림없이 그들도 진정한 주인을 만나기를 기다리고 몽상하는 생명력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연구자는 여기에 박형준과 오규원 시인의 시 중에서 낱말의 몽상과 관련된 시를 적용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어서 바슐라르가 말하고 있는 몽상을 위한 몽상 두 번째는 ‘아니무스와 아니마’이다. 아니무스는 로고스나 남성에 가깝다면 아니마는 파토스와 여성에 가깝다. 바슐라르는 여기서 아니마적 몽상을 적극 주장하고 있다. 즉 느림, 평온함, 두 번 읽기, 천천히 읽기, 따스함 등을 대변하는 아니마를 몽상하며 시를 쓰거나 시를 읽기를 희망하고 있다. 앞서처럼 연구자는 아니마의 몽상을 갖게 하는 박형준과 오규원 시인의 시 두 편을 선택하여 몽상해보려고 한다.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에서는 박형준 시인의 시를 바슐라르의 시학에 접목하여 보려고 하고 나머지 몽상가의 코키토와 몽상과 우주는 바슐라르가 이를 어떻게 이야기 하고 있는지 연구하여 보려고 한다. 그럼 맨 먼저 몽상에 대한 몽상, 말의 몽상가부터 살펴보자.

Ⅱ. 몽상의 시학이 드러난 한국 현대시

1. 몽상에 대한 몽상, 말의 몽상가

<몽상의 시학>에서 바슐라르가 설명하고 있는 시적 몽상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시인의 영혼이 모든 진정한 시의 의식적 개방성을 발견하는 것은 시적 상상력의 지향성을 통해서이다. 이에 독자로서 시적인 지향성 체험은 바로 이런 시인의 도움으로 가능하다. 모든 의미들은 시적 몽상 속에서 깨어나며 조화를 이루는데 시적 몽상이 귀를 기울이고 시적 의식이 기록해야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의미들의 다성현상이다.

몽상은 이야기 되지 않는다. 글로 써야 한다. 즉, 글로 쓰는 시는 몽상을 끌어 모을 수 있고, 꿈과 추억을 조합해 낼 수 있다. 이때 몽상은 존재의 휴식을 예시해 주며, 안락함을 잘 보여준다. 몽상가와 그의 몽상은 정신과 육신 모두를 행복의 실체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먼저 행복해야 몽상의 진정한 운명이 펼쳐지고 시적 몽상이 되고, 모든 것은 이 몽상을 통해 아름답게 된다.

시인의 삶 속에는 몽상이 현실 자체를 동화시키는 순간들이 있다. 그때 그가 지각하는 것은 동화된다. 현실세계는 상상적 세계에 의해 흡수된다. 우주적 몽상은 안정성과 고요함을 선물하는데 이런 몽상은 우리를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그것은 어떤 상태이다. 깊은 본질로 들어가 보면 영혼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시인의 시적 세계와 함께 전달되는 것은 영혼 전체인 것이다.

이미지가 감동을 준다는 것은 이미지가 영혼의 길로 들어서고, 비판 정신이 제기하는 반박에 넘어가지 않으며, 억압의 무거운 장치에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깊은 몽상 속에서 우리의 영혼을 되찾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몽상은 우리를 태어나는 영혼의 상태로 갖다 놓는다.

몽상은 이미 시작된 문장에 가지를 뻗어나가게 한다. 낱말은 잔가지를 뻗고자 시도하는 싹이다. 몽상하는 것은 펜이다. 친근한 말을 알을 품듯 품어보면 진정 낱말들은 몽상한다. 몽상은 아니마에 속한다. 부드러움, 완만함, 평화, 이것이 아니마로 표현된 몽상의 신조이다. 끊임없는 상상력은 기억에 생기를 불어넣고 기억을 설명해준다. 시인은 살아 있는 어린 시절, 항구적이고 지속적인 부동의 그 어린 시절을 우리 안에서 되찾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몽상은 우리로 하여금 세계 속에 들어앉도록 도와주고, 세계의 행복 속에 자리 잡도록 도와준다. 시를 위해 사는 사람은 모든 것을 읽어야 한다.

그럼 바슐라르의 몽상에 대한 몽상 중, 낱말에 대한 몽상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1) 낱말의 몽상

바슐라르는 몽상에 대한 몽상 중 말에 대한 몽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의 몽상을 이야기 한다. 즉 아름다운 낱말은 이미 치유제이다. 밤과 낮, 잠과 죽음, 하늘과 땅 같은 대단한 것들을 나타내는 낱말들은 ‘쌍’으로 지시되면서만 의미를 지닌다. 하나의 쌍은 다른 쌍을 지배하고 하나의 상은 다른 쌍을 낳는다.

침묵이 고독한 영혼에 평화를 가져다줄 때, 우리는 침묵이 고요한 아니마를 위해 분위기를 마련해 주고 있음을 분명히 느낀다. 침묵을 적의, 원한, 토라짐으로 가득한 후퇴로 특징짓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시인이 우리에게 간청하는 바는 꿈을 꿀 줄 모르는 존재들을 갈라놓는 그런 심리적 갈등들을 넘어서 꿈을 꾸라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이 관찰자와 피 관찰자로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그런 영역에 들어가기 위해선 하나의 장벽을 넘어서야 한다. 그때 몽상가는 자신의 몽상 속에 완전히 녹아 있다. 그의 몽상은 조용한 삶이다. 그리고 고요한 평화이다.

시적 몽상은 머나먼 진원지가 어떤 것이든 간에 언어의 살아 있는 힘으로부터 태어난다.

에스토니에는 사물들이 보고 서로 이야기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각기 제 짝을 찾을 수 있다면 담화는 사물들 사이에 그리고 대상들 사이에 더 생생하고 내밀할 것이다. 그 이유는 낱말들이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끝없는 몽상 속에서 어휘의 부부 같은 가치를 부추긴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가는 모든 가까운 동의어들을 끊임없이 꿈꾼다. 그리하여 모든 몽상이 이원화된다. 사물 세계 감정 괴물에서 그 어떤 것과 관계되든 모든 낱말들은 남성 혹은 여성의 제 짝을 찾으러 간다. 예컨대 거울(la glace:여성)과 거울(le miroir:남성), 잘 맞는 시계와 정확한 크로노미터, 나뭇잎과 책장, 숲과 삼림, 구름(la nuee:여성)과 구름(le nuage:남성), 전설적인 뱀과 용, 루트와 리라, 눈물(les pleurs :남성)과 눈물(les larmes :여성) 등을 들 수 있다.

