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 하지 마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루가 1,30).
영웅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행동하고, 두려움을 조절하는 법을 익힌 사람들이며
두려움의 정체를 알고 그것에 대면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익스피어는 용감한 사람은 한번 죽는 반면에 겁쟁이는 수천 번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두려움 때문에 도망 다니는 사람들은 그로 인해 매일 사소한 죽음들을 맞이한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은 체포되어 사형집행을 받는 것과 같은 드라마틱한 일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강의를 하고, 병원에 가고,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과 대화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사람을 만나고,
의견 충돌로 논쟁을 하는 매일의 살아가는 삶 가운데서 발생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들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을 하지 못하며
할 수 없는 이름 붙여지지 않은 두려움에 떱니다.
정체를 알 수 없기에 그것에 대해 직면할 수 없고, 점점 더 그것을 더 키우게 됩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상황들로부터 피해 달아나 숨으려고 하는 데,
이것은 항상 상황을 더 나쁘게 그리고 더 두렵게 만들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도록 청하지도
그분으로부터 위로를 얻으려고 전혀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결국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결국, 두려움으로 인해 주눅이 들고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며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됩니다.
성모님께서 이런 식으로 두려움 때문에 영향을 받으셨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집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두렵다. 하지만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구나.
잊어버리고 다른 생각을 한다면 기분이 좋아지겠지.
일단 여기에서 벗어나 혼돈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지. 자 가자!”
이러한 시나리오대로라면,
성모님은 천사의 말을 거부하시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잠시나마 미루시려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실제로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고
일어나는 상황을 받아들이시고 두려움을 체험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말씀대로 이루어 지기를 바라시는 순명의 길을 통해 우리는 두려움에 이름지을 수 있고,
그것에 대처하는 법을 깨달을 수 있으며 하느님의 손길에 우리의 느낌들을 맡길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위험을 수반합니다.
성모님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온전히 자연스러우며 인간적인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분은 또한 두려움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은 용기이며,
이러한 용기는 두려움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는 것임을 보여 주십니다.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두려움이 몰려오면 무의식적으로 피해 달아나려고 하는 속성 때문에
용기 있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의지적인 행동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맞서 대면한다면,
우리는 두려움이 곪아터졌을 때 생기는 걱정을 피할 수 있습니다.
걱정은 위장과 정신을 갉아먹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마음과 영혼을 좀먹습니다.
이것은 혈압을 높게 하고 자존감을 떨어뜨립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을 알고 계셨으나 결코 걱정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당신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한복판에는 두려운 것들이 늘 도사리고 있지만,
우리는 마음으로나 정신적으로 근심하면서 안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걱정이 일상화되어서
아직 생기지도 않거나 전혀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걱정을 합니다.
우리는 지나친 걱정으로 자신들을 괴롭히며
부정적인 감정으로 꽉 차 있어 긍정적인 어떤 것이 자리할 공간을 마련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게쎄마니 동산에서 닥칠 일로 인해 걱정하셨는데
그것은 잠시뿐이었고 그 다음 “당신 뜻 데로 이루소서.”라고 아뢰며 당신께서 가실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는 안절부절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내일 일이나 일어날 일들에 대해 초조해 하지 마십시오.
하루의 괴로움은 오늘 겪는 것만으로 족합니다.
걱정한다고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습니까? 걱정한다면 수명을 단축시킬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편이십니다.
걱정하는 사람은 믿음이 약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영웅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행동하고, 두려움을 조절하는 법을 익힌 사람들이며
두려움의 정체를 알고 그것에 대면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익스피어는 용감한 사람은 한번 죽는 반면에 겁쟁이는 수천 번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두려움 때문에 도망 다니는 사람들은 그로 인해 매일 사소한 죽음들을 맞이한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은 체포되어 사형집행을 받는 것과 같은 드라마틱한 일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강의를 하고, 병원에 가고,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과 대화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사람을 만나고,
의견 충돌로 논쟁을 하는 매일의 살아가는 삶 가운데서 발생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들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을 하지 못하며
할 수 없는 이름 붙여지지 않은 두려움에 떱니다.
정체를 알 수 없기에 그것에 대해 직면할 수 없고, 점점 더 그것을 더 키우게 됩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상황들로부터 피해 달아나 숨으려고 하는 데,
이것은 항상 상황을 더 나쁘게 그리고 더 두렵게 만들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도록 청하지도
그분으로부터 위로를 얻으려고 전혀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결국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결국, 두려움으로 인해 주눅이 들고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며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됩니다.
성모님께서 이런 식으로 두려움 때문에 영향을 받으셨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집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두렵다. 하지만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구나.
잊어버리고 다른 생각을 한다면 기분이 좋아지겠지.
일단 여기에서 벗어나 혼돈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지. 자 가자!”
이러한 시나리오대로라면,
성모님은 천사의 말을 거부하시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잠시나마 미루시려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실제로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고
일어나는 상황을 받아들이시고 두려움을 체험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말씀대로 이루어 지기를 바라시는 순명의 길을 통해 우리는 두려움에 이름지을 수 있고,
그것에 대처하는 법을 깨달을 수 있으며 하느님의 손길에 우리의 느낌들을 맡길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위험을 수반합니다.
성모님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온전히 자연스러우며 인간적인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분은 또한 두려움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은 용기이며,
이러한 용기는 두려움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는 것임을 보여 주십니다.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두려움이 몰려오면 무의식적으로 피해 달아나려고 하는 속성 때문에
용기 있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의지적인 행동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맞서 대면한다면,
우리는 두려움이 곪아터졌을 때 생기는 걱정을 피할 수 있습니다.
걱정은 위장과 정신을 갉아먹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마음과 영혼을 좀먹습니다.
이것은 혈압을 높게 하고 자존감을 떨어뜨립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을 알고 계셨으나 결코 걱정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당신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한복판에는 두려운 것들이 늘 도사리고 있지만,
우리는 마음으로나 정신적으로 근심하면서 안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걱정이 일상화되어서
아직 생기지도 않거나 전혀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걱정을 합니다.
우리는 지나친 걱정으로 자신들을 괴롭히며
부정적인 감정으로 꽉 차 있어 긍정적인 어떤 것이 자리할 공간을 마련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게쎄마니 동산에서 닥칠 일로 인해 걱정하셨는데
그것은 잠시뿐이었고 그 다음 “당신 뜻 데로 이루소서.”라고 아뢰며 당신께서 가실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는 안절부절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내일 일이나 일어날 일들에 대해 초조해 하지 마십시오.
하루의 괴로움은 오늘 겪는 것만으로 족합니다.
걱정한다고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습니까? 걱정한다면 수명을 단축시킬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편이십니다.
걱정하는 사람은 믿음이 약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