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담교우 발생원인과 레지오 단원들의 대처방안

2007. 8. 1. 오전 6:48:25

글자
 냉담자 발생의 원인

 제 1절, 세속주의의 영향

    어느 나라든지 또 어느 시대든지 교회공동체 안에 활성화된 신앙인이 있는가 하면 또한 冷淡信者들도 항상 있어왔다.  불란서와 같은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 내에서도 오늘날 50-60%는 냉담신자로 알려져 있다.

 국민의 90%이상이 어릴 때부터 가톨릭으로 세례를 받고 성장하지만 평균 30% 정도만 실제로 일요일에 미사에 참여하는 실천신앙인(Fidèles pratiquants)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서구에 있으면서도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은 불란서보다 실천신앙인의 비율이 훨씬 더 높다.  이들 국가에서는 평균 60-70% 정도가 주일미사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란서는 어떤 면에서 서구에서 가장 세속화된 국가라서 그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서구의 전통적 가톨릭 국가들에서 냉담자가 발생하는 원인은 특히 세속화 현상, 물질만능주의, 종교적 무관심주의, 종교적 상대주의 등으로 인해 기존종교에 대한 가치나 매력이 상실된 것으로 판단된다.  과거엔 종교가 종교적 구속력뿐 아니라 사회적 구속력도 갖고 있었고, 절대주의적 배경아래 종교가 개인에게 상당히 많은 구속력을 행사해 왔었다.  그리하여 일반사회도 종교적인 영향권 내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지리상의 발견, 타종교의 가치에 대한 발견, 계몽주의, 반 계시주의, 인문주의의 확산, 산업혁명, 자본주의의 대두 등으로 인해 사회제도가 변화되어 감에 따라 정신적이며 종교적인 태도도 변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절대론적인 사고는 상대화되어 절대종교로 군림하던 그리스도교도 일반 종교들 중의 하나로 상대화되고 그 비교의 대상이 된 것이다. 

 또한 神 中心的인 사고도 人間 中心的인 사고로 전환되고, 지적이며 영성적인 것에 가치를 부여하던 태도에서 物質的이며 世俗的인 것에 가치를 두는 사고로 전환된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부상과 함께 金力이 주는 묘한 매력에 인간은 자신의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금력은 학벌이나 교양이 낮아도 품위있는 의식주 생활을 보장해 주고 인간을 외적으로 '인간다운' 모습으로 보여주게 하는 힘을 부여해 준다.  그리고 사회에서도 적절한 교양을 갖추고 성실히 사는 사람에 대한 존경과 가치를 두기보다는 금력을 통해 외적인 성취감에 그 만족을 더 구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고들의 변환이 근본적으로 신앙의 가치를 잃게 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 2절, 전통적 권위주의에 대한 거부

 신앙인들이 교회를 멀리하고 교회 공동체 내에서의 신앙생활을 멀리하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교회의 구태의연한 權威主義에 대한 거부의식이다.

 올바른 권위와 권위주의는 그 의미가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올바른 권위의식은 교회의 그 사명 수행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하며 보존되어야 할 태도이다.  權威는 그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의 직책과 인격과 태도에 깊은 관련을 맺는다.  권위는 그 직책에 상응하는 품위로서 직책수행에 있어서 반드시 따라와야 할 요소이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실 때, 권위를 가지고 행하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며, '이것은 새로운 권위있는 가르침이다'(마태 7, 28-29)라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권위는 스스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권한 있는 자가 자신을 대리하여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되신 자로서 하느님의 권위를 행사하셨다.  그리고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불리움을 받고 교육받은 후에 세상에 파견된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권위를 행사한 것이다.  교회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사도들의 뒤를 이은 후계자들이 하느님의 백성을 가르치고(敎) 성화하고(祭) 사목하는(牧) 삼중직분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사하는 것이다.  

