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1 독서는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의 유다인들에 대한 박해(B.C. 167)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다니엘이 전해주는 현시처럼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난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는
구약성경에서 단순한 사람으로(시편 8,5) 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다니엘 예언서에서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란 박해를 이겨낸 유다인들을 칭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박해를 이겨낸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들이
인간적 조건을 훨씬 뛰어넘는 신비스러운 인간,
혹은 거룩한 이들 가운데 가장 연로하신 분이 앞으로 인도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구약의 전통에서
사람의 아들은 메시아로 해석했으며,
구약의 전통을 잘 살리고 있는 마태오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칭하십니다(마태 8,20).
박해를 이겨낸 사람들이
축성된 거룩한 사람들이 되어
모든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를 통치하시는 분을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2 독서에서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인격을 드러내는 이름이고,
그분의 하실 일을 나타내며,
다윗에게 하셨던 약속(2사무 7,1)의 증거자라는 뜻이 들어있음을 말해줍니다.
구원이란 사랑의 행위에서부터 나오며(예레 31,3),
속죄의 제사를 통하여 완성되고(레위 16),
사제가 되는 선택된 민족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 모여든 선택된 사람들이
하느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릴 때 늘 하던 영광송(묵시 1,6)을 가르쳐줍니다.
이런 영광송은 묵시록에서 자주 반복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야훼라는 뜻인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알파요 오메가다.”라고 하셨다는 것은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 사이에 모든 글자를 포함하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을 다스리실 분임을 말해줍니다.
사람의 아들,
알파요 오메가이신 분께서
이제 인간의 심판을 받으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왕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부른다는 것이
빌라도에게는 무척 거슬렸던 모양입니다.
로마로부터 유다인들을 다스릴 전권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빌라도 자신인데
고발된 예수님의 죄목이
유다인들의 독립운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미 유다인들 안에서는
언젠가 “의로움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이사 45,24) 메시아가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것이라는(사도 1,6)
독립의 열망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이한 것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차이점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요?”라고 빌라도가 물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마르 15,2)고 합니다.
예수님의 답변이 모호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실제로 예수님으로부터 빵을 잔뜩 얻어먹은 사람들이
억지로 예수님을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했었고(요한 6,15),
라자로를 살리신 뒤에 예루살렘에 오르셨을 때
축제를 지내러 온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가서
이스라엘의 임금님이라고 부르기도 했었습니다(요한 12,12-14).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빌라도가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라고 대답을 하십니다.
빌라도가 “무슨 짓을 저질렀소?”라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추구하시는 나라는
세속적 기원이나 정치적 권력에 의한 것이 아님을 밝히십니다.
임금이라는 신분에 대한 빌라도의 두 번째 질문에서는
“유다인들”이라는 말이 빠지고 결국은 임금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엉뚱하게 보이는 진리 타령을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나는 진리이다(요한 14,6)라고 하셨던 말씀을 되풀이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설명하셨기 때문에
빌라도는 그 나라의 소속이 어디냐고 재차 묻지를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관심사였던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나셨으며,
이 세상에 오셨음을 말씀하십니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시어”(태어나시어: 요한 1,11)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요한 1,9)
요한복음의 서두의 말씀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빛이신 그리스도를 증언하러 온 세례자 요한(요한 1,7) 역시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증언하였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증언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요한 5,33).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곧 진리라고 하십니다(요한 14,6).
그리고
진리란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면 깨달을 수 있는 것이며,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십니다(요한 8,31-32).
예수님께서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시는” 분이시지만
세상은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십니다(요한 3,11).
진리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며,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요한 18,37).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증언하시는 진리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라는 하나의 부르심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나라는 진리에 속한 사람들,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면서 자유롭게 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나라이며,
그 나라의 임금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모든 통치권을 가지셨음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섬기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하느님”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주재하시는 “알파요 오메가”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양떼입니다(요한 10,27).
그리고 하느님에게서 난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나지 않았다는 것,
즉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요한 8,47).
임금과 백성,
임금의 가르침과 백성의 순종,
임금의 사랑과 백성의 성실함.
이런 임금과 백성의 관계는 오직 진리로 연결되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임금이신 예수님께서는 불변하는 진리이시고,
동시에 그 진리를 증언하러 이 세상에 오셨고,
진리에 속한 사람들, 즉 당신께 속한 사람들을 보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놓고 이야기 하셨습니다(요한 18,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리이신 그분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요한 1,10).
진리가 여러분에게 무엇입니까?
우리 실생활과 비록 관련이 없다 할지라도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민주적인 이론이면 진리입니까?
아니면 절대 진리란 없다고 주장합니까?
비록 어리석음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목숨을 바치셨고,
기회를 놓친 패배자라 할지라도
정치적 논리에 휘말리지 않으셨으며,
환상이라 비웃는다 할지라도
성령을 통하여 당신과 하느님 아버지, 그리고 우리와의 친교,
또한 우리들 사이의 친교 때문에 빌라도의 왕권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는 진리라고 고백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인 사랑이 진리이고,
하느님 아버지의 보편적 구원의지가 진리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세례성사로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된 우리는
진리가 통치하는 그분의 나라에 모여
알파요 오메가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할 것을 믿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우리를 지배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진리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을 임금으로 섬기기는 사람들이고,
하느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강론] 그리스도왕 대축일 - 방효익(바오로)신부님
2006. 12. 2. 오전 2: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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