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착한 사마리아 사람 (루가 10, 30-3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무엇이라고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영혼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그 율법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해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담긴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당시 유다의 교계사회를 알 필요가 있다. 그 사회는 사제와 레위인과 일반 이스라엘인 혹은 평신도라는 세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룩한 사람과 장소와 물건들은 비속한 것들과는 엄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들—내부인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외부인들—과 철저하게 구분되었다. 사마리아인들은 비단 외부인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철천지 원수요, 유다교에서 떨어져 나간 배교자로 취급받았다. 그들은 다윗왕이 통치하던 시절에 같은 민족에서 갈라져 나간 이스라엘 북부 지파들의 후예였다. 당시 랍비 문헌에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음식을 먹는 자는 돼지의 먹이를 먹는 것이다.” 라고 나와 있을 정도였다. 말하자면 사마리아 사람은 유다교 배신자요, 절대적인 부패덩어리나 진배 없었다.
비유 첫머리에서 이스라엘 사람으로 추정되는 나그네 하나가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던 도중에 강도를 당해 반쯤 죽은 상태로 길가에 버려지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고 나서 그 사회의 교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등장한다. 사제는 그 사람을 보고는 그냥 지나친다. 교계라는 사다리 한 계단 아래에 있는 레위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두 사람이 희생자를 그대로 지나친 이유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율법은 사제와 레위인에게 혈육이 아닌 사람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하지 못하도록 명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사람이 “반쯤 죽어”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그냥 지나칠 구실은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청중은 이 두 사람과 그들의 무정한 처사를 자신과 동화(同化)할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폭행당한 희생자를 자기와 동화할 가능성 또한 전무하다. 그러기에 일단 팽팽해진 긴장감은 그 다음에 그 길로 내려올 사람이 누구냐는 데 맞추어진다. 당시 유다사회의 가치관으로 미루어 볼 때 백마 탄 기사처럼 나타나서 부상자의 상처를 치료해줄 사람은 이스라엘인 평신도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청중은 모두가 자기네 문화적 사고방식을 새롭게 다지고 흡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이 줄거리는 이스라엘 구원자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오르게 짜여져 있다.
하지만 막상 그 길로 내려온 사람은 누구였던가? 유다민족과 종교의 철천지 원수인 사마리아인이었다. 예수의 이야기를 듣던 청중은 예리고 길목에 출현할 사람이 누군가를 알고 싶어 잔뜩 숨을 죽인다. 그동안 줄거리가 교묘하게 짜여진 이야기에 길들여진 그들은 그 사람이 사회계층이라는 사다리에서 가장 아랫 계단에 속하지만 자신들과 처지가 같고 그래서 흔연히 받아들일 마음이 있는 이스라엘 평신도일 것으로 예상한다. 그런데 끔찍스럽게도 다음에 나타난 나그네가 사마리아 사람인 것이다. 충격이 일단 가라앉으면서 그들에게 맨 처음 떠오르는 생각은 ‘이 자는 틀림없이 가련한 희생자를 해치고 말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 사람은 부상자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간호를 해준다. 그리고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숙식비까지 지불한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만 청중은 이야기에서 자기와 동화랄 수 있는 인물을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들은 사제나 레위인이나 희생자와 동화하지도 못하지만, 그렇다고 사마리아인과 동화하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다. 그런 일은 곧 자기네 철천지 원수의 동정과 도움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선택이다. 따라서 이들 청중에게는 이 이야기가 그저 지어낸 것이거나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거나 할 뿐이다.
이 비유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하느님 나라에는 정치적 경계나 종교적 경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 사회의 낡은 도시들은 이 새로운 나라와는 전혀 무관하다. 예수께서 설파하시는 나라에는 내부인과 외부인을 가르는 장벽이 없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민중의 마음에 신성한 것들의 중심축 노릇을 하던 예루살렘 성전이 더이상 거룩함의 독보적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착한 사마리안 사람이라는 인격체를 통해 이제까지의 의문이 여지 없이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던 사회적, 종교적 경계선을 말끔히 치워지고 있는 것이다. 고대 중동 문화권에서 특히 선호하던 행습 하나는 누가 안에 있고 누가 밖에 있는가 하는 기준을 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보여주시는 나라에서는 누가 내부인이고 누가 외부인인가를 정할 길이 없다. 이런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사회적, 종교적 차별성 외에 다른 판단기준을 전혀 알지 못하던 당대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소리로 들렸음에 틀림 없다. 초대 그리스도 신앙이 지닌 탁월한 통찰력은 하느님 나라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것이었다. 바오로가 말했듯이 “이제는 더 이상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구별이 없어진” 것이다.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은 보답을 받지 않는다. 하느님 나라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으로 입증된다. 사람들이 그 사랑을 받아 들이든지 말든지, 그 사랑에서 비롯된 동정심을 높이 사든지 말든지 상관 없다.
하느님 사랑은 그것 자체가 곧 보답이다. 하느님 사랑은 또한 불가항력적이다. 하느님 사랑은 누군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예수의 비유를 처음 들은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길을 지난 사람이 사마리아인이 아니고 기대했던 대로 이스라엘인이었다면 과연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게 되었을까? 우리가 반대에 직면하거나 비극을 겪지 않는다면 언제고 다양한 형태의 배척을 극복하게 될 수 있을까? 하느님 나라는 우리 인간성의 어두운 면이나, 우리가 더없이 훌륭한 의향을 지니고 타인을 위해 봉사할 때조차도 혼탁한 동기가 끼어들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굴욕감처럼 우리가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것 속에서 더없이 활발하게 작동할 수 있다. 은총은 우리가 특정한 환경에서는 온갖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이끈다. 우리의 생활환경이 굶주림이나 심각한 질병 또는 일정 수준의 경쟁으로 인하여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행동했겠는가? 사마리아 사람은 우리가 어처구니 없는 부패와 동일시하는 어떤 것을 표상한다. 여기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던 우리의 가치관이 심각하게 훼손된다. 우리는 우리가 혐오하거나 불신하는 이들의 미덕을 인정하도록—어쩌면 그들의 연민어린 도움까지 받아들이도록—강요받고 있다. 하느님 나라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네 삶으로 들어오고자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자비를 베풀고, 문과 창문과 온갖 종류의 쓸데없는 장벽들을 걷어내기를 바라신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는 완전한 악으로—하느님이 가능한 가장 완전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들어오시는 최고의 가면으로—비치는 인간 또는 사건에 해당하는 사마리아 사람의 메시지다.
예수의 비유는 듣는 이들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을 남긴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너는 하느님 나라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생각은 당대에 알려져 있던 것과는 다르다. 그분이 보시기에 첫 세기 팔레스티나 문화가 지닌 사회적 도식은 더이상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데 적합한 매개체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과연 듣고 있는 청중을 어떤 자리에다 배치하고 있는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사회의 기대를 넘어서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작용을 사마리아 사람의 동정과 동일시하고 계신다. 사마리아 사람이 개종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하느님 나라가 종교적인 자세나 마음가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가상적인 적은 우리에게 가장 후덕한 은인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 비유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는 결코 고정된 사회적, 윤리적, 인종적, 민족주의적, 경제적 또는 종교적 경계선들이 없다. 거기에는 내부인도 외부인도 없고, 선택받은 사람도 선택받지 못한 사람도 없다. 예수께서 보여주고 있는 아빠 (abba)는 인류라는 한 가족의 하느님이시다. 모든 사람은 다른 이들 모두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 게임의 이름은 다름 아닌 조건없는 사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