이 낱말들 자체를 좋아하기 시작한다. 낱말들의 품 안에서 쉬고, 한 낱말의 세포를 분명히 하며, 이 낱말이 생명의 씨앗, 밝아지는 새벽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시인은 이 모든 것을 하나의 행으로 말한다. 하나의 낱말은 새벽일 수 있으며 심지어 확실한 피난처일 수도 있다. 미스트랄이 남성형 요람(berceau)을 여성형 요람(ma berce)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진짜 잠을 체험한다.

발레리라면 ‘우리는 우리가 말을 거쳐 가는 속도’를 통해서만 우리 자신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완만한 몽상은 낱말의 부동성 속에서 심층을 발견한다. 몽상을 통해서 우리는 낱말 속에서 명명하는 행위를 발견한다고 생각한다.

낱말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명명하기를 꿈꾼다고 어느 시인은 말한다. 낱말들은 그것들의 현재 존재 속에 꿈들을 끌어 모으면서 현실이 된다. ‘한마디 말이 어둠 속에 돌아다니다가 휘장을 부풀게 한다.’는 루이 에이미의 시 구절처럼 커튼을 부풀게 하는 것은 존재인가 추억인가 이름인가?

시인의 방은 낱말들, 어둠 속에서 돌아다니는 낱말들로 가득하다. 때때로 말은 사물에 불충실하다. 그것은 사물에서 사물로 가면서 몽상적인 동의관계를 확립하고자 시도한다. 몽상의 깊이로 다가서기 위해서는 낱말들에게 꿈꾸는 시간을 남겨 주어야 한다.

말의 몽상가에게는 말의 조가비들인 낱말들이 있다. 어린아이가 조개 안에서 바닷소리를 듣듯이, 말의 몽상가는 어떤 낱말들에 귀를 기울일 때 꿈의 세계의 웅성거림을 듣는다. 즉 아름다운 글쓰기를 하려고 고심하다 보면 우리는 낱말들의 내부로 이동하는 것 같다. 가브리엘 부누르는 낱말들도 우리들처럼 성이 있으며 우리들처럼 로고스의 사지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들처럼 그것들은 진리의 왕국에서 완성되기를 추구한다.

글을 쓰면서 우리는 낱말에서 내적 울림을 발견한다. 이중모음은 펜 아래에서 다르게 소리 난다. 그것을 따로따로 분리된 소리로 듣는다. 모음충돌을 살짝 끼워 넣음으로써 발견하는 그 고통스러운 환희, 반구마다 모음충돌이 일어나는 말라르메의 시행의 고통을 들어보라

‘육신 속에서 다이아몬드가 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 이름이 연약함을 드러내는 다이아몬드 세 조각으로 사라진다.

개념(concept:남성)과 이미지(image:여성) 사이에는 종합이나 혈통이 없다. 이미지는 개념에 질료를 제공할 수 없다. 개념이 이미지에 안정성을 부여한다면 이미지의 생명을 질식시키게 될 것이다. 최면술사(un magnetiseur:남성)가 몽유병자(la somnambule:여성)에게 명령하듯이 이미지를 조종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미지의 행복을 경험하기 위해선 몽유병자의 몽상을 따라가고 몽상가의 잠꼬대에 귀를 기울이는 게 낫다. 이미지는 몽상 속에 보이는 모습대로 이미지들을 꿈꾸면서 이미지를 통해서만 연구될 수 있다. 개념과 이미지는 상상력과 이성이라는 정신 활동의 대립된 두 극점에서 형성된다. 두 극은 공통점이 없고 서로를 잡아당기지 않는다. 우리가 개념과 이미지를 사랑한다면 상이한 두 사랑이 지닌 정신적 힘들을 사랑해야 한다.

2) 오규원과 박형준의 시에 드러난 말의 몽상

말에 대한 몽상을 오규원의 시에 적용해 보려고 그의 시집 목차를 보니 신기하게도 모든 제목이 낱말과 낱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규원의 시들은 낱말과 낱말의 몽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라는 시집에 실린 시의 제목들은 모두 무엇과 무엇으로 되어 있다. 예를들면, 호수와 나무, 나무와 돌, 양철지붕과 봄비, 허공과 구멍, 하늘과 침묵, 골목과 아이, 사진과 나, 그림과 나, 하늘과 두께, 몸과 다리, 아이와 망초, 그림자와 나무, 숲과 새, 해와 미루나무, 강과 둑, 강과 나, 둑과 나, 강변과 모래, 강과 강물, 강과 사내, 지붕과 벽, 집과 허공, 거리와 사내, 길과 아이들, 도로와 하늘, 유리창과 빗방울, 아침과 바람, 꽃과 그림자, 풀과 돌멩이, 그림자와 길, 나무와 잎, 하늘과 포도 덩굴, 서산과 해, 9월과 뜰, 국화와 벌, 나무와 나무들, 뜰과 귀, 새와 나무, 발자국과 깊이, 새와 낮달, 돌멩이와 편지, 편지지와 편지봉투, 사람과 집, 봄밤과 악수, 타일과 달빛, 서후와 길, 접시와 오후, 눈송이와 전화, 집과 주소, 모자와 겨울, 사진과 명자나무, 집과 소식 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나무와 잎”이라는 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언덕에서 나무의 잎들이 서로를 보고 서로를 베끼고 바람은 앞서가는 바람을 따라 투명한 몸을 맞춘다 나무의 잎들이 보이는 책상 앞에 앉아 눈부신 백지를 펴놓고 쉬엄쉬엄 육조단경을 베낀다.....중략.....삐이삐이 하고 쇠박새가 운다 나는 귀를 언덕으로 열고 쇠박새를 베낀다 삐이삐이 쯔쯔삐이 쯔쯔삐이 쯔쯔 삐이삐이 쯔쯔삐이삐이 쯔쯔삐이.....쯔쯔삐이 쯔쯔....새소리는 언제나 무심코 끝난다...중략.... 누가 문을 두드린다 나는 문자들을 두고 사람을 만나러 간다 문밖에서는 나보다 먼저 나비가 사람에게 가고 있다 -“나무와 잎” 부분

바슐라르의 낱말의 몽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 오규원의 시 한 수를 감상해 보기로 하자. 오규원의 낱말의 몽상은 주로 자연에 있다. 특히 나무와 새와 강물에 대한 시인의 상상력은 독자에게 청신한 감수성을 선물한다. 위에서 인용하고 있는 오규원의 시 ‘나무와 잎’은 자연에게 시인이 자리를 내주고 있다.

