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40년생으로 71세이고 1962년 8월12일 서울대교구 종로4가 본당에서 이계중 신부님의 집전으로 세례받은 천주교 신자이다.
그때 나는 서강대학교에 입학한 스믈두살의 신입생이었다. 그해 우리가족은 대한극장 앞 인현시장의 삐그덕 거리는 양철지붕 2층에 세들어 살았는데 고교 동기인 친구(세례명 분도 라브르) 소개로 입교한 것이다. 예비자 교리반에 들어가 "천주교리 문답"이라는 360 문항 교리서를 달달 외우다 시피하며 교리를 배웠으며 6개월 뒤에 8월 성모몽소승천대축일(=성모승천대축일)에 내 일생에서 가장 감격적인 마음으로 첫번째 성체를 영했다. 이때의 온몸이 떨리는 성체 모심의 감동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의 신앙심을 붙들어 주어 보잘 것 없이 작은 나에게 주님을 사랑하며 영광을 되 돌려 드리는 찬미가를 부르게 하였다. 나의 신앙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당시는 미사 전례 때 벽에 모신 예수그리스도 고상 아래에 제대가 있었고 집전 사제는 신자들에게 등을 보이는 모습으로 제대 앞에서 전례를 집전했고 가끔 돌아서서 팔을 벌리며 신자와 얼굴을 마주보며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라는 기도를 라틴어로 하면 신자들은 "에꿈 스삐리 뚜또"라고 화답했다. 물론 나는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고 옆의 신자가 하는 대로 따라 하는 초보자였다.
그리고 그해 9월20일 나는 육군 징집영장을 받고 서울역에서 기차로 부산에 갔다. 병적지가 6.25 때의 피난지 부산으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집결한 다음 논산 훈련소에 입대했다.
그런데 입대할 때 친구가 선물로 준 묵주를 기도할 때 사용하는 성물인 줄 모르고 마치 목거리처럼 생겨 훈련 중에도 목에 걸고 받았다. 묵주기도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훈련장에 엎드려 벅벅 기는 각개전투 훈련을 받았으니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묵주 줄이 여러번 끊어졌고 그러면 막사에 돌아와 계속 이어 목에 걸고 다녔다.
훈련을 마치고 그해 11월20일경 강원도 춘천의 제3보충대(당시는 춘천역 인근 103보였으나 지금은 춘천의 용산으로 옮겨진 102보충대)를 거쳐 최전방 양구 지역에 배속되었다. 2사단 부관 참모부에서 복무했는데 기율이 매우 혹독했으며 이등병 졸짜로서 무시무시한 고참병들에게 극심하게 단련받으며 병영생활을 했다.
이런 가운데 막연하게 하느님께 의지하며 쉽게 떠오르는 기도가 주기도문 밖에 없어 제대할 때까지 주님의 기도만 계속했다.
전방 지역의 그해 겨울은 몸시 추웠다. 70년만의 강추위라 했고 인천 앞바다가 얼었다는 뉴스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12월25일 성탄절에 외출 신청을 하여 10리가 넘는 시골 길을 혼자 걸어서 양구읍내에 있는 공소(?)에 나가 처음으로 경건한 성탄 미사에 참례했다.
성탄미사 참례 후 군 가족과 교우들이 나 같은 쫄병들이 죽 늘어 앉은 마당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뜨근뜨근한 떡국을 한 사발씩 주었다. 난 입대 전에 떡국은 입에 안 댈 정도로 싫어 했는데 공소 마당에서 자매들이 준 떡국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었고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논산훈련소 이후 계속 배를 곯아 항상 허기가 져 누가 옆에서 입맛 다시는 소리를 "쩝" 하고 내면 그 쪽으로 무의식적으로 고개와 시선을 돌리던 때였고 뱃가죽이 등에 착 달라 붙은 지경이라 성탄 잔치 떡국이 얼마나 맛 있었겠는가....
한 그릇을 게눈 감추 듯 후딱 치웠는데 봉사하는 다른 자매가 나에게 "떡국 들었느냐?" 하고 묻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약간 망설였지만 시침 뚝 때고 안 먹었다고 했다.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자매가 가져다 준 떡국을 누가 볼새라 공소마당 한구석 뒷켠에 앉아 열흘 굶은 거지보다 더 배고픈 것처럼 데꺼덕 먹어치웠다. 명색이 천주교 신자면서 거짓말을 하고 배를 채운 것이다.
