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아름다움

2008. 10. 18. 오후 2:5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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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아름다움


직접 만져지는 자연의 감촉, 예를 들면 숲속에서 손에 닿는 꺼칠꺼칠한 나무껍질이나
풀이파리, 수확을 끝낸 보리밭을 걸을 때 발에 닿는 그루터기의 감촉을 프란치스코는
좋아 했다. 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느끼고 있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최후의 소원을
'유언장' 형식으로 레오에게 구술하게 했다. 형제들에게 주는 최후의 격려인 이 기록 속에
프란치스코는 이제껏 배워온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었다.

"다음 한 줄은, 나에게 특별히 소중하게 생각되는 것이네. 그러니 레오여, 모쪼록 마음을
가다듬고 정성을 들여서 써주기 바라네. '나는 스스로 일해 왔으며, 형제들 모두에게도
스스로 일해주기를 바랍니다.'"

프란치스코는 옛날에 곧잘 우울증에 걸렸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우울한 기분이 마음속에 버티고 있어 아무래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겠다 생각되면
언제나 그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심한 노동을 하곤 했다. 가령 제일 좋아하는 천사의
성마리아 성당의 보수공사를 위해 큰 돌을 하나하나 손으로 나르는 따위의 일이었다.

이런 작업을 하고 있으면, 돌이 차례차례 쌓아올려짐에 따라서 마음속의 혼돈된 상태도
서서히 질서가 잡히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최후의 돌을 모르타르로
고정시켜 끝냈을 때에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을 맛보았다. 뭔가를 해치웠다는 느낌,
혹은 혼란과 절망을 극복해내어 질서를 바로 세웠다는 느낌을 가질 수가 있었다.

또 아씨시 근교의 농가에서 밭일을 도와주던 추억은 차가운 병상에 누워 있는 지금도 그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준다. 신발을 통해 전해오는 발밑의 대지를 밟는 기분, 발등을 덮는
풀잎의 간지러운 느낌마저 떠올릴 수 있다. 참으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보수나 기대도
없이 열심히 일했었다. 한집에서 일이 다 끝나면 다른 농가로 구걸을 하러 갔었다. 노동과
봉헌은 이렇게 해서 하나로 맺어진 것이다. 하루를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희사를 바랄 수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조심해서 자기가 하루 동안 내내
밭일을 도와 일한 것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회사받도록 했다. 그것은 자기의 공로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에의 사랑을 위한 희사를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는 게으름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때로는 하루를 '일거리를 찾는
일'로 끝내고만 일도 있었다. 저녁 때가 될 때까지 일거리가 발견되지 않았을 때에도 그는
당당하게 희사를 받으러 가곤 했다. 이런 날일수록 열두 시간을 밭일을 한 날보다도 한층
더 많은 일을 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거리를 찾아 헤매어도 아무래도 찾을 수 없을 때, 그는 자기가 아무 소용에도 닿지
않는다는 소외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한 때는 조금 생각을 돌려 들에 핀 백합에게
해주시는 이상으로 사람에게 잘해주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회상해 보곤 했다. 때로는
길가에서 들판의 백합꽃이 시들어 있거나 새가 죽어 있는 것을 볼 때가 있었다. 그런 것을
보면 프란치스꼬는 두려움을 느꼈다. 다만 하나 위로가 되는 것은 꽃이나 새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죽음에 관해서 미리 고민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나도 자유로와지고
싶으면 죽음을 무서워해서는 안된다. 죽음은 언제인가 올 때가 되면 찾아오고야 마는
것이며, 하늘 높이 날아올라 열심히 노래를 지저귀고 있다가 총에 맞아 땅 위로 떨어져
죽는 종다리같이 한참 도취되어 있는 순간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프란치스꼬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 영혼은 큰 기쁨으로 깃털을 벗어던지고 구름 한점 없이 갠 자유의 푸른
하늘을 향해 날아가리라. 그러면 어느 사이엔가 어떠한 괴로움도 아픔도 죽음도 나를
괴롭힐 수 없을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그 도취의 순간을 밭일을 하면서 맞이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형제인
당나귀 - 그는 자신의 육신을 언제나 그렇게 부르고 있었는데 - 는 거기까지 가기 전에
지쳐버려 그는 벌써 얼마 전부터 일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우습게도 이 '일할 수 없다는 것'이 이제까지 해온 어떤 노동보다도 가장 힘든 것으로
느껴진다. 신앙과 희망 속에서 지탱되어 온 사랑을 제외하고는 신변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모든 면에서 완전히 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청빈의 귀부인으로부터 최후로 받은 마음으로부터의 구애였다. 최후까지
충실하게 사랑 속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두 번째의 신혼시대를 맞이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을 프란치스꼬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전부를 완전히 청빈의 귀부인의
손에 맡겼다. 정직하게 일해야한다는 남자로서의 의미조차 버렸다. 그리고 청빈의 귀부인
품 속에서 비할 바 없는 평온을 얻었다. (옮겨온 글)
 
 
 
피정 강의중에 수녀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 납니다.
"수녀원을 건축중 뜨거운 여름날 뙤약볕 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노동을 하시는 분들의 얼굴
안에서 빛나는 맑은 영혼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그분들이 흘리는 땀안에서 영혼의 무르익음
을 보게 됩니다."
 
베네딕도 수도회에서도 (기도하며 일하라)노동을 중요시 하고 있으며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도 게으름에 빠지는 것을 무척이나 두려워 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열심한 노동 안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다면, 우리의 영혼
이 좀더 맑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댓글 1

  • 2008년 10월 18일 오후 7:14

    믿음 안에서 노동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는 말씀이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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