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삼 권 제 사 장
그런 자들 가운데서 나는 어린 나이로 웅변 교과서를 배우고 있었는데, 빼어나고 싶은 뜻은 사람들의 인기가 좋아서 마음이 들뜨고, 그러기에 해로운 것이엇습니다. 배우는 과정의 차례를 따라 치체로라는 사람(역주: 로마의 철학자, 정치가, 대웅변가. 저자가 가장 잘 알고있는 인물이건만 “…라는 사람”이라고 적은 것은 약간 비꼬는 말투이다. 이미 계시진리의 증언자, 대변자가 된 성자에 있어, 과거에 그가 열중하던 위대한 사람들은 벌써 위대한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저자는 하느님 앞에서 말하고 있지 않은가?)의 책에 이르게 되었는데, 비록 그 내용이 다 그렇지는 아니할망정 문체만은 모든 사람이 찬탄하는 바입니다.
[호르뗀씨우스](역주: 다만 아구스띤의 저서를 통하여서만 짐작할 수 있는, 지금은 얻어볼 수 없는 치체로의 대화편. 웅변술보다도 철학적 연구가 더 우수하다는 것이 그 줄거리로, 두 권이었다 한다.)라 일컫는 책으로서 철학에의 권유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헌데 그 책이 내 성정을 아주 바꾸어버렸고, 주여, 당신께로의 내 기도에 변화를 일으켰으며, 나아가 내 희망 절원(切願)까지 딴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나의 헛된 희망은 어느덧 모조리 시들해지고, 불멸의 예지를 목말라함에 마음은 믿을 수 없으리 만큼 헐떡여서 드디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신께 돌아가고 싶은 까닭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혀끝을 날 세우기 위하여—이태 전에 아비가 죽고, 내 나이 열아홉이엇을 떄, 어미의 돈으로(역주: 과부가 된 어머니로서는 아들의 학자금을 댈 수가 없어 친구 로마니우스의 도움을 받았다. 제6권 14장 참조) 이를 사려던 것이었습니다만—결코 혀를 날 세우기 위해서 그 책을 읽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애바르게 된 것은 그의 말투가 아니라, 말하는 것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님하, 땅엣 것에서 당신께로 날고자 내 마음이 얼마나 타고 있었나이까. 얼마나 타고 있었나이까. 그래도 당신이 무엇을 내게 시키실는지 이를 알지 못하였사오니 “예지가 당신 안에 있기”(욥기 12,16) 때문이었습니다. 예지의 사랑이 희랍어로 Philosophia(철학)이라 이름하는만치 그글에 열중하게 되었습니다.
철학이라는 크고 의젓하고 비위 당기는 이름으로 자기네 어긋난 인식을 알쏭달쏭 채색해서 속이는 자들이 있사온데, 그때나 그 이전에 그랬던 자들 거의 전부가 그 책에 적혀 드러나고, 당신 성령이 착하고 공경스런 당신 종을 시켜 끼치신 생명의 교훈이 거기 나타났사오니 “아무도 세속의 지혜와 허무한 궤변으로 너희를 속이지 않도록 삼갈지니 이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전래된 것과 세상의 원리 위에 의거한 것이요, 그러나 결코 그리스도 안에 의거하는 바가 아님이니라. 대저 천주성의 풍부하심은 다 저 안에 실제적으로 계심일새니다”(골로 2,8-9) 하였습니다.
그즈음으로 말씀하오면—내 마음의 빛이신 당신이 아시다시피—사도읭 이런 말씀을 아직 모르던 때라, 그 훈계에서 마음에 들던 것은 이런 저런 학파가 아니오라, 다만 예지 자체로서 그야 어떻든간에 내가 즐겨 찾고 얻고 움켜서 힘껏 안아보고자 그 말에 글린 것이엇고, 또한 그에서 불붙고 타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북받치는 정열 속에서도 오직 한 가지 내 마음이 싸늘해지는 것은 거기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지 않은 점이었습니다. 이 이름! 주여, 당신 아드님, 내 구속자의 이 이름이야말로 당신의 어여삐 여기심으로 내가 아직 어미의 젖을 먹을 때부터 여리고 여린 내 마음이 정성스레 마시고, 속 깊이 새겨두어서 이 이름이 없는 것이면 제아무리 박학, 세련, 진실된 것이라도 나를 오롯이 심취시킬 수는 없었습니다(역주: 모니까의 교육이 아주 철저하였음을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