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일 2007년 3월 18일
루가 15,1-3.11-32.
예수님 시대 유대교의 실세인 율사와 제관들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사람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하느님이 그들을 벌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은 하느님이 죄인에게 내리신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그들과 전혀 달리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기원이고 우리를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자녀가 부모로부터 인간으로 사는 길을 배우듯이 사람도 하느님으로부터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삶을 배워 세상에 그분의 생명이 살아 있게 해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사들이 예수님에 대해 불평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교가 하느님이 죄인을 벌하신다고 생각한 것은 우리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원리를 하느님에게 적용하여 상상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과응보의 질서 안에 삽니다. 잘 한 사람 상주고 잘못한 사람 벌주는 것을 당연시 하는 질서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정의를 생각하며 설계하는 사회의 질서입니다. 유대교는 우리가 지향하는 질서를 연장하여 하느님에게 적용하였습니다. 하느님도 그런 질서 안에 계셔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자비로우신 아버지라고 믿으셨습니다. 자비는 인과응보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을 초과하는 하느님의 질서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부모는 인과응보에 준해서 자녀를 대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자비로 감싸서 키웁니다. 부모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지 않았다면, 이 세상의 어느 자녀도 살아남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비유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 어떤 아버지이시며, 그 하느님의 가치관이 지향하는 질서가 어떤 것인지를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아 집을 떠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방탕한 삶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폐인이 되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배가 고파서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옵니다. 그는 아버지를 버리고 재물과 쾌락에 심취하였습니다. 그는 이제 재물을 모두 잃었고 이제는 배고프다는 사실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 집에서 종들이 먹는 음식이 생각난 것입니다.
이 아들에게 아버지는 유산을 주는 인물에 불과합니다. 그는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사랑 같은 것은 모릅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 집에 가기 위해 아버지에게 드릴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이 아들은 아들이기를 포기하였습니다.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살기 위해 오지 않고, 품꾼이 되어 먹거리를 해결하겠다고 옵니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의 아버지는 자식을 버리지 않습니다. 복음서는 말합니다.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다시 베풉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아버지는 잔치를 벌이라고 명령합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하고 그 아들을 다시 아들로 맞아들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큰아들은 아버지를 버리지도 않았고, 아버지에게 충실한 아들로 살았습니다. 그는 자식으로 지켜야 할 바를 다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 큰아들은 아버지의 자비와 용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인과응보 원리에 준해서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자비로운 아버지의 마음이 그에게는 소중하지 않습니다. 그는 지킬 것을 다 지키지 않은 아우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아들을 용서하며 다시 아버지가 되어 주는 아버지의 처사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큰아들은 형제를 죄인이라고 버리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 시대의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그런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자기 생명의 기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지킬 것을 다 지켜서 벌을 받지 않겠다는 수작도 아니고, 하느님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 누리기 위한 수작도 아닙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생명의 기원이시기에, 하느님의 질서, 곧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자비의 질서를 배우고 익혀서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하느님의 질서를 배워서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비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병자를 만나면 고쳐 주고, 마귀 들렸다고 인식되던 간질 환자나 정신 질환자를 만나면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 이야기들 안에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하는 것은 ‘불쌍히 여기셨다’, ‘가련히 여기셨다’, ‘측은히 여기셨다’는 복음서들의 언급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실천하신 것이었습니다.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들이 있어서, 이 세상은 살 가치가 있는 좋은 세상입니다. 자비와 용서가 있어서, 우리를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더 살맛나고 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있는 세상이 되도록 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 자녀들을 행복하게 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세상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