그런데 거짓말로 떡국을 더 먹은 그 일이 두고두고 마음 한구석에 앙금으로 남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7년 쯤 지난 어느 주말에 우리부부는 "M.E" 봉사부부가 되어 당시보다 나은 길 건너 동쪽에 자리잡은 양구 본당에서 봉사팀 일행과 같이 "본당은 우리" "참부모가 되는 길" 이라는 제목으로 그곳 교우들과 피정의 하루를 보냈다. 제대 후에 양구는 혹심했던 군생활 때가 생각나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는데 교회봉사니까 마음 독하게 먹고 봉사팀에 합류한 것이다.
나는 평소 낚시를 좋아 하여 아내와 같이 1980년 8월 1일 여름 주말에 춘성군 지촌리에 사는 송씨가 노 젓는 배를타고 건너편 기슭을 왼편으로 돌아 폐 금광 앞에서 낚시를 했다. 아내는 A텐트를 친 곳에서 기도를 하고 나는 텐트를 등지고 춘천호 수면을 바라보며 두칸반대 두대와 세칸대 하나 등 세대의 낚시대를 드리웠다.
여름방학 때는 전국의 여러 낚시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낚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내는 그 날은 잔소리를 하지 않고 열심히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호수면을 향하여 뭐가 나오나 하며 뒤를 돌아다 보지 않고 낚시대만 응시하는 나의 등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면서....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날 저녁부터 이튿날 정오 조금 지날 때까지 준척급 굵은 참붕어와 30cm좀 넘을 작은 잉어들이 쉴새 없이 낚였다. 나중엔 한대만 가지고 휘두르기도 바쁠 정도로 쉴틈이 없었다. 나의 낚시 인생에서 이처럼 짜릿한 손맛은 그후 두번 다시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길게 드리운 커다란 살림 그물망이 투실투실한 민물고기로 채워져 터질 정도였으니까....
정오가 지나 멀리 호수 한가운데서 배를 세우고 우리를 기다리던 송 씨가 나의 손짓으로 가까이 다가왔고 우리는 기분좋게 낚시 장소를 철수했다. 그런데 귀가 중에 아내가 의미있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여보! 이번에 고기가 많이 잡힌 이유를 알아요?"
아내의 질문에 나는 어리둥절 하며 대답했다.
"왜 많이 잡히다니....? 우선 때를 잘 만났고 떡밥미끼 장만을 잘했고 또 내 낚시 기술이 남보다 좋았기 때문이지 .... 뭘 그런 질문을 다 하오."
아내가 말을 이었다.
"나는 여태껏 낚시에 정신 팔린 당신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았어요. 더러는 주일도 지키지 않고 낚시터에 왔다하면 나에게 등만 보이고 호수 한가운데 물속만 멀거니 정신이 빠져 '뭐 공짜로 나오는 것 없나' 하는 얼빠진 자세가 내 마음속에선 보기가 좋지 않아 바라 볼 때 마다 안타까워서 이번에 꼬박 이틀 동안 당신을 지향두고 다음과 같이 기도를 바쳤어요"
"......???...... 무슨 내용으로 기도를 드렸오?"
"나는 하느님께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쳤지요. 주님! 저기 내 앞에서 번번히 나를 뒤로 하고 호수만 바라보고 있는 흡사 바보 같이 멍청하게 정신 나간 듯한 내 남편 알렉산델 저 사람에게 은총을 허락하소서. 이번에 고기를 많이 잡아 크게 만족하게 해 주신 뒤 앞으로는 제 남편이 우리 교회에서 예수님 따라 사람 낚는 베드로 사도 같은 성실한 당신의 일꾼 어부가 되게 해 주십시오."
"..........!"
