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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사순 4주일 루가 15,1-3;11-32-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사순 제 4주일은 전례 상 ‘기쁨의 주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는 사순절의 반이 지났기에, 목적지에 가까이 왔다는 기쁨에서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마치 등산객이 산 중턱을 넘어서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볼 때 느끼는 환희와도 같습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꼭대기를 바라보며 곧 도착할 수 있다는 부푼 희망에 또다시 새롭게 출발하라는 의미입니다. 기쁨의 주일인 오늘 복음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시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 말씀입니다. 복음 말씀을 묵상하다보나, 정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맞는 말이구나 생각이 듭니다. 정말 그렇게 자신이 부모의 속을 상하게 하고, 심지어는 마음에 못을 탕탕 박아 놓더라도.. 자식의 사과와는 상관없이... 자식의 사과를 뛰어넘어 용서해주는 것이 세상 모든 부모님들의 마음입니다. 복음은 늘 자식의 모든 허물과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변함없이 사랑해 주시는 부모님의 모습과 마음을 하느님의 모습과 마음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떠나간 아버지의 품으로... 하느님의 품으로 되돌아올 것을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을 대하며 소홀히 할 수 있는 문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하느님의 품으로 되돌아가야 할 아들은 둘째아들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곧, 회개해야할 존재는 둘째 아들만이라는 그릇된 판단입니다. 물론, 지금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 라는 제목이지만, 공동번역에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 라는 제목이어서 둘째 아들에 초점이 맞춰진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둘째아들의 모습의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물론, 쉬는 교우들을 둘째 아들로 생각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쉬는 교우들을 둘째아들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바로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하느님의 품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과 교회에 잘못을 했으니, 가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청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떠나간 하느님의 품으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늘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지만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큰아들의 경우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이 큰아들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반성해 봅니다. 큰아들은 늘, 아버지와 함께 살아간다고는 하지만, 정작 마음으로는 아버지를 떠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집나간 동생을 부러워하며 ‘나도 그렇게 할걸..왜, 무엇 때문에 그러지 못했나... 큰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인가?’ 라며 아버지를 비난하고, 동생을 미워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불평과 불만, 분노 속에서 살아갔기에, 동생이 돌아오자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이 그렇게 못마땅하게 보이고, 미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싸였던 불만을 터트리며, “이게 뭡니까? 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면서, 동생이 오니 잔치를 베풀어 주시다니요.” 라며 아버지께 대드는 것입니다. 도저히 잔치 집에 갈 수 없다며 떼를 쓰는 것입니다. 종종, 아니 너무나 자주, 큰아들의 모습일 때가 있습니다. 교회의 계명이.. 고해성사를 보아야하는 것이 귀찮고 부담되게 느껴지고,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으로만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고 많은 모임 활동과 봉사활동을 하면서도 남의 눈치나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행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봉사의 기쁨도 없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자신의 자유, 재능, 시간 등을 내어드리는 것의 의미를 잘 모르게 됩니다. 상대방의 대해 쉽게 말을 하며 판단하게 되고, 상대방을 시기, 질투하는 것을 넘어, ‘에이, 저 사람 있으면 나 성당에 다니지 안허켜...’라며 냉담에 까지 이르게 되는 모습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모습은 바로 아버지와 늘 함께 살아간다고 하지만, 정작 그러한 아버지를 떠난 큰아들의 모습입니다. 늘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간다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하느님을 떠나 있는 모습입니다. 하느님을 위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신앙이 아니라, 자신의 만족, 이익만을 위한 신앙인 것입니다. 때문에, 이런 경우는 늘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정작 아버지 편에서는 잃어버린 아들이요, 되찾아야할 아들인 것처럼, 늘 하느님과 함께 살아간다고 하지만, 하느님을 떠난 신앙인 것입니다. 잠시, 생각해 봅시다. 과연 하느님 앞에서 나는 큰 아들일까요? 작은 아들일까요? 작은 아들이라면, 자신의 잘못을 겸손되이 인정하고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청하면 됩니다. 실제, 하느님께서도 ‘잘못의 인정’ ‘죄의 고백’만을 원하십니다. 그러한 고백을 한 순간, 우리는 초라한 옷을 버리고, 영적인 옷으로 갈아 입혀 주십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새신을 신겨 주며 잃었던 지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처럼 둘째아들의 경우는 성당에 나오지 않아서 문제지, 나온 경우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고해 성사를 보는 그 순간, 이 모든 것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큰 아들이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회개할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린 많은 잘못과 허물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말처럼, 하느님과 함께 있으면서, 정작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아버지와 큰아들의 대화중 아버지말만 전하고 큰 아들의 말이나 행동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큰 아들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결단과 행동을 요구하기에 그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큰 아들의 모습이든, 작은 아들의 모습이든, 아무 상관없이 사랑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당에 나온 오늘 이 순간만은, 우리는 작은 아들이 아니라, 큰 아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위해 준비한 하느님의 잔치집 앞에서...“애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라는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우리는 어떠한 결단을 내리고, 행동을 해야 하겠습니까? 잔치 집에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여전히 잔치를 베푸시는 하느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는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라는 둘째 아들의 진정한 통회와 용기가 그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느님께서도 자녀인 우리를 이기지 못하는 그러한 부모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
3월 18일 일요일 ..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 이찬홍 신부님
2007. 3. 18. 오전 8:2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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