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 해설] 41.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 (2)

2005. 9. 18. 오전 1: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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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 (2) (루가 9,28-36)

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쯤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은 구름 속으로 들어가면서 그만 겁이 났다.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해설] 모세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눈 다음에 얼굴을 천으로 가려야 했다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들을 놀라 달아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떤 조치를 취하셨을까? 예수의 비우심은 당신의 신적 권능을 벗어 던지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 산으로 데리고 오신 세 제자를 주목하라. 우리는 참 운 좋은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은 함께 갈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하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이력을 한 번 살펴보라. 베드로는 메시아의 오른팔이 되고 싶어 안달했다. 결국 바라는 바를 이루기는 햇지만 굴욕의 문지방을 넘어선 다음에야 그럴 수 있었다. 야고보와 요한으로 말하자면 한 발자국만 삐끗했어도 테러리스트가 될 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마리아 동네 사람들이 쌀쌀맞게 굴었다는 이유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없애버리고 싶어했다. 그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핵폭탄을 터뜨리고 싶어하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초대를 받지 못할 것으로 단정지어서는 안된다. 제자들 개개인이 길다란 명세표를 만들 만큼 인간적인 잘못들을 많이 저질렀던 것을 감안할 때 눈구나 거룩한 산으로 초대받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까 누구나가 거룩한 변모를 체험하고, 구름에 싸이고, 하느님 음성을 듣고, 고요한 정적을 함께 누리고, 그들처럼 두려움에 떨도록 초대받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느낀 두려움은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두려움이나 화들짝 놀라 도망치도록 만드는 그런 두려운 감정이 아니라, 사람을 꼼짝없이 구름 속으로 끌어당기고 어둠속에 감추어져 있는 신비를 감촉하고 맛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신비의 매혹, 그것이었다.

 

거룩한 변모의 은총은 우리 안에 숨어계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이 발산하는 찬란한 빛이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하느님의 활력은 (예수의 일상생활에서 그러했듯이) 감지되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현존한다는 사실이다. 사도들이 갈릴래아로 여행할 때 늘 예수의 현존 안에 자리하고 있었듯이 우리 또한 늘 그분의 현존 안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그분의 현존을 감지하는 일은 특별한 순간들에 국한된다. 우리는 영적 위로를 체험함으로써 거룩한 변모에 동참한다. 우리는 이 선물을 음미하고 누린 다음에는, 예언자들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예수께서는 산을 다시 내려가시듯이 일상생활 속의 평범한 일들과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혼란스럽기 일쑤인 우리에게 익숙한 기도상태로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예수의 거룩한 인성이 그분의 몸, 그분의 먼지 묻은 발, 헝클어진 수염이 당신의 신성을 감추고 있듯이 그런 혼란 상태는 실제적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감추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는 동안, 특히 수난과 죽음을 겪으시는 동안 전시되어 있는 상품 꾸러미가 결코 아니셨다. 마찬가지로 일상 생활에서도 예수는, 부침하는 우리의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들, 표출되는 무의식, 발작하는 욕정과 교만에 가리어져 보이시지 않는다. 하느님의 활동은 늘 현조하시지만 우리의 신체 기능들은 거룩한 변모의 은총이 우리에게 주입될 때라야 비로소 그것을 감지한다. 우리는 기도를 무엇보다도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결코 부활이 먼저 오지 않는다. 부활은 우리가 그분과 수난을 함께 나눈 다음에 오며, 이때는 영적 여정을 편안한 소풍으로 만들기에는 너무 늦어 보이지만 인간의 지독한 오만을 꺾는다는 관점에서 보면 아주 적절한 시간에 해당된다.

 

 

20.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 (마태 17, 1-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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