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성탄 대축일 다음에 맞는 주일을
성가정 축일로 지내면서 우리들의 가정을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제1 독서(집회 3,2-6.12-14)를 읽고 저는 부끄러움이 앞섰습니다.
집회서의 저자는
가장 으뜸가는 지혜(집회 2장)는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고,
버금가는 지혜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자녀들을 가진 아버지와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해주셨고,
자녀들에 대한 권리를 보장해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집회서에서 말하는 영광스러움이란
단순하게 명예나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봉사와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모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집회서의 저자는
내가 부모에게 하는 만큼
내 자식들도 그것을 본보기로 나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부모님께 효도를 잘 한다고 합니다.
특히 늙으신 부모님을 봉행하는 일이야말로
인내심을 가지고 해야 하며,
늙으신 부모님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모에 대한 효행은 죄를 상쇄할 만큼 커다란 효력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루카 2,41-52)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지혜와 은총이라는 틀 속(40절과 52절)에 넣으면서
12년을 껑충 뛰어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린 예수님에게서 돋보이는 지혜(46-47절)와
지상의 부모님의 뜻보다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예수님의 사명을 드러냅니다(49절).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양육되면서 예수님은 율법의 아들로 성장했습니다.
정통 유다인이며 다윗의 후손으로 성장하는 예수님은
아직 어린아이이면서 지혜가 넘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의 풍습에서
12살이라는 나이는 이미 성년에 이르렀음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부모들이 아이를 잃어버린 것을 마치 전혀 모르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었지만
부모는 이미 오래전부터 긴 행렬을 샅샅이 뒤지다가
하룻길이 다 끝났을 때에는 잃어버린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뜻입니다.
잃어버렸던 아들을 찾아낸 부모는 깜짝 놀랍니다.
마냥 어린아이로만 알았던 예수님이
율법 교사들과 논쟁을 하면서 슬기로운 대답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들 예수를 통해 부모님은 영광스러움을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던 루카복음사가는
모자간의 대화를 삭막하게 묘사합니다.
몹시 걱정을 하셨던 어머니 마리아께서
“왜 이렇게 하였느냐?”고 물으시자
어린 예수님은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렸다는 뉘우침보다는
오히려 저항이라도 하듯이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라는 질문으로 답합니다.
아들이 자랑스러웠지만
애간장을 녹여야만 했던 마리아의 질문을
모든 어머니라면 당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아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 마리아께 드린
예수님의 질문은 매몰차게 들립니다.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의 사명과 직무에 차이가 있음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현장에 있어야 함을 어머니께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미 하느님 아버지의 사명을 실천하고 계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루카복음사가는
부모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당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부모님들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요셉의 말씀이 없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루카복음사가의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었고,
이미 성년에 이른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계명(탈출 20,19)을 잘 지키는 가운데
순종하며 지냈고,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했다고 합니다.
자녀의 순종적인 모습과 가능성을 보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부모의 입장을 강조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사무엘이 그랬던 것처럼(1사무 2,26),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갔다고 합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사람들의 총애만 받게 하는 교육에 매달리기 때문에
루카복음사가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게 하는 교육이
더욱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요셉과 마리아께서는
철저하게 고대 그리스의 교육철학의 삼대요소인 지혜, 덕,
그리고 체력을 모두 아우르는 전인적인 교육을 시키셨음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의 총애보다는
하느님 아버지의 총애를 받게 가르치셨고,
지식을 주입시키기보다는 지혜를 쌓아주셨고,
자기가 누구이며,
자신이 완수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게 하는 교육을 시키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아랫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
“요즘 아이들 왜 이래?”라는 말을 가끔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듣지 않고 자란 세대가 있을까요?
우리들 역시 이런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서 근본적인 것은 변하지 않지만
그 근본적인 것을 실행하는 방법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부모를 공경하고 자녀를 양육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것이 달라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에 따라서
삶의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 근본적인 것을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할 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이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자신만의 고유한 몫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르다는 것을 틀렸다는 것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창조적 특성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이기도 한
다르다는 것은 상대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어우러질 수 있고,
나와 다르기 때문에 나를 채워줄 수 있고,
나와 다르기 때문에 대화가 가능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르지만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 있어서는 우리 모두 똑같습니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
부부 사이에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몫이 있음을 분명하게 알고
출발한다면 대화와 이해가 한결 쉬워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흠숭하는 일은 물론이요,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 있고 당당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예수님을 은총과 지혜로 충만하게 길러주신 요셉과 마리아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부모님과 자녀들을,
그리고
부부가 서로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돌이켜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제2 독서(콜로 3,12-21)를 다시 한 번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강론] 성가정 축일 -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2007.01.01
2007. 1. 2. 오후 1:2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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