“나무의 잎들이 서로를 보고 서로를 베끼는” 작업은 화자가 나무의 잎이 되어 있기도 하고 나무의 잎이 화자가 되어 있기도 하다. 또한 나무의 잎들이 육조단경을 베끼는 행위는 자연과 사람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귀를 언덕으로 열고 쇠박새를 베낀다.”는 화자의 행위는 자연을 몸의 촉수와 연결하여 낚아채는 인상을 준다. 새의 소리는 창공으로 자유롭게 날아가고 사람에게도 그 음향이 자연스럽게 전달되어 오랜 여운으로 남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는 굳이 새가 전신으로 외치는 존재의 알림을 노트에 베끼고 있다. ‘누가 문을 두드리는’ 행위 앞에서 화자는 베끼는 작업을 마치고 사람을 만나러 나선다. 즉 쇠박새를 베끼며 쇠박새가 된 화자가 쇠박새의 옷을 입고 쇠박새의 미소를 지으며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화자를 만나는 사람은 또한 그에게서 쇠박새를 느끼며 쇠박새를 들을 것이다. 그런데 “문밖에서는 나보다 먼저 나비가 사람에게 가고 있다”는 표현이 이어진다. 낱말의 몽상이 극에 달하는 표현이다. 나비는 자연에 동화된 화자를 표상하여 가볍고 자유롭게 화자보다 앞서서 사람 세계로 나아간다. 두려움 없이 찬란하게 빛을 받으며 날아가고 있을 나비 한 마리가 몽상 된다.

이어서 박형준의 시 “저곳”에 드러난 바슐라르의 낱말의 몽상을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空中이라는 말/ 참 좋지요/ 중심이 비어서/ 새들이/ 꽉 찬/ 저곳//

그대와/ 그 안에서/ 방을 들이고/ 아이를 낳고/ 냄새를 피웠으면//

空中이라는/ 말//

뼛속이 비어서/ 하늘 끝까지/ 날아가는/ 새떼// -저곳 전문

박형준 시인은 이 시에서 ‘공중’이라는 낱말을 몽상하고 있다. 공중은 중심이 비었기에 새들이 꽉 찰 수 있는 것이다. 이 비어 있는 공중에서 사랑하는 이와 가정을 이루고 싶어 하는 화자의 갈망이 애틋한 이미지를 선물한다. 새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뼈의 속이 비어 있다”는 표현은 새들의 무욕을 연상하게 한다. 새들은 큰 욕심이 없어서 하늘 끝까지 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는 고독한 독자에게 ‘충만한 텅 빔’을 선물한다. 즉 고독하므로 함께 하는 존재가 없을 터이지만 시를 통해 몽상하는 순간 새들이 꽉 차 있는 공중으로 독자의 시선이 한꺼번에 날아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꽉 참은 비어 있을 때 가능한 것임을 생각하면서 자유롭게 새떼에 합류하도록 이끈다. 나아가 사랑하는 그분과 가족을 이루는 몽상에도 잠시 젖을 수 있다. 그럼에도 진정한 몽상가는 머물러 있지 않는다. 곧 새들처럼 가벼워져서 창공을 날아간다. 그렇기에 이 시는 마지막 연 “뼛속이 비어서/ 하늘 끝까지/ 날아가는/ 새떼//”에서 한껏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2. 몽상에 대한 몽상, 아니무스와 아니마

1) 아니무스와 아니마

다음으로 바슐라르는 몽상에 대한 몽상 두 번째로 아니무스와 아니마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고독한 몽상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남성과 여성으로 동시에 경험한다. 어떤 정념의 미래를 체험하는 몽상은 자신의 정념의 대상을 이상화한다. 이때 이상화는 구체적이며 동시에 한계가 없다. 우리 자신을 현실적 존재와 이상화하는 존재로 이중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몽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하여 절대적인 승화라고 지칭했던 지대에 도달하는 이상화를 통합해야 한다.

말은 인간의 정신 현상을 심층에서 움직이는 지극히 멀고 모호한 욕망과 결부되어 있다. 끊임없이 무의식은 중얼거리며 우리는 그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 자신의 진실을 듣는다. 남자와 여자는 우리 존재의 고독 속에서 이야기한다. 자유로운 몽상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서로에게 고백하기 위해, 잘 화합된 고요한 이중적 본성 속에서 교감하기 위해 이야기한다.

심리학자 뵈이텐디예크는 <여자>라는 아름다운 책에서 정상적 남자는 남성성이 51퍼센트이고 정상적 여자는 여성성이 51퍼센트라는 점을 참조하고 있다. 여성의 시계는 조용하게 흐르는 지속 속에서 연속적으로 나아가고 남성의 시계는 급격한 움직임의 역동성을 드러낸다.

몽상은 아니마의 특징을 띤다. 몽상이 진정으로 깊을 때 우리 안에서 몽상하러 오는 존재는 우리의 아니마이다. 즉 몽상의 시학은 아니마의 시학이다. 몽상은 남자든 여자든 모든 몽상가를 요구의 세계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몽상가에게 조용한 고독을 되돌려주는 순수한 몽상 속에서 남자든 여자든 모든 인간 존재는 몽상의 비탈을 내려가고 끊임없이 내려감으로써 심층의 아니마에서 휴식을 만난다. 이 하강은 추락이 없다.