교회의 권위는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며 근원적으로는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권위는 하느님의 백성을 성화하고 가르치고 사목하는 데에 적절하게 사용될 때 합당하며 타당한 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권위가 그 외의 것에 부당하게 적용될 때 문제가 된다.  교회의 사목과 성사생활과는 비본질적인 부분들에 독선적이고 고집스럽게 행사하는 교역자들의 권위주의는 이미 합당한 권위가 아니라 그 교역자 개인의 악에 물든 아집에 의한 것이다.  자신의 아집을 내세우면서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라는 것은 분명 언어도단이며 꼴볼견이 되고 마는 것이다.  현대인은 이러한 일에 민감하다.  그리고 합당하지 못한 권위에 순종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큰 모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옛날에는 교역자들이 평신도들보다 높은 교육을 받고 지식면에서나 교육수준에 있어서 상당히 상위를 차지했었다.  그러나 오늘날 평신도들도 높은 교육을 받고 각자 전문적인 지식과 기능을 겸비하고 있다.  이럴 때 각자 교육받은 이들로서 교역자가 자기 전공이나 전문적 분야도 아닌 부분에까지 독선과 아집에 의한 강요는 분명히 그것을 보고 겪는 이들에게 '인간적인 실망'을 안겨주게 된다.  그러므로 교역자는 자기 분야에서 즉 종교생활과 신앙생활 면에서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고 겸허한 자세로 봉사하는 입장을 보여줄 때 교회신도들의 신앙도 살아날 것이다.  교회의 권위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교회의 권위가 무너진다면, 인간구원을 위한 활동에 힘이 없게 될 것이다.  교회의 권위를 지키는 일은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맡은 책임과 소명을 성실히 이루는 데에 교권이 확립되고 냉담한 신자들의 마음을 녹여줄 것이다.  合當한 權威는 교회를 살리고 活性化시키지만, 不當한 權威主義는 교회를 죽이고 신도들의 신앙을 冷淡하게 만드는 주요인이 된다.

 

제 3절,  교회 공동체에의 소속감의 결여

 교세가 확장되어 많은 수의 신도들이 본당이라는 한 신앙공동체에 소속되어 신앙생활이 행하여 진다.  이 공동체 안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이들도 있다.  그리고 학식이 높은 이들도 있고 낮은 이들도 있다.  그리고 갓태어난 아기로부터 곧 죽음을 앞둔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령을 포함한 남녀노소의 신도들이 한 신앙공동체 안에서 종교생활을 하게 된다. 

 서울대교구의 경우 한 본당에 평균 5천명 이상이 되는 신자들이 있고 보통 왠만큼 큰 본당은 만 명을 헤아린다.  본당이 이렇게 비대해지다 보니 교역자들이 열심히 일해도 그 많은 교우들을 신앙적으로 돌 볼 기회가 부족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교회 교역자들과는 미사전례 안에서만 주로 만나게 되고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힘들게 되며 많은 수의 교우들이 匿名化된다.  

사제나 수녀들이 본당교우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일정한 수효에 불과하며 심지어는 그 교우가 자기 본당교우인지 아닌지도 모르게 되는 상황까지 있게 된다.  그래도 열심한 교우들은 본당 내의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기쁨도 맛보고 본당 내에 소속감도 갖게 되지만, 직장이나 생업관계로 이러한 기회를 갖지 못한 이들은 점점 공동체 의식이 희박해진다. 

 그리고 또한 이들을 본당 공동체에서 疎外感을 느끼게 하는 것은 소수 열심한 신자들이 너무 극단적으로 본당의 교역자들을 시간적으로나 관심적으로나 독차지하려는 경향 때문이다.  어떤 신자들은 신앙상담을 신청하기도 어렵고 또한 그 할애되는 시간도 빈약한데 어떤 교우들은 그 교역자들과 많은 시간을 독점할 때 거기서 또한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또한 신앙심을 식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냉담을 줄이게 하는 방법은 본당의 교역자들이 신자들과 골고루 사귀고, 관심을 표명하며 지도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수시로 가정을 방문하여 가정 내에 냉담하고 있는 교우가 있으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고 교회 내에 所屬感을 갖게 해 주는 일이 필요하다.

 

제 4절,  그리스도교 증거적 삶의 결여

 냉담의 원인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교인이 증거적 삶을 살아가지 않는 데에 있다.  證據는 성숙된 신앙인이 자연스럽게 내품는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로서,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질실, 온유, 절제이다 (갈라 5, 22). 

 교회 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 사랑에 충만하고, 기쁜 신앙생활을 하며, 마음의 평화를 간직하고, 어려움을 인내로이 극복하고 온유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선행을 실천하고 친절을 베풀 때, 누구든지 이 공동체에 참여하고 싶어하며 그 안에서 신앙의 보화를 나누기를 원할 것이다. 

