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1독서(바룩 5,1-9)에서
예레미아 예언자의 비서였던(예레 32,12-13.16; 36,4-5; 45,1) 바룩 예언자는
제2 이사야서와 제3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방을 선포합니다.
“주님의 도성”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시온”(이사 60,14)인 예루살렘을
하느님께서 다시 세워주실 때에는
“다시는 너의 땅 안에서 폭력이라는 말이,
너의 영토 안에서 파멸과 파괴라는 말이 들리지 않으리라.
너는 너의 성벽을 ‘구원’이라,
너의 성문을 ‘찬미’라 부르리라.”(이사 60,18)고 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방과 구원을 선포하는 희망적인 예언입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갈 곳인 예루살렘은
이제부터
정의와 평화의 도시,
경건함으로 인해 영광스러운 도시라고 불릴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해 해방을 체험한 이들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밖에 없다는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의 고통스러운 유배의 길을 전제하면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에는
굽었던 길이 꼿꼿하게 펴지고,
높은 골짜기는 메워져 평평하게 될 것이며,
사막성 토양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나무와 꽃들이 향기를 뿜어낼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지할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지한다는 것은
자신은 가만히 있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알아서 처리해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를 구현하려는 노력에서 얻어지는 결실이고,
평화를 추구하려는 열정에서 솟아오르는
하느님께 대한 충실한 사랑과
경건함에서 비롯되는 예배가 전제될 때에 가능한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룩 예언자는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려는 노력이 전제될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해방과 기쁨을 체험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3,1-6)은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이 땅에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실 분이 나타났음을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 결정적인 용단을 내리실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메시아가 오실 것을 선포하면서 백성을 준비시키십니다.
메시아가 지나가실 깊은 골짜기를 메우고,
굽은 길을 펼치고,
험한 길을 고르게 해야 할 자신의 사명을 전제하면서
세례자 요한은
마치 광야에서 목 놓아 외치며
사랑과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이사야 예언자의 말(이사 40,3-5)을 인용하면서
보편적 구원,
즉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해 해방을 체험하고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을 선포합니다.
해방과 구원에 대한 기쁨의 맛은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려는 노력이 전제될 때에 가능하다는
바룩(예레미아와 이사야) 예언자의 사상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2 독서(필리 1,4-6.8-11)에서 바오로 사도는
해방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해야 할 사명을 이어받은
필립비의 신자들에게,
아니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복음을 전하는 일을 상기시키면서 격려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바로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려는 노력이며,
이 노력은 주님께서 오시는 날까지,
즉 자신의 삶이 다 끝나서 주님을 만나게 되는 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일이라고 합니다.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일,
즉 복음을 전하는 일이야말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훌륭한 일이라고 하면서
만일 복음을 전하게 된다면
주님께 대한 지식과 이해로 더욱 풍부해진 사랑으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사랑은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추어
점점 더 풍성해져서
가장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성경에 대한 참된 지식과 분별력이야말로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데 있어서
중요한 실천적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일,
“주님의 도성”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시온”인 새로운 예루살렘,
즉 교회를 세우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는 물론이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깊은 골짜기를 메우고,
왜곡된 사상으로 굽은 길을 펼치고,
험한 길을 고르게 해야 할 사명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일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선포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실천해야 할 일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 실천했던 것입니다.
이유 없는 차별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깊은 골짜기에서,
자기중심적 생각으로 왜곡된 굽은 길에서,
그리고
폭력과 권력과 금력으로 험해진 “갈림길에 서서 살펴보고, …
좋은 길이 어디냐고 물어
그 길을 걷고 너희 영혼이 쉴 곳을 찾으라.”(예레 6,16)고
예레미아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독서들의 의미에 맞추어 한국 교회는 인권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인권 상황은 아직도
무전 유죄, 유전 무죄,
즉 제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돈이 있으면 죄 없는 것처럼 풀려날 수 있고,
돈이 없으면 죄가 없어도 죄가 있는 것처럼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 오고가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의와 평화를 무시하고,
객관적인 잣대인 하느님의 말씀,
즉 자연법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
권력에 따라서,
그리고 개인적인 욕심에 따라서 많은 것들이 바뀌는 현상이
아직도 비일비재한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오늘날 같이
다양한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욕심을 추구하는 일이 다른 이들의 인권을 박탈하고,
고통을 안겨준다는 것을 의식조차 못하는 일이 매일,
아니 매순간 일어나고 있습니다.
통신의 발달로 인한 문명의 이기를 통하여
비록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더욱 엄청난 폭력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모두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의 겉옷을 걸치고,
영원하신 분의 영광스러운 관을 머리에 쓸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이 해방을 체험하는 구원의 기쁨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비인간적인 처사가 난무하는 깊은 골짜기를 메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편의만을 앞세워 주장하는 권리보다는
보편적인 공평과 정의를 앞세워 주장하는 하느님의 법(자연법)이 우선하도록
굽은 길을 곧게 펼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찮은 권력이나 금력이라는 높은 언덕을 깎아 내려서
어떤 처지에서 살든지 밝은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험한 길을 고르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련한 이런 길을 통하여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이고,
우리는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제1 독서의 바룩 예언자의 외침이요,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며,
바로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오늘
천사 복장을 한 두 어린아이들이
대림시기를 상징하는 네 개의 초들 가운데 두 번째 초까지 불을 켰습니다.
세상을 밝힌 것입니다.
성탄절,
그리스도의 탄생이 그만큼 가까이 다가온 것입니다.
나머지 대림기간을 잘 지내면서
오늘 화답송의 말씀처럼,
비록 울면서 뿌릴 씨를 들고 갔다 할지라도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강론] 대림 2주일-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2006. 12. 10. 오전 11:5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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