조르주 상드는 ‘낮은 우리가 밤의 피로에서 쉬도록 만들어졌다. 다시 말해 환한 대낮의 몽상은 밤에 꾸는 꿈으로부터 우리가 쉴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잠의 휴식이 피로를 풀어주는 것은 육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휴식이 항상 영혼을 휴식시켜 주지 못하며 휴식시켜 주는 경우도 드물다. 밤의 휴식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낮의 몽상은 명철한 고요함을 누린다. 그것은 우울함이 배어 있다 할지라도 휴식을 주는 우울함이고, 우리의 휴식에 연속성을 주는 부드러운 우울함이다.

앙리 보스코는 말한다. “나는 행복했다. 나의 즐거움에서 투명한 물, 떨고 있는 잎, 향내를 피우며 퍼져 가는 생동적인 연기, 언덕의 미풍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이처럼 몽상은 정신의 비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영혼의 충만함을 경험하는 시간의 증여물이다.

계획과 염려가 속하는 것이 아니무스라면 아니마에 속하는 것은 행복한 이미지의 현재를 체험하는 몽상이다. 행복한 시간에 우리는 그 스스로 살찌고 생명처럼 유지되는 몽상을 경험한다. 즉 이미지들로 가득한 순수한 몽상이 아니마의 발현이고 가장 특징적인 발현이다. 시적인 이미지들은 우리의 몽상을 야기하고, 우리의 몽상으로 융합된다. 그만큼 아니마가 동화시키는 힘은 크다.

시인의 책에서 우리는 이미지들을 증여물을 초월적으로 맞이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 끊임없이 읽는다는 것은 아니마의 부드러운 정열이다. 아니무스는 정신적 성장 속에서 밝혀지고 지배하는 반면에 아니마는 존재의 지하실을 향해 심화되고 그 속에서 지배한다. 몽상은 아니마의 자유로운 확장이다. 독자는 아니마의 몽상이 있어야 시인이 아니마의 몽상으로 쓴 글을 읽을 수 있다.

우리 휴식의 원리인 아니마는 우리 안에 있는 본성, 스스로 자족하는 본성이고, 고요한 여성성이다. 우리의 심층적 몽상의 원리인 아니마는 진정 우리 안에 있는 잔잔한 물의 존재이다. 우리는 관념과 몽상의 복합체를 끊임없이 재구성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연금술에 관한 책은 모두 두 번 읽어야 한다.

몽상의 진정한 본능은 우리의 아니마 속에서 활동적이며 정신에 연속적인 휴식을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몽상하는 이상적인 것을 파트너가 실현시켜 주기를 기대하면서 전적으로 이상적인 것 속에서 서로를 사랑한다. 따라서 고독한 몽상의 비밀 속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암영들이 아니라 사랑의 새벽을 밝히는 미광들이다.

연인의 몽상 즉 다른 존재에 대해 몽상하는 존재의 몽상에서 몽상자의 아니마는 몽상되는 존재의 아니마를 몽상하면서 깊어진다. 이 삶은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내적 변증법을 생기 있게 움직인다.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를 이상화하면서 우리의 존재를 이중화시킴으로써 우리는 우리 존재를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두 힘으로 나눈다.

몽상은 몽상가를 다른 세계로 옮겨 놓음으로써 몽상가를 그 자신과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이 다른 존재는 여전히 그 자신이고, 그 자신의 복제 분신이다. 몽상은 존재를 보다 부드럽게, 보다 자연스럽게 양분한다. 그리하여 지극히 고독한 몽상 속에서, 우리가 죽은 존재를 불러올 때, 우리가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를 이상화시킬 때, 독서 속에서 우리가 남자와 여자로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자유로울 때, 우리는 삶 전체가 이중화 되는 현상을 느끼고 세계가 우리의 공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통합함을 느낀다.

고독한 몽상가는 4극의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다. 나는 혼자이고 따라서 나는 나의 고독을 치유해 준 존재, 나의 고독을 치유해 줄 수도 있었을 존재에 대해 몽상한다. 그 존재는 자신을 삶을 통해 삶의 이상화, 삶을 이중화시키고 삶을 그 정점으로 이끄는 모든 이상화를 나에게 가져다주었다. 이 모든 이상화 덕분에 몽상가 역시, 시인은 상승하면서 자신의 토대를 발견한다는 말처럼 자신을 양분시키면서 살아간다.

몽상은 창조하는 심리의 작품이다. 몽상가에게 사중(四重)의 언어가 필요하다. 우리가 말없는 몽상 속에서 감히 말하지 않고 체험하는 것은 그 모든 자기 초월이다. 아니마 내에는 인간적인 것의 이상화를 주재하는 공통 원리가 있으며, 이 원리는 고요함으로 원하고 따라서 존재의 연속성을 원하는 그런 존재의 몽상을 주재하는 것이다.

몽상가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이미지에 자신의 아니마를 투사할 수 있다. 투사되는 것은 완전한 분신, 무한한 선함(아니마)과 탁월한 지성(아니무스)으로 된 분신이다. 이상화의 과정에서 망각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상화의 몽상추억에 자신을 맡기면서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한다고 생각되는 존재가 지닌 가치들을 몽상하면서 펼쳐진다. 위대한 몽상가는 자신의 분신을 몽상한다. 그의 이상화된 분신은 그를 지탱해 준다.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관계를 이상화하는 몽상은 참된 삶의 일부를 이룬다. 몽상은 점증하는 사랑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통합하고자 하는 존재들의 운명 속에 있는 활동적인 힘이다. 심리적인 복합적 성격들은 이상을 통해서 조화를 이룬다.

위대한 책은 두 번 읽어야 한다. 한 번은 생각하면서 읽고 다른 한 번은 그 책을 쓴 몽상가와 함께 몽상 속에서 몽상하면서 읽는 것이다.

좋은 본성은 하나의 영혼에 아니무스의 힘과 아니마의 힘이 내밀하게 결합하도록 이런 과도한 상태를 제거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삶, 곧 지식을 추구하지 않는 단순한 삶을 몽상하는 자는 여성성을 향해 기울어진다. 아니마를 중심으로 자신을 집중시킬 때 몽상은 휴식에 도움을 준다. 우리의 가장 훌륭한 몽상은 남자든 여자든 우리 각자의 내부에서 우리의 여성성에 속한다.

