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예술과 연금술 저자: 이지훈 출판사: 창비
바슐라르에 관한 깊고 느린 몽상 <예술과 연금술>을 만나다
김미경
낯선 여행이다. 상상력이라는 천혜의 선물이 가진 가치를 생생하게 체험한 여행이다. 어려서부터 자연과 함께 성장한 덕분에 상상력과 직관이 풍부한 편이다. 그럼에도 성장 후 도시로 나와 묻혀버린 그 내면의 힘이 이 책을 통해 조금 열리기 시작한다. 눈에 보이는 시각적 이미지 즉 형태적 상상력에 매달려 시를 쓰려고 하던 날들이 많았다. 물질적 상상력이니 질료적 상상력이니 역동적 상상력이니 하는 용어들이 몹시 낯설었다. 그럼에도 그런 상상력을 공부하면서 사물의 운동을 감지할 수 있는 직관력이 꿈틀댄다.
그러면서 시를 쓸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 포착되기 시작한다. 팔려고 내놓은 생선상자주변에서 꿈틀대는 바다와 살아 있는 물고기들의 움직임을 온 몸으로 감지하는 축복도 어쩌면 바슐라르를 통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예술과 연금술>을 중간과제물로 정해주신 것에 대해 깊은 감사의 마음을 품는다. 왜냐하면 책 내용이 흥미롭고 문체가 부드러워 마음이 따뜻해지며, 바슐라르의 시학을 받아들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머리말부터 흥미를 끈다. ‘대립의 공존을 위한 상상력’이라니, 대립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다는 말일까? 무슨 의미일까? 부제로 달린 ‘바슐라르에 관한 깊고 느린 몽상’도 굉장히 몽상적으로 다가온다. 몽상의 의미를 생각할 때도 무언가 몽롱함이 먼저 떠오른다. 아직 대지의 몽상이니 휴식의 몽상이니 하는 부분은 강의가 나가지 않았지만 흥미로울 것 같은 예감이다.
책의 목차를 보면 물〮〮 불 공기 흙의 자연을 여섯 개의 장으로 나눠 연금술의 상상력, 물의 상상력, 불의 상상력, 공기의 상상력, 대지의 상상력, 자연과 같은 예술 등을 안내하고 있다. 마지막에는 언저리 이야기를 덧붙여 바슐라르 시학에 대한 종합 및 저자 개인적인 의견을 포함시키고 있다. 굉장히 섬세한 이야기의 흐름을 엿볼 수 있고 조심스러운 문체로 독자를 배려하고 있다. 그럼 책 제목에서처럼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고, 바슐라르의 상상력과 연금술에 대해 느낀 바를 느린 몽상으로 천천히 이야기하고자 한다.
2. 각 단원 별 메모하며 읽은 내용을 통한 내적 상상력
1) 연금술의 상상력 :
가. 연금술의 기호와 변형의 상상력
연금술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대립의 동시 발생과 공존을 인정한다는 연금술은 보통 알쏭달쏭한 우의(Allegory) 동음이의어의 병렬, 유비(Analogy), 인유(allusion), 시각 표상과 도상 등의 언어적 특징이 있다. 이때 바슐라르는 근원언어를 아담언어라고 말한다. 즉 사물의 이름과 본질이 완전히 일치하는 언어이다. 이 아담 언어를 현실에 복원하려 한다고 하니 시를 쓰고자 하는 우리도 아담언어를 발견하고 찾아내야 할 듯싶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이미지, 자신 안에 있는 이미지를 직관에 전달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할지 생각해 본다. 근원언어라는 것,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 책에서 그 근원언어를 발화없는 담론이며 침묵의 표현이라고 한다. 어떻게 발화가 없는 담론이 있을 수 있으며 침묵으로 표현을 한다는 것일까? 또 대립이 어떻게 일치하는 것일까? 일치란 동시발생 같은 곳에 공존함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자꾸만 사랑하는 사람 생각이 난다. 그와의 일치는 늘 동시발생이고 공존이었기 때문이다.
연금술에서는 ‘무의미’를 이야기 한다. 이는 무한한 차이가 수렴 발산하는 터, 공존의 터를 말한다. 즉 특정한 하나의 의미로 확정되지 않는 그 무엇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예) 거문고 줄: 수많은 소리를 담고 있되, 아직 특정한 소리로 한정되지 않은 무엇(무의미)을 한군데 손을 짚어 줄을 튕길 때 특정한 높이와 깊이를 가진 소리가 난다. 의미가 발생한다. 따라서 무의미는 그것으로부터 모든 의미와 대립들이 발생하여 나오는 공존의 터이다.
