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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2006. 12. 31. 토평동.
집회 3, 2-6.12-14. 콜로 3, 12-21. 루카 2, 41-52.
아이들의 키가 작으면 아빠 탓을, 몸무게가 많이 나가면 엄마 탓을 해야 한다고 영국 로열 데번 앤드 엑세터 병원의 연구 결과는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맞는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꼬 내 것을 남탓(물론 부모이지만)으로 돌리는 것 같아 마음으로는 수긍하기 싫은 결과입니다.
아이들의 키든 몸무게이든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적어도 신앙에 있어서만큼은 부모의 영향이 큽니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어떤 모습을 보였느냐에 따라 아이의 신앙관은 달라지고, 자라서도 자신의 뜻에 의해 잠시 외도는 있을 지언정, 부모의 신앙은 돌아올 배경으로 탄탄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그 믿음 자체만으로 현세의 삶의 무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그렇다고 한다면 주 예수를 모신 성모님이야말로 태평한 삶을 살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성가정의 모습도 늘 무사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복음도 역시 그런 측면에서 묵상해본다면 부모가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이가 부모의 애간장을 태우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죠. 그러나 이 가정이 성가정이 되는 것은 주님을 믿는 모습에 뿌리가 있습니다. 부모는 주님을 믿는 마음에 신앙인으로서의 삶에 충실했고, 아이(예수) 역시 아버지 하느님과 일치되는 마음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버지의 집에 있는 장면을 연출합니다. 이런 모습에서 서로에게 이해될 수 없는 상황은 신앙 안에서 이해되고 풀어지는 것이죠.
부모는 애타는 마음을 진정하고 곰곰이 아이의 뜻을 생각하며, 아이는 주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이 옳음에도 부모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신앙 안에서의 선택이요 결단입니다. 이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초대하는 것은 바로 이 마음 때문입니다. 성가정이 늘 일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일치하는 화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의 근저에는 부모의 신앙이 있습니다. 인간 예수를 떠올리십시오. 당신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는 그 삶을 가르쳐준 부모와 배우는 예수를 떠올려야 합니다.
행복이란, 성가정이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며 자그마한 사랑이라도 나누게 될 때 지금 당장 그 열매를 맺지는 못하더라도 씨앗이 되어 점점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특히 아이들은 부모가 행하는 그 사랑을 배경으로 자라납니다. 어렸을 아이들은 부모와 결혼하고 싶어합니다. 지금 물어보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만, 누구나 한 번쯤은 딸은 아빠와 아들은 엄마와 결혼하고 싶어 합니다. 만일 그 바램이 커가면서 바뀌게 되었다면 현실을 알게 되었다는 이성적인 요인 말고 우리 부모들의 모습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 그것은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병풍입니다. 아이들이 병풍처럼 자신을 둘러싸 배경을 이루고 있음을 본다면 표현이 미숙한 그 아이도 결국 부모처럼 자라게 될 것입니다.
성가정 축일을 지내며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 그리고 예수의 모습에서 각자의 모습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아버지는 요셉의 손을, 어머니는 마리아의 손을, 자녀들은 예수의 손을 잡고 하느님께로 영적인 여정을 떠나도록 합시다. 그 길이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
다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부모의 영향 - 조성호 신부님
2007. 1. 2. 오후 1:4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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