여자를 훌륭하게 이상화하려면 남자가 되어야 하며, 아니마의 의식에서 원기가 풍부한 몽상의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2) 박형준과 오규원의 시에 드러난 아니마

박형준의 시 “다림질 하는 여자” 안에 드러난 아니마적 몽상을 살펴보려고 한다.

한순간의 의지에 집중된

그녀의 어깨는 사원처럼 단단하다

식탁에 바랜 꽃무늬 원피스를 펼쳐놓고

그녀는 선명해질 때까지 다리고 다린다

굵어진 손마디 속 우물

여자는 오므라진 꽃을 피운다

우물 속 파문을 기억해내려 꽃을 피운다

동심원의 중심에서

별을 핥는 짐승 한 마리

그녀의 손등에 뛰어오른다

다림질을 하는 방 안에 김이 오른다

여자의 손등에도 꽃들이 피기 시작한다

그녀의 어깨까지 줄기가 뻗어 오른다

식탁에 꽃무늬 원피스를 펼쳐놓고

여자는 다림질을 한다

손등에 새겨진 검버섯

우물 속처럼 깊다

그 속에서 가끔씩 파문이 인다

먼지와 공기까지

그녀는 선명해질 때까지 다리고 다린다

다림질을 하는 방 안에 김이 오른다

혼자 사는 여자는 꽃을 피운다

근육이 꿈틀거릴 때마다

흐릿해진 시간이 곱게 펴진다

밤의 창문에 달이 떠오르면

그녀의 어깨에서 줄기가 뻗어 오르고

짐승이 매달려 논다

뜰에 바람이 지나가고

열매가 익는 밤

여자의 어깨 위에서 짐승이 내려와

까만 눈으로 어둠을 응시한다

-하략

-박형준의 “다림질하는 여자” 부분

박형준의 시 “다림질하는 여자”에는 바슐라르의 아니마적 몽상이 듬뿍 담겨 있다. 다림질하는 한 여자를 이상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림질에 골몰하는 여자는 이내 “꽃들을 피워내고 어깨까지 줄기가 뻗어 오르고” 있다. 그 여자는 고독하다. 하지만 고독하지 않다. 그 여자에겐 “열매가 익는 밤”이 있기 때문이다. 그 밤이 되면 여자의 어깨 위에서는 “짐승이 내려와 어둠을 응시” 할 용기가 있다. 그러므로 여자는 그 몽상 안에서 행복하다. 아울러 다림질을 통해 “먼지와 공기까지” 깨끗하게 다림질을 하므로 결코 추락하는 법도 없다. 여자는 아니마적 몽상의 깊은 차원으로 내려간다. 내면 깊은 아니마, 그 존재의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까로에게 밀려나지 않고 응시할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는 꽃을 피워낼 수 있고 밤이면 열매가 익을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오규원의 “한잎의 여자”에 드러난 아니마적 몽상을 살펴보려고 한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 물푸레 나무 한 잎 같이 쬐끄만 여자, /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 물푸레 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오규원 “한 잎의 여자” 부분

오규원은 “한잎의 여자”에서 한 여자를 몽상하고 있다. 존재를 나뭇잎에 비유하며 한없는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물푸레나무 한 잎 앞에서 화자는 얼마나 깊은 향기를 맡았길래 이런 몽상을 하게 된 것일까? 나무 한 그루는 보통 수십 수백 개의 잎을 달고 있다. 그런데 이 시의 여자는 그 중 한 잎의 여자이다. 화자의 아니마적 몽상은 여자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나고 있다. 여자에게서 발견하는 사랑은 솜털, 맑음, 영혼, 눈, 바람 앞에 보일 듯 보일 듯한 순결과 자유이다. 화자가 사랑한 것들은 시인의 고귀하고 맑은 순수만이 발견할 수 있는 이상화된 몽상의 결과물이다. 보통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섬세하고 귀한 순간들이다. 독자는 단지 한 잎의 여자를 바라보고 관찰하는 것을 넘어 한 잎의 여자가 되어 보는 몽상을 함께 하게 된다. 이로써 아니마적 상상은 독자에게 휴식과 같은 평온함과 사랑의 품을 선물한다고 볼 수 있다.

3.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

1) 어린 시절의 몽상

고독 속에서 어린 아이는 자신의 아픔을 달랠 수 있다. 그는 인간 세계가 자신에게 평화를 줄 때 자신이 우주의 아들이라고 느낀다. 그리하여 고독 속에서 자기 몽상의 주인이 되자마자 그는 몽상하는 행복을 경험하며, 이 행복이 나중에 시인의 행복이 된다. 우리의 모든 유년 시절은 다시 상상해야 한다. 상상으로 우리는 고독한 어린아이에 대한 몽상의 삶 자체 안에서 그 시절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 어린 시절은 시적으로 존재하는 순간들에만 현실적이 된다. 넘치는 어린 시절은 시의 씨앗이다. 몽상의 존재는 어린 시절부터 늙은 시기까지 인간의 모든 나이를 늙지 않고 통과한다. 과거의 가치들을 다시 체험하기 위해서는 몽상을 해야 하며, 몽상이라는 이 위대한 정신적 확장을 큰 휴식의 평화 속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시인은 상상된 삶을 통해서 우리 안에 새로운 빛을 갖다 놓는다. 어린 아이는 고독의 자연스러운 몽상, 뿌루퉁한 어린아이의 몽상과 혼동해서는 안 되는 몽상을 경험한다. 몽상하는 어린아이는 자신의 행복한 고독 속에서 우주적 몽상, 우리를 세계와 결합시키는 몽상을 경험한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는 우리가 매우 오래된 슬픔을 용서하게 해준다.

