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에 간다고 동물이 될 수는 없다
『탈무드』에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어느 마을에 스스로 경건한 신자임을 자처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안식일이면 어김없이 유대 회당에 나가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율법이 정한 다른 모든 규정들도 충실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실제 품행은 너무 나빠서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를 외면했습니다. 하루는 랍비가 그를 조용히 불러 타일렀습니다.
“여보게, 몸가짐과 행동거지를 똑바로 하고 다니게.”
그러자 사나이가 인상을 쓰며 대뜸 대꾸했습니다.
“저는 율법이 정한 날이면 꼬박꼬박 회당에 나가서 기도하는 경건한 신자인데요.!”
이 말에 랍비는 이렇게 설명해주었습니다.
“여보게, 동물원에 매일 간다고 해서 사람이 동물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 사나이는 율법의 나무들 앞에 눈이 가려져 정신의 숲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이 알맹이는 빼고 법조문의 껍데기인 ‘글자’에 매달렸듯이 말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율법을 섬기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주의를 배척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법의 근본정신을 도외시한 채 법규 준수만을 고집하는 그릇된 자세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러한 법의 가치 전도에 따른 잘못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주일미사에 참례하고 성사생활을 하는 것은 그 자체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형식이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중요한 것은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내적인 정신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법과 의무는 규정준수보다는 정신에 따라 판단해야 마땅합니다. 선악(善惡)을 가리는 것은 글자가 아니라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울타리 안에 있는 정원보다 울타리를 더 소중히 여길 수는 없습니다. 글자와 규정에만 매여 그 정신과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외적 규정이라는 나무를 지나 정신의 숲으로 들어서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하느님 안에 자유롭게 호흡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일미사를 꼬박꼬박 지키고 일 년에 두 번 고해성사 열심히 보고 교무금 잘 내고 있으니 나는 신자로서 할 일을 다 했다.’ 라고 말한다면 탈무드에 등장하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와 다를 바 없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루카 6,27-31 말씀에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는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물론 성경 말씀처럼 다 지키고 살기란 어렵겠지요. 아니 불가능 하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사랑의 마음은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을 한 번쯤 되돌아보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미안합니다. 실례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사랑합니다.’라는 말만 잘해도 세상은 좀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요?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