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피정때 이성헌 신부님 강의내용 - 이제사 정리했음^^

2005. 7. 22. 오전 12:53:15

글자

 이성헌 신부님 강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이 시간에 다른 재밌고 세련되고 화려한 곳이 많이 일이 일어났을텐데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을 뵈니 커다란 은총이라고 생각이 든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건 대견해보이지 않지만 다른이들은 대견해 보인다. 어떤 이는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할지로 모르고 어떤 이는 카바레에 가있을지도 모른다.

어떤이는 나름대로 즐거워하는 일을 할 것이다.

그러나 딱딱한 의자에 앉아 하느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여러분이 제 눈에는

너무다 아름다워 보인다.

성령님처럼 저도 제 마음에 끌리는데로 시작하겠다. 가장 좋아하는 성서 구절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 이야기이다. 너무나 믿었던 스승 예수님, 잘 될 것 같았다. 3년동안 따라다니면 조그만 자리라도 내게 떨어질 것 같은 관심이 있었다. 마지막 순간은 십자가 아래서도 뭔가가 큰일이 있을거 같은 뭔가가 이때쯤은 될꺼라는 생각만 하였을 것이다.

새롭게 바꾸는 메시아 구세주를 기대했을 것이다. 지금쯤 천둥 번개를 쳐서 뭔가 다른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기다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그러나 어떠한 일도 아무것도 않 일어나고 그냥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하느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내 뜻이 아닌 하느님 당신뜻에 따라 이루어 지소서! 하셨다. 실망한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 제자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걸어가고 있는 그 제자들에게 다가오시고 동행하게 된다. 처음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한사람(글레오파)이 “여기서 일어난 일을 모른단 말인가?” 낯선 나그네 예수님께 묻는다.  “누구냐?”물으시자 여전히 “모르느냐?”고 반문한다.

예수님의 죽음을 십자가상의 죽음에 대해 알려준다. 어떤이들은 빈 무덤만 보고 와서 하는말이 그분은

살아계시다는 것이다. 가보니 무덤이 빈 무덤이었다더라.

예수께서 자기 영광을 받기 전에 고난을 받아야  ???(못적음) 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신 날이 저물어 저녁식사 중 빵을 떼어 주시자 그때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았으나. 예수님은 사라지고 제자들은 회상을 하게된다.

빵을 떼어 줄때 제자들이 알아보았다.

-->언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는지? 

잃어버린것에 대해서 슬퍼하는 태도로 계실 때 예수님은 그 자리에 계신다. 잃어버린것에 대해서 슬퍼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끼실 자리가 없다.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인정할 수 없고 천번만번 이야기하는데 일어난걸 어떡합니까?

않 일어 났을꺼라 꿈속에 상상한다.

슬픔은 두가지 - 회한에 빠지고

                감상에 빠진다.

하나는 내가 잃어 버린것에 대해 감사하는 일. 하나는 한서린 그 사랑을 상대방에게 주는 것이다. 

많은 것을 잃어도 모든 것은 잃지 않았다는 사람, 조금 잃어도 다 잃었다고 하는 사림이 있다.

다 그 사람이 건너야할 강인 것이다. 이제까지 내가 걷던 익숙한 길은 아닐지라도 새로운 길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한다.

예전에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적이 있었다. 화가 나고 상처를 받는(가장 사랑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한마디 던진 말가지고 두고 두고 마음에 되씹는다. 마찬가지로 항상 슬퍼하는 일을 한으로 몰고갈때가 있다. 감사하는 사람도 있고 한으로 남기는 사람이 있다.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차린다. 예수님을 점점 믿게 된다. 이 두 제자가 믿지 않는 것이 있다.

낯선 사람은 믿지 않았다. 귀를 기울이기도 하였지만, 제일 만나기 싫은 사람이 자기 이야기만 계속하는 사람이다. 독일 속담에 “넌 왜 자꾸 네 자랑만 하니? 나는 내 주장만 하는데..”란 말이 있다.

책 100권 읽은 사람과 1권 읽은 사람중 싸우면 누가 이길까? 한권을 읽은 사람이다. 1권을 읽은 사람은 죽어도 그 내용만이 맞다고 본다. 100권을 읽은 사람은 다양한 정보를 지닌다.


‘말’의 시작은 듣는 것이다. ‘소리’는 아, 야, 너.. 아무의미가 없다. 말이란 의미가 전달 되는 것이다.

들어야 제대로 된 이야기가 나간다. 말을 하려면 들어야 한다.

박광수라는 만화가의 작품에 자기 집의 바퀴벌레를 완전히 박멸하는 방법이 있다.

1. 가장 말이 많은 바퀴벌레를 방 바닥에 붙인다.

2. 라이터로 바퀴벌레 항문을 지졌다 붙인다.

3. 그 뒤 살려주면 바퀴벌레가 사라진다.(이집 주인 욕을 하며..)

낯선 사람이 이야기하면 그가 어떤 아쉬움이 있는지 귀를 기울여 들어라. 이웃을 위하여 귀를 기울이고 들어라. 날이 저물어 동행하던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한다. (낯선이를 초대) 개신교라 않되고 여호와 증인이라 않되고 쳐버리는 것이 아니라 낯선이를 초대하라! 


함께 머물러서 예수님을 만나볼수 있었다.

