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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사순 제 4 주일 2007. 3. 18. 토평동.
여호 5, 9ㄱ.10-12. 2코린 5, 17-21. 루카 15, 1-3.11-32.
잃었던 양을 되찾은 것, 잃었던 은전을 되찾은 것에 이어 잃었던 아들을 되찾는 비유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일련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시고자 하는데, 그 최종판으로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극단의 예를 선택하십니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그중 막내가 자신의 몫을 달라고 청합니다. 신명기(21, 17)에 따르면, 작은 아들은 자신의 몫으로 3분의 1을 요구할 수 있었고, 아버지는 그것을 들어줄 수도 거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몫을 떼어줍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되도록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나 자신의 자유를 누리고 싶어합니다.
아무런 구속이 없는 자유를 바라고, 쾌락을 꿈꿉니다.(누구나 한 번쯤 이런 꿈을 꾼다. 젊을 때, 아직 제 힘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여길 때) 그리고 그는 멀리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는 곳에서 바탕이 무엇인지 보여주듯이 허랑방탕한 삶을 삽니다. 그러나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삶이 다 그렇듯이 그는 이내 가산을 탕진하게 되고, 결국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돼지를 부정한 짐승으로 알고 접촉하는 것조차 꺼리던 유다인이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가 겪는 비참의 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내가 아주 잘못했습니다. 허랑방탕 생활을 하고, 가산을 탕진했습니다. 아주 밑바닥 나락으로 떨어지고 비참합니다. 아버지께 제 몫을 달라고 떵떵대고 나왔지만, 지금 내 모습은 초라하고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아버지께 돌아간다는 것이 면목이 없고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부정하다고 여기는 일을 하며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과 아버지 뵐 면목이 없어 도저히 돌아갈 수 없는 부끄러움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부끄러움이 클까요?
내가 잘못했을 때 어찌 그분을 뵐 수 있겠는가? 라는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차마 돌아가지 못하고 더 나락으로 빠져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때라도 주님께 돌아올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혹시 내게 큰 잘못을 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가까운 지인에게 큰 잘못을 했습니까? 잘못한 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용서를 빌어야겠는데, 차마 뵐 면목이 없는 경우 있죠? 알면서도 그 앞에 설 용기가 나지 않는 경우 있죠? 주님께도 그렇죠? 잘못을 빌려고 고해소에 가야하는데, 그런 용기가 나지 않는 경우 있죠? 그래도 죄 상태에, 잘못한 상태에 있는 것보다 가서 용서를 청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혹 누군가 그렇게 용서를 청해올 때, 비록 그가 한 잘못이 크다 하더라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분명 그는 그렇게 용서를 빌러 오기까지 큰 용기를 냈을테니 말이죠.
둘째 아들은 자신의 처지가 부끄럽기 그지없었지만, 돌아가기로 합니다. “제 정신이 들었다”(루카 15, 17)고 하는데, 예수께서 아람어로 말씀하실 때, 히브리말에는 회개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불행이 그를 정신 차리게 한 것입니다. 꼭 절망적인 상태, 불행한 상태가 되었을 때에야 정신을 차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의 자화상인지도 모릅니다. 내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작은 아들처럼 지금 세상에서 내 몫이나 달라며 제 멋대로 살다가 어찌 잘못되면, 불행이 오면, 그때에서야 뉘우치며 애걸복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잘못된 것일까요? 사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 그리고 큰 아들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런 기회로 돌아왔다 해도, 그것이 괘씸하다 해도, 어떻게든 당신의 아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돌아오라고! 잘못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잘못했다면, 불행으로 정신차렸건, 절망으로 정신차렸건, 주님께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가끔씩 병자성사를 주러 갈 때 내내 주님을 믿지 않고 밖으로 빙빙 돌다가 병에 걸려 병자성사를 청하는 이가 있습니다. 물론 가족들의 청에 의한 경우들이 많지만, 그런 사람을 보면 얌체 같아서 병자성사를 주는 마음이 불편합니다. 묵상해보니 이것이 바로 큰 아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어떤 기회이든, 그가 그를 통해 통회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를 용서하고 성사를 주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자 오늘 복음에서 작은 아들을 보십시오. 불행, 절망을 통해 아버지께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디 다 그렇습니까? 불행을 통해 다른 이들을 탓하고, 더 절망적인 상황으로 빠지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불행을 통해서라도 돌아오는 이들, 그들은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고, 더 감싸주어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주었다고 해서, 그렇게 절망을 통해 아버지의 품에 돌아오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 15, 31)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뜻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늘 주님 곁에 있는 것, 그것이 참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느껴야 합니다. 큰 아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했기에 행복을 불행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매일 매일의 삶을 큰 잔치를 벌이며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미 복음 서두에서 알 수 있듯이 아버지는 아들의 몫을 주었습니다. 단지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있기에 그 도덕적 권한이 아버지에게 있었을 뿐이죠. 그는 분명 원하면 잔치를 벌일 수 있었고, 매일 매일의 삶을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매일이 은총인 것입니다. 잔치를 벌이려고 하면 얼마든지 벌일 수 있습니다. 큰 아들에게는 그런 권한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종이라 여기며 아버지는 내가 일한 것에 대해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잘못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펑펑 터뜨리는 이벤트를 원하지만, 매순간 그리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돌아온 아들에 대한 큰 잔치가 아니라 매일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워하고 행복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처럼 동생이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잔치를 베풀어줄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큰 아들은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이고,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주님과 살면서 어떤 큰 감동을 주는 사건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감사하며 행복해 한다면, 매일의 삶이 은총인 것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다가 가족을 만나면 한없이 행복하지만, 그렇다고 멀리 떨어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지금 함께 하고 있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느껴야지요. 그런데 우리는 왜 그리 아둔한 것인지….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어찌되었건 아버지의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두 아들이 집에 있을 때에도, 아들이 집을 나갔을 때에도, 그리고 아들이 돌아왔을 때에도, 아들이 투덜거릴 때에도, 아버지의 마음은 한결같이 사랑입니다. 단지 변하는 것은 나인 것이죠. 이랬다 저랬다, 떠났다가 돌아왔다가, 불평을 늘어놓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변덕스럽게 변하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늘 한결같습니다. 늘 그런 모습으로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분이 바로 아버지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한결같은 주님의 사랑을 믿고 그 사랑에 기대야 합니다. 나도 그 사랑에 동참해야 합니다. |
다해 사순 제 4 주일/아버지의 마음은 한결같이 사랑 - 조성호 신부님
2007. 3. 19. 오전 9: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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