 냉담자를 방지하는 방법은 교회 공동체의 각지체들이 그리스도교의 가치대로 삶을 실천하는 데에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溫柔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 5, 5)라고 참된 행복의 길을 말씀하셨다.  온유한 마음을 지닌 이들은 성령의 뜻을 따라 살고 있는 이들이다.  신자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마음 안에 하느님의 영을 받고 살고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마음의 온유함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나타난다.  물론 성격상으로 과격한 이들도 있고 선천적으로 차분한 이들도 있지만, 인간은 성령의 은혜로서 모두 온유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잘난체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싸움을 걸지 않으며 또한 다른 사람의 선이나 장점을 시기하지 않는다(갈라 5, 26).  잘난 체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보다는 자기의 自尊心만을 드러내게 된다.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 자기를 드러낸다. 

 이것은 자신이 지닌 장점이나 선을 오히려 악행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그것은 하느님을 위해서 한다는 일이 말뿐이며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일로 귀결되고 만다.  교회 내의 신도들이 서로 좋은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잘난척하지 않고 하느님의 은혜로 돌리고 서로를 격려하며 겸허하게 살 때 한 共同體意識을 지니게 되고 신앙이 식어지는 사람도 줄어들 것이다.  

교회공동체 안에 냉담자들이 많아지게 된 것은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교회구성원 각자 각자에게 그 책임이 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두게 된다"(갈라 6, 7)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오늘날 냉담자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교회라는 몸 전체가 각 지체를 돌보는데 無關心하고 게을리 한 결과이다.

 

제 5절,  냉담자 자신의 나태함과 신앙심 결여

 교회 안에 냉담자가 증가하는 또 다른 원인은 바로 냉담자 자신에게 달려있다.  냉담 신자들은 보통 한편으로는 교회 내에서 소외감을 느꼈고 또 교역자들과 어떤 이유로 불목한 사건을 체험한 이들이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 충분히 이해와 수긍이 간다.  하지만 이들이 이러한 이유로 교회 공동체와 멀리하고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는 것은 자신들의 세례성사때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부르심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스스로 저버리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가 자신을 알아주기만을 바라지 말고 스스로 봉사활동과 신심활동에 참여하여 자신이 겪은 불쾌한 체험을 극복하고 다른 이들이 당하지 않도록 스스로 노력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할 召命을 忘却하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보다는 자신의 불행의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그 責任을 轉嫁하기는 쉽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이 또한 교회내에 파벌을 만들고 교회의 활성화에 장애가 되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둘째, 냉담자의 또 다른 형태는 자신의 懶怠한 생활 때문에서 비롯된다.  이 나태한 생활에로 이끄는 것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缺乏에서 온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느님께서 올바른 길로서 주신 계명들을 존중할 것이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영광을 드리는 교회공동체의 예배에 기꺼운 마음으로 참여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내에서 인간 사랑을 위한 활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다.  그러므로 냉담자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고 또 그에 대한 가치도 못 느끼며 自尊心만을 강하게 내세우는 사람들도 많다.

셋째, 냉담자가 되는 이유로는 그들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敎理知識과 敎會常識을 배우고 익히는 일을 疏忽히한 데서 나타난다.  '신앙은 들음에서 온다'고 하였는데, 신도가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회피하고 자신의 편안함과 이기적인 목적을 찾는데 시간과 정력을 소모시킨다면, 그러한 신도의 마음속에 신앙심이 생길 수는 없는 일이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 먹고 사는데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생각 끝에 교회에 나가 예배보는 시간에 돈을 더 벌려는 생각을 갖는다면 신앙심은 점차로 약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일주일에 한번 주일미사에 참여하여 신앙강론도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교회서적들, 성서, 신심서적, 공의회 문헌, 그리고 교회활동과 상식, 그리고 신앙체험을 전해주는 가톨릭 신문, 평화신문, 경향잡지, 사목, 생활성서 등 이러한 서적들을 전혀 읽지도 않으면서 신앙심이 커지기를 원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다'고 하듯이 가톨릭의 교리와 그 입장도 모르고 그에 대한 서적도 읽지 않고, 또 교회 신앙공동체의 모임이나 예배에도 不參하고 無關心하는 것은 신도 스스로가 자신을 냉담의 길로 빠지게 하는 것이며 냉담의 책임을 스스로가 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넷째, 냉담이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신도들이 告白聖事를 忌避하는 데서 온다.  교회법에 '일 년에 적어도 한번은 고백성사를 보아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고, 한국 교회에서는 부활과 성탄 대축일에 고해성사를 보도록 하고 있다.  즉 올바른 신자라면 회개와 참회의 정신으로 부활을 준비하는 사순시기에 진심으로 자신의 죄와 잘못을 뉘우치고 죄를 고백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겸손되이 청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예수성탄을 참회와 기다림의 정신으로 준비하는 대림시기에 고해성사를 받고 예수님의 오심을 마음으로부터 준비할 것이다.  일 년에 적어도 부활과 성탄 때에는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는 이 최소한의 규정을 3년에 걸쳐 연속적으로 이행하지 못할 때, 교회에서는 이들을 신앙이 식어진 냉담자로 규정하는 것이다.  참회하는 마음이 없는 이는 하느님을 올바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을 올바로 사랑할 수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탄생과 부활을 마음으로부터 준비하기 위해 참회와 용서의 표시로 고해성사를 받는다면 최소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표이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져 지키지 않는다면 하느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못갖추는 것이다.  