따라서 표현하는 형식과 내용이 일치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내놓을 수 있을 뿐 다른 무엇으로 재현(representation)될 수 없으며, 다만 그것 자체를 제시(presentation)할 수 있을 뿐이다. 제시를 만족시키는 이상적 매체는 근원 언어이다. 직관에 호소하는 이미지, 보충하고 대체하는 것이 담론의 언어이다. 0.99999와 1이 공존하는 순간, 영혼의 정화를 통한 직관, 그 직관을 무한한 대체와 보충으로 표현한다. 1에 끝없이 다가서는 과정을 동화(同化) 신적인 것에 유사하게 되는 과정(homoiosis theo) 1과 공존하는 순간을 ‘신비적 합일(unio mystica) 현자의 돌(lapis philosophrum)을 완성하는 과정. 따라서 연금술은 물질적 실천과 정신적 실천, 언어적 실천이다.
바슐라르 상상력은 일종의 직관이다. 결코 넘을 수 없는 빈틈(....)을 넘어 1과 공존하는 순간을 직접 바라보려는 정신활동이다. 즉 가시적 형상(시각적 이미지)은 감각에만 머물며 그 자체로 하나의 사물처럼 얼어붙기 십상이므로 시각 이미지에 집착하면 안 된다.
직관으로서의 상상력은 타성에 빠진 이미지를 바꾸어 그보다 의미 깊은 이미지를 얻으려 한다. 상상력의 알맹이가 이미지 형성이 아니라 변형(deformation)에 있다. 변형은 곧 버리는 일, 이미지 버리고 대체하며 시인의 넋은 상승한다. 따라서 그의 상상력은 변형, 탈태(奪胎)의 동력학이다.
나. 고유명사의 세계와 보통명사의 세계
물, 불, 공기(바람), 흙(대지)는 근원, 으뜸 원리이다. 신화는 구체적 고유명사의 세계이고, 과학은 추상적이며 보편적인 보통명사의 세계이다. 네 원소의 관념은 고유명사와 보통명사 사이에 걸쳐 있는 것이다. 고유명사와 보통명사를 구별해서 시를 쓴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구체성 획득을 위해 뭘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다. 신성한 질료의 운동과 고유명사의 직관
엠페도클래스가 말한 모든 사물의 네 뿌리 (rhizome) 를 발전시켜 히포크라테스는 인체의 네 체질, 아리스토텔레스는 발전 수정하여 네 원소 이론, 4장기 이론, 4체액, 4체질이론 우주에서 사람 몸까지 일관체계로 발전. 네 뿌리의 뿌리를 이루는 제1물질이 있다고 생각함
연금술에서 근원물질은 루시퍼, 혼돈, 어두운 대지의 흙덩이에서 만들어진 것. 흙덩이에 잠재된 성질을 승화하고 고양하여 현자의 돌에 이르려 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지역의 특수성을 담아 근원물질은 건조함, 차가움, 축축함, 뜨거움 가운데 한 쌍 받아들임으로써 흙, 물, 공기, 불이라는 원소를 이룬다고 말한다.
연금술에서 원소가 품고 있는 성질들의 상호관계에 주목한다. 예를 들면 흙은 건조함과 차가움이 결합, 불은 건조함과 뜨거움의 결합, 만약 흙으로부터 차가움을 빼고 뜨거움을 넣는다면 어떻게 될까? 흙이 불로 바뀌지 않겠는가? 연금술은 원소를 구성하는 성질의 조합을 바꿔볼 생각이다. 연금술에서는 원소들의 역전과 순환(rotation)이라는 관점이 나온다. 이로써 원소가 순환을 거듭하면 지상에서 이 천상의 물질을 만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과거를 되돌리며 황금시대를 지금 이 땅에 되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연금술은 질료의 운동 양상을 으뜸으로 본다. 형상은 다만 질료의 운동으로부터 만들어진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연금술은 대립의 일치가 자연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있다. 예) 남성원리(animus) 여성원리(anima) 두 원리 또한 질료의 운동 양상이다. 따라서 같은 재료라 해도 운동 방식에 따라 남성이 될 수도 있고 여성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질료가 아니라 질료의 운동양상이며 이것이 곧 형상이다.
연금술은 물질이 정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다고 보았다. 물활론(hylozoism) 유물론 울타리를 벗어남. 물질은 생명이나 영혼의 반대말이 아니라 그들을 대체할 수 있는 범주이다.
파라켈수스는 대초에 질료가 분리됨으로써 천지가 생겼다며 기독교와 맞선다. 그는 아담의 살, 신성한 살로 구분해 신성한 살만 부활한다고. 우리 몸에도 신성한 하늘의 살이 섞여 있는데 지상을 신성화 하는 것이다. 몸 얻기 개념으로 새 몸 얻기, 몸 바꾸기.
연금술은 영혼과 생명에 대립하기는커녕 그들을 내포하는 살아 있는 질료(몸)이다. 파라겔수스는 겉보기에 동떨어진 모든 것들이 공존, 상응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어두운 흙덩이가 현자의 돌로 되살아나는 것은 질료의 내적인 자기 갱생, 육신의 부활에 상응한다.
이처럼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이는 질료라 해도 어떤 신적인 것을 담고 있으므로 중요한 것은 질료이며, 질료의 운동이다. 파라켈수스는 질료에 들어 있는 운동의 내적 원리를 씨앗(semina)라고 불렀다. 이 씨앗은 모든 사물에 서명처럼 새겨져 있다고 했다.