순수한 추억은 날짜가 없다. 그것은 계절이 있다. 그 계절은 추억의 근본적인 흔적이라는 계절이다. 잊기 어려운 그날 태양은 어떠했고, 바람은 어떠했던가? 이것이 무의지적인 기억의 어김없는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질문이다. 그렇게 하여 추억은 커다란 이미지, 확대되고 확장되는 이미지가 된다. 이 계절은 총체적 계절로 모든 이미지들이 동일한 가치를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의 특별한 이미지를 통해 그것의 본질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상상력은 그 자체의 우화들 속에서 살아간다. 우화의 언어를 되찾기 위해서는 신화적인 것의 실존주의에 참여해야 하고, 몸과 영혼이 찬양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며, 세계 앞에서 지각을 찬미로 대체해야 한다. 온 영혼으로 이미지의 중심을 소유해야 한다. 너무 세밀하게 기록된 상황은 추억의 심층적 존재에 해를 끼칠 것이다.

우리가 위대한 작가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들의 몽상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우리의 몽상 속에서 우리를 확인해 주며,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재 상상된 과거 속에서 살도록 해주는 것이다. 시인들은 인간에 대해 다른 빛을 던져 준다.

철학적 반성 속에서 몽사에 어떤 위치를 부여하는 철학자는 명상된 어린 시절을 통해 하나의 코키토를 경험한다. 이 코키토는 어둠으로부터 나오며, 어둠의 가장자리를 간직하고 있고 아마 어떤 어둠 그림자의 코키토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어린 시절의 우주성을 우리 내부에서 일깨운다. 어린 시절은 그것이 지닌 원형적 가치를 통해 소통이 가능하다.

어린 시절의 식물적 힘은 전설에 의해 자양을 얻어 인생 내내 우리의 내부에 존속한다. 우리의 심층적 식물적 태도가 지닌 비밀은 거기에 있다. 프란스 엘렝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어린 시절은 우리 안에서 죽어가고 주기를 마치자마자 시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추억이 아니다. 그것은 보물 가운데 가장 살아 있는 것이며,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지속적으로 풍요롭게 해준다.”

우리의 몽상이 다소 우리의 행동에 자양을 준다면, 어린 시절의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가장 오래된 몽상에 대해 성찰하는 것은 항상 좋은 일이 될 것이다. 프란스 엘렝스는 다음과 같은 직관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대단한 안도를 느낀다. 나는 긴 여행에서 돌아오고 다음과 같은 확신을 얻었다. 즉 인간의 어린 시절은 그의 삶 전체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역경, 슬픔, 실망은 어쨌거나 나에게 타격을 주거나 지치게 하지 않고 내 위를 지나갔다.”

냄새는 세계와 우리의 융합을 나타내는 최초의 증거이다. 옛날의 냄새에 대한 그 추억을 우리는 두 눈을 감을 때 되찾는다. 현재에서처럼 과거에서도 우리가 좋아하는 냄새는 내밀성의 중심이다. ‘나의 어린 시절은 냄새의 다발이다.’라고 말하는 작가도 있다.

최초로 확산될 때의 냄새는 세계의 뿌리이고 어린 시절의 진실이다. 냄새는 확장되는 어린 시절의 세계들을 우리에게 준다. 추억과 몽상은 총체적인 공생 상태에 있다. 냄새는 하나의 사라진 세계 전체를 간직하고 있다. 앙리 보스코는 땅, 밀, 새 포도주의 냄새에 대해 생각할 때 기쁨과 젊음의 생생한 향기가 되살아난다고 말한다. 추억은 과거 속에 보관된 향이다.

2) 박형준 시에 드러난 어린 시절의 몽상

박형준 시 “어린 시절”에 드러난 바슐라르의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을 살펴본다.

저녁을 굶고 지붕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는다

30촉 전등에 뜰 앞 나무의 풋대추가 비치는데

오는 사람은 없고 오는 비만 있는 저문 집

아궁이에서 저 홀로 타는 장작 소리

설핏 잠이 든 사이 후두둑

초롱초롱한 풋대추 한 대접 지붕에 구르는데

밤비에 글썽이며 빛을 내는 옹기들처럼

-박형준의 “어린 시절” 전문

바슐라르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보물 가운데 가장 살아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박형준의 시에는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밀떡 냄새를 회상한 “별식”도 있지만, “어린 시절”이라는 제목의 이 시도 독자에게 아련한 몽상을 가져다준다. 특히 ‘빗소리와 지붕에서 풋대추 구르는 소리’가 시 밖으로 튕겨져 나오고 있다. 독자는 이 소리를 함께 들으며 비가 오는 고독한 초가을 밤을 몽상하고 있다. 이 시에 드러난 분위기는 평온하다. 어린 시절 화자는 고향의 품에서 고향과 존재의 근원에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변의 사물과 촘촘하게 연계된 인상을 가져다준다. 쉽게 풀리지 않을 수 있는 탄탄한 관계 맺기가 이루어진 것이다. 독자는 이로써 존재적인 안정감을 선물 받는다. 독자의 어린 시절 한켠에 자리 잡고 있는 이와 비슷한 추억이 떠오르면서 내면에 방이 하나 만들어지고 그 방에서 따뜻한 나눔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박형준의 시 “어린 시절”이 선물하는 몽상이라 할 수 있겠다.

4. 몽상가의 코키토

시인의 형이상학적 감성은 우리가 밤의 심연으로 접근하는 것을 도와준다. 몽상이 태어나게 되는 것은 긴장 없는 자각 속에서이고 즐거움을 주는 이미지—이 이미지가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어떤 책임도 벗어나 몽상의 절대적인 자유 속에서 그것을 방금 창조했기 때문이다—를 맞이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는 수월한 코키토 속에서이다. 몽상하는 자의 존재는 그가 자극하는 이미지들에 의해 구성된다. 이미지는 우리를 마비 상태에서 깨어나게 하고 우리의 깨어남은 하나의 코키토로 알려진다. 시인이 대상을 선택하게 되면 대상 자체가 존재를 바꾼다. 그것은 시적인 것으로 승격된다.

하나의 과일 덕분에 살찌는 것은 몽상가의 전 존재이다. 한 송이 꽃 덕분에 이완되는 것은 몽상가의 전 존재이다. 손에 쥐어진 과일은 그것이 익었다는 것을 보장한다. 그것의 성숙은 투명하다. 성숙, 그것은 한때의 행복을 위해 절약된 시간이다. 시인의 정원은 신화적 정원이다. 전설의 과거가 몽상에 수많은 길을 열어 준다. 우주로 가는 길들은 찬양되는 대상으로부터 빛을 발한다. 시인이 찬양하는 사과는 우주, 살기에 좋은 우주, 확실히 살 수 있는 우주의 중심이다. 몽상에 따라 대상은 동일하지 않다. 그것은 새롭게 소생하며, 이런 소생은 몽상가의 부활이다.

