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대구에 갔습니다.
대구 모 대학 교수로 있는 시동생이 자기 수업시간에 특강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보다 나이 많은 시동생인 그는 많은 형제 중에서도 돋보이게 겸손하고 착한 사람이지요.
제가 어려울 적마다 위로해주고 도움을 주는 '천사표 시동생'입니다.
믿음이 깊어, 늘 기도도 열심이고 가족들에게 소리없이 사랑을 주며, 지금은 대구 꾸르실료회장으로
봉사합니다. 제가 세례를 받는 날 오겠다는 걸 겨우 만류했는데, 전화로 "형수님, 축하해요. 너무 기뻐요"라며 아이처럼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어제 대구역을 오가는 차 안에서, 함께 점심을 먹으며
저와 시동생은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때 간혹 보는 터라 어제처럼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눈 적은 처음이었던 같습니다.
화제는 단연 신앙생활이었지요.
무척 가난한 집, 농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다른 형제들처럼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시골동네 공소에서 미사를 드리고 싶었지만, 당시 비신자였던 아버지 때문에
자주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에게 생생한 어릴 적 기억은, 좁은 방에서 나란히 누워 잠든 어린 자식들 머리 맡에서 묵주기도를 드리는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밤늦도록 콩나물시루에 물을 붓고 또 붓으신 후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그 모습, 그 소리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는 수년간 노환으로 거동도 못하고 방에 누워계신 어머니를 찾아뵐 적마다 밤에 머리맡에서 하염없이
묵주기도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종일 한 말씀도 안하시는 어머니는 '아멘'하신답니다.
형들이 외국으로 서울로 공부떠난 후, 명석했던 그였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을 생각해 고향에서 상고를 나온 후 대구로 가서 취직을 했습니다. 그리고 동생들을 대구로 데려와 손바닥만한 월세방에서 작은 월급으로 동생 3명과 자취하며 공부시켰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야간대학에 진학해, 대학과 대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20대 후반에 본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성공시대' 주인공이 될 만한 이야기이지요.
그리고 늦은 나이에, 남겨진 동생들 생각에 울면서 군입대를 하였는데, 그 어렵고 외로운 상황에서 다시
하느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담담하게 웃으며 말하는 그에게 전 '그렇군요. 그랬었군요.."라며 한마디 한마디를 귀로 마음으로 가슴으로 깊이 들었습니다. 그의 믿음, 겸손과 사랑의 일상이 어디서 오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교수가 되고, 전공분야에서 많은 책도 내고 인정받는 학자인 그에게서 조금도 권위와 자만의 모습을 본 적은 없습니다. 오랫동안 보아왔지만, 누구를 비난하거나 서운해 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자랑할 일이 있으면 그저 조용히 옆에 와서 '형수님, 저 이런 일이 있어요'라고 웃으며 말합니다.
그는 학교일 외에 모든 시간은 성당일에 사용합니다.
더 일찍 믿음을 가졌더라면 사제가 되었을 것이라던 시동생은, 회계사이기도 하니 은퇴 후엔 전공을 살려 성당일을 하겠다고 하더군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제게 묵주기도하는 방법을 자상하게 알려주고는 "먼 길 와주어서 고마워요 형수님. 신앙이 하느님이 제 삶을 다르게 만들어주었어요. 기도 많이 하세요.."라며 배웅인사를 해주었습니다.
'모든 인생의 길에는 사람들이 있다. 인생은 인간들 사이에 난 길이다". 사람들이 "왜 우리는 이 땅에 오게 되었습니까?''라고 물으면,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대답한다('피에르 신부의 유언' 중)는
글이 생각았습니다.
어제 제 남은 인생의 길에서, 시동생이자 신앙의 동반자인 한 사람의 귀인을 만났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