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마르타와 마리아 (루가 10, 38-42)
그들이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해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가르침을 귀담아 듣고 있는 베다니아 여자 마리아는 관상의 최초 감흥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귀감이다. 베다니아 여자 마리아는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을 아는 단순한 지식에서가 아니라, 그분의 존재와 실질적인 친교를 이루는 것은, 말을 하거나 무슨 일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상대방의 현존을 선물삼아 그 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드리고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는 이 선물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이해하는 관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우정을 발전시키는 시각에서 보면 성서 말씀은 친교로 이끌어주는 대화의 단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렉시오 디비나는 우리가 천상으로부터 영감을 받는다고 믿고 있는 말씀의 봉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렉시오 디비나의 실천은 개념적인 차원에서 무엇인가를 배우거나 성서공부에 그 목적이 있지 않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만나듯이 극진한 정성으로 수행하는 성서 봉독이다. 거룩한 말씀을 음미함으로써 상상력, 기억력, 추리력은 그리스도의 정신과 그분이 사고하고 느끼는 방식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화 이해와 그에 대한 응답이 단일한 소망이나 심지어 단일한 낱말로 단순화 하게 되면 대화를 뛰어 넘어 하느님과 친교를 맺는 데 도달하게 된다.
시각적으로 적응된 사람은 기도 중에 내적으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걸 더 좋아할 수도 있는데 이같은 수행에서 우리와 하느님은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에 찬 시선을 온몸으로 받기만 한다면 그분의 눈길을 끌기 위한 합당한 응답은 동의하고 몸을 내맡기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영적 집중력을 유지하는 또 다른 방법은 호흡이다. 이 수행법은 하느님의 영을 들이쉬고 사랑을 우주로 내쉬는 데 맞추기만 하면 된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영적 집중력을 일깨우게 되면 우리는 순수한 신앙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공경하고 기다리는 것 외에는 늘 말씀과 특정 행위를 뛰어넘어 신비의 현존 속에서 휴식하게 된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응시하고 성령을 호흡하는 이 세가지 성스러운 상징 하나하나를 따로따로 활용함으로써 우리는 순수한 신앙을 통한 하느님의 총체적인 사랑에 찬 현존에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우리가 내적침묵 속으로 침잠하여 하느님 안에서 휴식을 취하라는 부르심을 받는 것은 귀담아 듣거나 바라보거나 호흡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유추작용에 의한 영적여정은 우리가 어떤 말도 듣지 않으면, 어떤 표상도 바라보지 않고 어떤 숨결도 느끼지 않을 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