시인은 몽상 속에서 일반화된 이미지들을 조정한다. 몽상가와 그의 세계와 맺는 상관관계는 강력한 관계이다. 고독한 인간은 그가 몽상하는 세계들을 직접적으로 소유한다. 인간 존재를 세계의 존재와 연결해야 한다면, 몽상의 코키토는 이렇게 표현될 것이다. : 나는 세계를 몽상한다. 그러므로 세계는 내가 몽상하는 대로 존재한다. 위대한 시인들은 우리에게 몽상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그들은 우리가 휴식의 몽상을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이미지들을 품게 만든다.

몽상의 시학의 과제는 상상된 세계들의 견고함을 밝히고, 구축적인 몽상의 대담성을 상술하며, 몽상가의 거리낌 없는 의식으로 자신을 확고히 하는 것이고, 자유들을 조정하며, 언어의 온갖 문란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고, 인간이 모든 생성을 소유할 수 있도록 존재의 모든 감옥을 여는 것이다. 몽상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것, 몽상 자체 속에서 작가가 되는 것은 존재의 대단한 승격이다.

쥘리앙 그린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사물을 몽상했을 때에만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내 정신의 특이한 성향이다. 믿는다는 말의 의미는 어떤 확신을 지닌다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신 안에 그것을 고정시켜 그로 인해 존재가 변화된다는 것이다.”

흩어져 있는 사물들 앞에서 우리는 유익한 몽상을 잘 할 수 없다. 사물들에 대한 몽상은 친근한 사물에 대한 충실성을 말한다. 몽상가가 자신의 대상에 충실함은 내밀한 몽상의 조건이다. 몽상은 친근성을 유지한다.

독일 어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각각의 새로운 사물을 잘 관찰하면, 그것은 우리 내부에서 새로운 기관을 얼어 준다.” 우리는 사물 앞에서 많이 몽상해야 한다. 사물에 대한 우리의 몽상이 깊다면 그것은 우리의 몽상적 기관과 우리의 사물함 사이의 일치속에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사물함은 우리에게 귀중하고, 몽상적으로 귀중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애착 있는 몽상의 유익함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몽상 속에서 몽상가는 자신을 몽상하는 주체로 인정한다.

몽상은 분명한 정신적 활동이다. 몽상가의 코키토는 사상가의 코키토보다 덜 날카롭다. 몽상가의 코키토는 철학자의 코키토보다 덜 확실하다. 몽상가의 존재는 산만한 존재다. 그러나 반면에 이 산만한 존재는 확산의 존재이다. 그는 지금 여기라는 일회적 시공간 설정을 벗어난다. 몽상가의 존재는 자신과 접촉하는 것에 침투하고 세계 속으로 확산된다.

몽상의 인간은 언제나 어떤 부피의 공간 속에 있다. 고독 속에서는 손가락에 반죽이 주어지기만 해도 우리는 몽상을 시작할 수 있다. 많은 시인이 아편의 몽상을 체험하려고 시도한 것은 글을 쓰기 위한 것이다. 알고자 하는 게 아니라 몽상하고자 하는 우리는 경험에서 시로 가는 그 오르막길을 따라가야 한다.

5. 몽상과 우주

몽상을 하는 자가 일상의 관심사들을 물리쳤을 때, 그가 타자의 근심으로부터 오는 근심에서 벗어났을 때, 그가 진정으로 자기 고독의 장본인이 되었을 때, 그가 시간을 따지지 않고 우주의 아름다운 측면을 관조할 수 있을 때 이 몽상가는 자신 안에서 열리는 어떤 존재를 느낀다. 그런 몽상가는 세계의 몽상가가 된다. 몽상은 고요한 세계 앞에서 몽상할 때에만 깊어질 수 있다. 몽상하는 눈은 보는 게 아니거나 최소한 그것은 다른 시각으로 본다. 우주적 몽상은 우리로 하여금 지각 이전이라고 지칭해야 할 상태에서 살도록 해준다. 몽상가와 그의 세계 사이의 소통은 고독한 몽상 속에서 아주 가까우며 거리가 없다. 지각된 세계, 지각에 의해 파편화된 세계를 나타내는 그 거리 말이다.

우주적 이미지는 즉각적이다. 그것은 부분보다 전체를 우리에게 준다. 단 하나의 우주적 이미지가 그에게 몽상의 통일성, 세계의 통일성을 준다. 다른 이미지들이 이 근본적 이미지로부터 태어나고 결집하며 서로를 아름답게 해준다. 시인이 하나의 특수한 이미지에 위대함의 운명을 부여하자마자 하나의 특수한 우주가 이이미지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시인은 현실적 대상에 자신의 상상적인 분신, 자싱의 이상화된 분신을 부여한다. 이 이상화된 분신은 곧바로 이상화 작용을 하며, 그렇게 하여 확대되는 이미지로부터 하나의 우주가 탄생한다. 확실한 이미지는 몽상가가 질료를 열망할 때 그가 자신의 몽상 속에서 ‘사물의 심층으로’ 내려갈 때 나타난다. 몽상이 우주와 실체를 결합할 때 모든 것은 위대하고 동시에 안정적이다.

우리가 이미지의 우주성을 통해 받아들이는 것은 세계에 대한 경험이다. 우주적 몽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세계에 거주케 한다. 그것은 몽상가에게 상상된 우주 속에서 자신의 집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정신과의사 슐츠의 자생적 트레이닝을 토대로 호흡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즉 “세계가 내 안에 호흡하러 오며, 나는 세계의 좋은 호흡에 참여하고, 나는 호흡하는 세계 속에 잠긴다. 모든 것은 세계 안에서 호흡한다. 나의 천식, 나의 불안을 치유해 줄 호흡인 좋은 호흡은 우주적 호흡이다.”