빵을 쪼갤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다. 언제 빵을 떼어 나눌 수 있는가? 나중에는 없다 바로 지금!

신부님 언제 시간 있으면 저녁이나 하시지요?(그릇됨)  몇일, 몇시에 하시지요?(바름)

재물 뿐만 아니라 마음을 나누어야 한다. 마음이 없이 재물을 나누게 되면 본전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식이 부모님께 본전 생각을 한다면 좋을까? 자녀가 엄마가 아픈걸 보고 “엄마 왜 아퍼?”하고 설거지

청소를 해놓는다면 엄마의 눈에 자녀가 이뻐 보일 것이다. 엄마 나 착한일 했으니5,000원을 달라고 한다. 댓가가 있으면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다.

아름다운 것 = 조건 없는 사랑

나눈다는 것은 조건 없이 나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랑, 이런 나눔은 하느님께서만이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고 일치함을 느끼는 순간 얼마나 충만한 기쁨의 순간인가? 그것을 느끼고 계속 충만함으로 가면 좋은데 일축 예수님이란 확인이 드는 순간 눈앞에서 사라진다. - 믿음의 외로움.

그 외로움은 새로운 ?????

여러 대중앞에서는 단어 선택을 잘해야 한다.

성모님께 천사가 나타나 성령으로 아기를 갖게 된다는 그 말씀에 우리라면 어떠했을까? ‘기도하자’ ‘솔직히말해’라고 했을 것이다.

성모님의 신앙이 어떻게 뿌리 내렸는가를 여기서 알수 있다.

멸시 조롱속에서도 생명은 끝까지 붙잡고 있었다. 성요셉도 대단하셨다.(=양순한 성 요셉) 연약한 성요셉 역시 조용히 파혼을 선택하신다. 그런 신앙의 선택을 하심이 대단하다.

그 과정을 겪고 맺고 여전히 힘든 상황에 예수님 사랑의 결실을 가지고 가겠다는 그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그러나 내공(=영성)이 있는 사람은 어떤 시련이 와도 뚫고 하느님께로 나아간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시련은 어떤 모양새가 각각 달라도 그 사람이 겪는 시련, 고독, 두려움이 있기 마련

이다.

가끔 혼인한 부부들이 외롭지 않느냐고 묻는다. 저는 반대로 결혼한 사람들이 외로우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같은 지붕아래 살면서.

혼자서 외로운 것은 그냥 외로우면 된다. 슬플때 그냥 슬퍼하자. 슬퍼하고 싶어도 옆에 있으면 눈치를 봐야한다. 얼마나 외롭겠는가? 그런 외로움을 끊고 우리는 그분께로 가야한다. 공동체의 형태도 잘 깨지고 있는데 상대방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긴다. 신학교도 마찬가지이다. 금방 실의에 빠지기도 한다.

신부님 때문에 성당을 않가기도 한다. “신부님 때문에 가는게 아니다 하느님보고 가는거다.”라고 위로해

준다. 영성이 뛰어난 사람이 없는 공동체는 뒤집어진다.

어떤 잘 닦여진 이들이 공동체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대로 살 때 공동체가 잘 이루어 진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은 어떻게 하나? 예루살렘으로 간다. 왜? 예수님의 부활을 알려야함으로.

예수님의 체험 후의 발걸음을 무시하지 말 것! 달면 먹고 쓰면 뱉는 신앙인의 모습이 꽤 많다.

잘되면 하느님 계시고 못되면 하느님현존을 무시한다. 한결같은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주 많은 시간을 우리는 지쳐있고 고민하고 아파하고 걱정해야 한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제자들의 발걸음은 매우 가벼웠다. 물론 시련이 있지만 그것을 넘을 각오로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잘못을 아는데 그치지 않고 인정하고 고쳐 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자 했는데 공동체의 여정 가운데 희노애락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 우리 삶의 크리스찬 여정

1)유혹이 있다. (예수님 공생활 4주간의 유혹)

  자꾸 세속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2)항상 최선을 다하되 하느님께서 움직이실 수 있도록 하여라.

3)세상은 빵이 부족한 것이 아니고 나눔이 부족하다.

  세상의 멸망은 자멸(스스로 멸망함)이다. 그런데 지구도 50년 비를 뿌리면 자정능력으로 스스로 커진

  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 모두 느꼈던 유혹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유혹임을 생각할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느끼지 못하면 외인과 똑같다. 유혹을 유혹으로 알고 시련을 알고 예수님의 현존안에 알아서 내공(영성)을 잘 쌓아가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열세번째 제자로 살아간다면 좋겠다.

어떤일이 있어도 특히나 어려운 순간에 더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자. 

- 그것이 그 사람의 신앙이다.  끝.

댓글 3

  • 2005년 7월 22일 오후 6:33

    어쩌면 이렇게 깔끔하고 정확하게 정리하쎴는지 감사할 따릅입니다. -바울로-

  • 2005년 7월 22일 오후 7:18

    13번째 제자 안젤라 화이팅. 다시 그때의 피정을 생각하며 읽고 음미합니다. 감사합니다.

  • 2005년 7월 24일 오전 12:19

    주님께서 도와주셨기에 가능하지요. 제 능력밖의 일이었습니다. 주님 제게 이런 영광을 주시어 감사하나이다. 아멘. 우리가 "예"하고 응답하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예수님. 넘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