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록> 제삼권 제이장

2005. 9. 4. 오후 7:59:27

글자

제 삼 권  제 이 장

 

내 비참의 영상과 내 불더미의 섶을 함빡 담은 연극들이 나를 반하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이란 제가 몸소 당하기는 질색을 하면서 슬프고 애달픈 것들을 구경할 제면 게서 서러워지고 싶은 까닭이 무엇입니까? 구경꾼은 연극에서 오는 서러움을 실감하려 들고, 또 그 설움이 그의 쾌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참 이상야릇한 미침이 아니고 무엇이오니까? 사람이 그런 일로 더 느껴울수록 그같은 감정이 약하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혼자 참은 설움은 가엾다 이르고, 같이 참는 경우엔 가엾이 여김이라는 것이 보통입니다.

허지만 꾸며낸 연극 줄거리에 이 무슨 자비랍니까.

거기 관객은 가엾이 여겨달라고 채치이지 않고, 다만 설움에의 초대를 받을 뿐(역주: 비애의 심미학적 관찰과 분석이 볼 만 하다), 그리고 설움이 더할수록 그만치 극작가의 편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참상이 꾸며낸 것이든, 과거의 것이든 이렇게 연출될 때 관객의 설움을 자아내지 못하면 싱겁다고 역정을 내며 퇴장을 하고, 슬퍼지는 경우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즐거워서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럼 설움과 눈물이 좋아서입니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사람은 누구나 즐거움을 욕구한다는 것입니다. 혹 가엾게 되기를 누구나 싫어하는 반면, 가엾이 여기기를 즐겨하는 것이랍니까. 이러저면 자연 시름이 없지 아니한 법이라, 이 한 까닭으로 시름이 좋아지는 것이옵니까. 이 또한 우정의 샘구멍으로부터 오는 것이온데, 그렇다면 가는 곳은 어디며 어디로 흐르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끊는 역청의 분류 던적스런 육욕의 허허공공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갑니까! 거기 하늘엣 청정에서 토라지고 버려진 우정이 제멋대로 소용돌이치며 변모하는 것이 아니옵니까. 그렇다면 슬퍼해주는 것조차 나쁜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때로는 시름도 사랑할 일이다. 허나 다만 더러움일랑 내 영혼아, 삼가라.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 만세에 기리고 들어높일(다니 3,52) 내 하느님의 살피심 아래 제발 부정함을 삼가다오. 지금도 슬퍼해주는 마음이 내게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적엔 풋사랑하는 자들이 무대에서 너절하게 해해거리는 꼴을 같이 즐거워했고, 그런 것이 비록 연극에서 상연되는 한 가상에 불과했지만 그들이 서로 헤어질 때면 동정이나 하듯 슬퍼했으니 결국 두 가지를 다 좋아한 셈이었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서는 삿된 향락을 채우지 못하거나 가엾은 행복을 잃고 고민하는 자보다도 오히려 죄중에서 희희낙락하는 자를 더욱 동정하는 것이다. 진정 이것이 훨씬 더 실다운 동정인 것이나 이 경우 시름이 달갑지는 아니한 것이다. 왜냐하면 불쌍한 이를 아파하는 사람이란 그 사랑 까닭에 추어주어 마땅해도 진짜 동정하는 사람이면 차라리 아파할 거리가 없기를 더 바라기 때문이다. 아니할 말로 심술궂은 선심이 있다 하자. 거짓없이 실답게 불쌍히 여기는 자가 자기가 불쌍히 여기기 위하여 불쌍한 사람들이 생기기를 원할 것인가? 그러므로 시름도 기릴것이 따로 있고, 좋아해야 될 시름이라곤 아예 없는 것이다.

영혼들을 우리보다 길게, 높게, 깨끗이 사랑하시는 하느님 내 주시여, 당신은 아무런 시름을 느끼지 않고 한결 다함없이 불쌍히 여기시나이다. 그러하오나 그 누가 이에 미칠 수 있으오리까. 그러하오나 그즈음의 나는 시름이 좋아서 시름 있기를 바랐었습니다. 오죽하면 가상적 연극의 남의 설움에 광대의 놀이가 즐겁고, 그에 홀딱 반하여서 눈물을 쥐어짜는 판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신 양떼에서 떨어져나온 가엾은 양 한 마리! 당신의 우리(圍)가 가깝하대서 더러운 옴이 오른 것이 아니었습니까. 시름을 좋아하는 버릇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구경하는 것마다 실지로 해보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깊이 파고들려고는 않았습니다만 보고 듣는 것에서 마치 살갗이 긁히우듯 싫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긁어주는 손톱자국은 염증, 피고름이 생겨 흉하게 터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나의 삶! 어찌 이것이 삶이었사오리까, 내 하느님이시여.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