시는 우리가 세계를 호흡하는 어린아이의 근본적 호흡인 거대한 바람의 호흡을 되찾도록 도와준다. 시를 통한 내 치유의 유토피아에서 ‘어린 시절의 성가여, 오 말의 허파여’를 성찰해보면 말하고 노래하며 시를 짓는 것이 허파일 때 숨은 얼마나 확대되는가! 시는 잘 호흡하도록 도와준다.

자기의 시선을 갖게 된 응시자에게 눈은 인간적인 힘을 투사하는 기관이다. 예리한 시선의 몽상이 존재한다. 본다는 자부심, 투명하게 보며, 잘 보고, 멀리 본다는 자부심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그런 몽상 말이다. 눈은 빛의 중심이고 분명히 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잘 보아야 하는 대상에 자신의 빛을 던지는 인간의 작은 태양이다. 항성들은 무겁게 잡아당기는 물체의 주변이 아니라 빛의 눈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다. 시선은 우주의 원리이다.

본다는 의식이 크게 본다는 의식이고 아름답게 본다는 의식일 때 관조되는 세계는 어떤 빛의 층위를 뚫고 지나가는 것 같다. 아름다움은 감각적인 것을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아름다움은 관조되는 세계의 양각이자 본다는 존엄성으로의 상승이다.

세계의 아름다움을 본다는 고양된 행복 속에서 몽상가는 자신과 세계 사이에 시선의 교환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여자 사이의 시선처럼 말이다. “하늘은 (...) 사랑에 빠져 대지를 바라보는 커다란 눈 같았다.”는 노발리스의 주장을 표현하려면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은 나를 바라본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빛나는 모든 것은 보고 있으며, 세계에서 시선보다 빛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테오도르 드 방빌은 이렇게 말한다. “호수의 시선과 인간 눈동자의 시선 사이에는 놀라운 닮음이 있다.”

우주적 몽상의 정점에 있는 시인의 공적은 말의 우주를 이루어 내는 것이다. 세계의 사물들을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세계를 찬양하는 방법을 배운다. 그리하여 우리는 말의 우주 속으로 들어간다. 원초적인 우주적 몽상에서 세계는 인간의 몸이고, 인간의 시선이며, 인간의 숨결이고, 인간의 목소리이다. 우주적 몽상에서는 아무 것도 세계도 몽상가도 무력하지 않다. 모든 것이 은밀한 생명으로 살고 있다. 시인은 귀를 기울여 듣고 되풀이한다. 시인의 목소리는 세계의 목소리이다.

불 앞에서 몽상하고 물 앞에서 몽상하면서 우리는 일종의 안정된 몽상을 경험한다. 불과 물은 몽환적인 통합력이 있다. 그때 이미지들은 뿌리가 있다. 그것들을 따라가면 우리는 세계에 동참하고, 세계 속에 뿌리내린다. 잠자는 물은 우주와 몽상가, 모든 것을 통합한다. 잠자는 물 옆에서 몽상가는 자신의 코키토, 깊이의 존재를 확보하게 되는 영혼의 진정한 코키토를 가장 자연스럽게 정립한다. 물은 내적인 삶을 가진 유일한 거울이다. 고요한 물에서 표면과 심층은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 심층과 표면은 화해된다. 물이 깊을수록 거울은 더 맑다. 빛은 심연으로부터 나온다. 심층과 표면은 서로에게 속하며 잠자는 몽상은 그 둘을 왔다 갔다 한다. 몽상가는 자신의 심층에 대해 몽상한다.

앙리 보스코는 말한다. “연못 위에서 길을 잃자, 나는 내가 이윽고 진흙, 새, 식물, 강인한 소관목으로 구성된 현실 세계 속에가 아니라 하나의 바로 영혼 중심에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다. 이 영혼의 움직임과 고요함은 나의 내적 변화와 하나가 되었다. 그리하여 나의 영혼은 나를 닮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나의 정신적 삶은 나의 사유를 쉽게 넘어서고 있었다. 그것은 도망이 아니라 (...) 내적 융합이었다.”

투명한 물 앞에서 몽상하는 자는 근원적인 순수함에 대해 몽상한다. 물에 대한 몽상은 세계에서 몽상가로 가는 순수함의 소통을 경험한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 한다. 한 세계의 몽상은 다른 세계의 몽상을 부른다.

Ⅲ. 나오며

이상으로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을 박형준과 오규원의 현대시에 접목하여 연구해 보았다. 몽상을 체험할 좋은 기회가 되었으며 앞으로 시를 창작할 때 본 연구가 밑바탕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독자로서 몽상이 생명력을 길러주는 큰 힘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긴다. 그래서인지 몽상의 시학을 읽은 독자들의 가슴 속에 혹여 그림자가 있다면 그림자를 그림자대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면 그림자를 만드는 실체가 어느덧 생기를 얻고 더욱 더 빛으로 나아가서 어느 날 그림자는 사라지고 다른 그림자를 살피는 여유가 생길 것 같다. 즉 내면 깊은 곳에 내려가서 몽상을 길어 올려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몽상을 움직여 평온함과 휴식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독자는 낱말들이 말을 걸어올 때 외면하지 않고 품에 안아 이리보고 저리보고 앞에서 보고 뒤에서 보고 밑에서 보고 위에서 보고 하여 낱말과 거리를 두기고 하고 친밀해지기도 하면서 시를 탄생시킬 수 있으리라. 한 시인이 우주적인 몽상으로 확장되고 넓어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려도, 몽상가로서의 코키토를 내면에 지니고, 보물덩어리 어린 시절을 품고 세상을 향해 천천히 나아간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본 연구를 기획하신 박형준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마음을 올리며 아울러 한 학기 동안 동행해 주신 분들, 그리고 어느덧 시혼 깊이 뿌리내리려고 연구자의 마음을 쉼 없이 두드리고 있는 바슐라르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참고문헌

[단행본]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동문선, 2007

박형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 <춤> 창비, 2005

———,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창비, 2011

오규원,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문학과 지성사, 2005

———, <오규원시전집 1,2> 문학과지성사, 2002

[논문]

박형준, “강물의 시적 변용과 귀향의식” 명지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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