사물의 기호 의미찾기는 굳어버린 지성보다 감각과 직관적 정신 자체의 각성이 중요하다.
고정된 형상과 이미지에 적합한 보통명사보다는 구체적인 기미를 감지하는 고유명사의 직관이 필요하다. 바슐라르는 이런 관념을 상당부분 그대로 이어 받았다.
베르그쏜은 불의 철학자(스스로는 물의 철학자)인데 사람의 꿈이나 상상도 네 원소의 운동에 따른다. 모든 정신활동은 자연과 더불어 있는데 이 자연을 대표하는 것이 넷이다. 이 네 원형은 질료 바깥에서 들어온 형상이 아니라 질료에 내재한 것임을 잊어선 안 된다. 이때 질료는 물질적 재료(소재)가 아니라 물질의 운동방식이다.
예) 석도 “숨었다 올라가는 산줄기를 보며 거대한 바다의 파도를 느낄 수도 있다.” 하나의 형상(산)으로부터 다른 질료(물)의 운동을 감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질료의 운동양태가 중요하지 외정형상이나 소재가 중요한 건 아니다. 전자가 후자를 낳기 때문이다.
형상을 통해 운동을 직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투입되는 것이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눈에 보이는 영상(image)을 만드는 활동이 아니라 오히려 가시적인 형상으로부터 출발하되 이 형상을 여의고 질료의 운동으로 들어가는 활동이다. 바슐라르는 형상으로부터 질료로 들어가는 벡터(vector)에 주목하고 거기에 투입되는 상상력을 연구했다. 따라서 상상력이 여는 세계는 고유명사를 바탕으로 한다.
직관으로서의 상상력은 사람과 생명체를 비롯하여 여러 사물에 대한 육감적인 감수성 그리고 물 불 공기 흙에 대한 생생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하는 세계이다. 따라서 상상력의 결실은 구체적 현실에 바탕을 둔 동시에 이것을 떠나 있다. 그리하여 현실성과 비현실성의 경계에 존재하며, 둘 사이에 대단히 유동적인 통로를 마련한다.
자연을 체험하며 노래할 때 우리 스스로 변형을 경험한다. 우리가 바라보는 자연 또한 변형된다. 자기 귀의적 순환 속에서 언어는 세계를 기술하는 수단이며 세계에 작용하는 수단이다. 세계에 영향을 주고 움직이는 언어이자 스스로 현실이 되는 언어 즉 마술의 언어이다. 언어가 근원적으로 ‘울림’이기 때문이다. 정녕 언어는 소리이며 소리는 울림이다.
일방적인 언어는 일방적 방식으로 벗어날 순 없다. 자연속으로 도피하거나 현실 생활 사건으로 도피한다고 치유되지 않는다. 우리가 자연과의 본래 관계를 되찾을 때 자연은 우리 안에 있는 네 원소를 울리며, 또한 우리 속에 숨은 네 원소는 언어를 통하여 자연을 울린다. 그리하여 하나의 현실을 창조할 수도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며 자연과의 소통 체험이 얼마나 중요한 지 절실히 깨닫게 된다.
라. 감동의 자연
따뜻한 감수성으로 바라볼 때 나무를 보고 있는 나의 지식과 선입견은 사라진다. 이때 나무는 나를 울리며, 내 속에서 스스로 꿈을 꾸기 시작한다. 아름다움이 예민한 감수성 자체에 있다면, 우리는 자연의 감수성을 회복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때 되살아나는 감수성은 마치 수면 위에 번지는 무늬처럼 모든 방향으로 퍼질 것이다. 자연을 향하는 동시에 우리 스스로를 바꿔놓을 것이다.
울림은 우리 자신을 존재의 심화에 이르게 한다. 울림 속에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시를 말한다. 그때의 시는 우리들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과 교감이 이뤄진다면 우리는 언어로 교감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과도 교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우리 삶의 한 부분이며, 우리는 자연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만나지 않으면 고작 과거의 기억과 이미지를 중심에 두고 사는데 과거에 고정된 이미지는 교감의 감수성을 가로막는다. 교감은 무엇을 기억했다가 실행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적 이미지는 과거의 메아리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이미지가 번쩍함으로써 먼 과거가 메아리를 울리는 것이며 얼마나 깊이 그 메아리가 울릴 것이며 퍼질 것인가를 우리는 모른다. 새로움, 활력 속에서 시적 이미지는 자신에 맞는 존재를 자신에 맞는 동력을 갖는다. 그것은 직접적 존재론에 속한다. 참된 만남은 과거에 매달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상상력은 이미지의 형성이 아니라 변형 속에 있다는 구절도 비슷한 의미이다. 사람의 감정과 자연의 모든 커다란 힘은 서로 상반되는 대립을 보여주는 ‘대립의 일치’라는 관념을 이 책에서 배우고자 한다. = 이하 생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