부활과 성탄을 준비하기 위해 보는 판공성사 이외에도 연중 필요에 따라 보게 되는 고백성사가 있다.  어떤 이유로 해서 주일미사에 한번 빠지게 되면 고백성사를 보아야 영성체를 할 수 있는데 이것을 규정대로 지키지 못하게 되면 그 다음 주일부터 아예 미사에 불참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하여 이것이 장기간 계속되게 되면 신앙심도 식어지고 결국 냉담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주일미사에 한 두 번 빠지게 되면 먼저 고해성사를 보려는 마음을 길러야 하며, 그 밖에 다른 죄로 인해 영성체하기 어려우면 또한 고해성사를 보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고해성사를 본다는 것은 자신의 과오를 하느님께 인정하는 겸손된 마음의 발로이며, 또한 자신의 나약함이나 게으름으로 인해 신앙공동체에 끼친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러한 잘못에 빠지지 않고 기쁘게 살려는 회심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제 6절,   他宗敎 信仰에로의 轉向

  천주교회의 냉담자들 중에는 주일에 성당에 나오지 않는 대신에 다른 종교들의 예배의식에 참여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에 대한 수효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천주교의 신앙체계나 혹은 신심행사에 만족하지 못하고 보다 열광적이고 직접적인 신앙체험을 갈구하는 이들이라고 볼 수 있다.  천주교 신자들의 상당수가 여호와의 증인, 남녀호랑객교, 순복음 교회 등으로 나가고 있다한다.  그리고 요즘은 종말사상과 함께 종말을 주장하는 교파에 쏠려 다니기도 한다.

 여호와의 증인들 중 70%이상이 천주교 신자출신이라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 밝혀진 적이 있다.  천주교 출신의 여호아의 증인이 또다시 신앙이 약하고 회의적인 천주교 신자를 골라 여호와의 증인교로 포섭하러 다니고 있다.  남녀호랑객교로 빠지는 천주교 신자는 천주교의 복잡하고 어려운 교리에 소외되고 싫증을 느낀 자로서, 단순한 주문과 신앙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데 만족을 얻고 위안을 받으려 전향하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보통 경제적으로도 가난하고 사회적인 출신도 낮아서 천주교와 같은 규모가 큰 종교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소규모적이고 출신이 비슷한 이들 안에서 자신의 身元(Identity)을 찾고자 하는 이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으로 전향한 구 천주교인들 중에는 천주교와 같은 큰 종교 집단에서는 자신의 존재근거를 찾기 어려웠으나, 여호와의 증인교처럼 다른 이들로부터 선별되었다는 의식과 함께 그들에게 일정한 활동목표를 정해주고 소속감을 구체적으로 주기 때문에 그 집단 속에서 위안과 만족을 얻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순복음교회에 나가는 천주교인들 중에는 종교의 목적을 질병의 치유와 재산증식에 두고 있는 경향이 많은데, 이러한 목적을 천주교에서 이루지 못하자 그러한 점들을 위주로 하는 다른 교회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천주교 예식의 조용하고 장엄한 분위기보다는 열광적인 신앙형태에 마음이 쏠리는 이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여러 형태의 轉向者들이 천주교예식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냉담자로 규정되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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