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증거 하는 삶을 삽시다.
영국의 어느 모임에서 한 가톨릭 사제가 강연자로 나섰습니다. 사제는 구(舊) 소련의 붕괴와 관련된 일련의 사태를 하느님의 기적에 근거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자 무신론자인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는 성경에 나타난 기적에 대해 빈정대는 웃음을 터뜨리며 외쳤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그런 기적을 본 사람 있소? 있으면 한 번 얘기해보시오”
이윽고 노동자 차림의 건장한 사내가 일어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알 것이오. 나는 전에는 술주정뱅이에다 깡패였소. 그런데 내게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는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내가 바로 그런 기적의 당사자가 아니겠소?”
여기저기서 “옳소!”하는 외침이 터져 왔습니다. 잠시 당황하던 무신론자가 반문했습니다. “아, 물론 알고말고요. 그러니까 당신 말은, 당신이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얘기가 아닌가요?” 노동자가 곧장 말을 받았습니다.” “천만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어느 학자의 말처럼 오늘 날 이 세상에 부족한 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부족한 것은 우리의 감탄사요 느낌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당시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 왔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그 시신을 훔쳐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갔다면 그들 수중에는 상처투성이 시신만 남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제자들은 그런 죽은 시체를 위해 잔혹한 박해와 자기 죽음까지도 감수하면서 복음을 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천 년 전에 그분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뵌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일상 안에서 부활 신앙을 체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매일의 수면을 통해서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미리 경험하며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만 아침에 일어나는 것과 주님이 오실 때 깨어나는 것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적으로는 같은 상황입니다. 인생은 죽음과 부활의 연속이요 일생을 통해서 매일같이 부활을 연습하는 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희망의 증인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보여 달라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복음 말씀에 따라 사는 모습’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서 주님을 알고 또 그 사랑을 느낀다면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들도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따라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생활(실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사순절을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어떤 고통을 당하셨고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보도록 합시다.
1)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2) (회개하는 죄수에게)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3)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4)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5) “목마르다.” 6) “다 이루어졌다.” 7)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우리는 복음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이 있기에 살아 있는 신앙 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말씀대로 사랑을 실천하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복음을 사는 것이요.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증거 함으로써 복음 선포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사는 것은 나도 살고 상대방도 살리는 것입니다. 착한 말과 선한 행동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레지오 단원이 되도록 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