이상하게도 그후 나는 2000년까지 레지오 활동을 20여 년간 하면서 전교의 기쁨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았다. 물론 낚시도 전교생활이 너무 바쁘고 또 교회 안과 밖에서 사람 만남이 너무 기뻐서 주말이 되어도 낚시갈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낚시할 겨를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속한 레지오 지단도 단원수가 넘쳐 여러차례 몇개씩 다른 지단이 또 설립되었다. 아무튼 낚시 고장으로 이사를 왔는데도 이제까지 낚시를 한 것이 겨우 한두 손가락 꼽아 볼 정도였다. 낚시로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 못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께 합당한 기도는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말씀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아내와 이웃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지금도 하느님께서 보잘것 없는 작은 나에게 주신 소중한 영광의 모든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영광을 되돌려 바치는 삶을 살고자 미숙하지만 다짐을 하곤 한다.
그런데 요즈음 나의 신앙에 갈등이 생겼다. "신앙은 국가를 초월하지만 신앙인은 국가에 속한다." 라는 삶의 틀속에서 특히 요즈음 들어 마음에 회의가 인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는 국가시책에 반대를 일삼는 풍조가 생겼다. 경우에 따라 정권과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권과 정책 반대의 여세로 우리를 품에 안고 있는 국가(=정부) 체제를 반대하는 무분별한 시류에 깊은 고뇌속에 마음 아픔을 느낀다.
평택 미군기지와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 그리고 4대강 사업 등 국가시책을 반대하는 종교계 일부의 동향이 그렇다. 특히 천주교 일부 사제들의 움직임이 더욱 그렇다. 대부분 그런 인식의 테두리는 남미해방신학 사회주의 기류를 지향하는 사제들이 모두 똘똘 뭉쳐 그렇다고 하니 이를 어찌 하면 좋은가.
남미 해방신학에 젖어든 사제들 거의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그들을 옹호하는 8개 교구 주교들과 그 추종세력이 덩달아 움직일 때마다 국가적 관점에서 볼 때 국민의 한사람인 나는 신앙인으로 가슴이 매우 답답하다.
심지어 정진석 추기경님이 2010년 12월에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를 폭격한 김정일은 더 이상 우리장병들과 국민들의 생명을 빼앗는 만행을 저지르지 말라" 하신 대 이북 경고성 말씀에 정의구현 사제단과 이를 감싸고 도는 강우일주교와 주교단 일부가 합세하여 그 즉시 반대하며 마치 그들이 한국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양,
'정진석 추기경은 반공주의자적인 극단적 발언을 한 것에 대해 용서를 청하고 용퇴하라"
도하 각 신문지상에 대형 광고까지 낸 사실에 세인들이 모두 깜짝 놀랐을 것이다. "천주교가 저런 종교인가?" 하고.
내가 사는 지역도 예외 아니어서 이곳에서도 천주교 사제가 국가시책인 사대강 개발 반대와 제주도 해군기지 반대에 앞장 서고 있다. 그 때문에 대부분 신자들과 사제간에 불협화음이 생기고 있고 그러한 사제를 감싸는 신자들과의 갈등도 심각하다. 그리고 이제는 안타깝게도 교회분열의 기미까지 보인다. 신앙생활도 사제들에게 국가시책에 반대하는 행동을 강요받으며 해야만 하는가.... 이것이 올바른 신앙의 지킬 교리인가....
그래서 우리 가족과 일부 이웃 신자들은 타 본당 미사에 참여하면서 그곳에서 주일을 지키며 불편한 마음으로 떠돌이식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본당 신부 얼굴을 쳐다 보면 분심이 생겨 죄를 지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처럼 피해가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현명함 아닐까.
왜냐 하면 하느님은 우주만왕의 왕이시고 우리 모두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교리를 알린다는 내용들이 일반화된 교리도 아니고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강력히 반대한다는 제주교구(주교회의 의장)주교가 주관하는 여러가지 책자 유인물들을 본당을 떠난 신자들에게 한번도 아니고 의도적으로 계속 쫓아다니며 우격다짐으로 나누어 주고 있다. 정의구현 사제들과 뜻이 맞지 않는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복종을 종용하며 가르치겠다는 것이다. 정의구현 사제단이나 이를 감싸고 도는 주교회의 결정에 복종하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이 된다고 공갈을 치는 형국이다.
개신교 이단인 "여호와의 증인"신자들이 둘씩 짝지어 대문 두드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끈질기게 가가호호 방문하여 나누어 주며 여호와 증인 믿으라고 하는 "파수대" 책자 배부 전교 모습을 방불케 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정의구현사제단과 추종자들의 수법, 그런식으로 활동함이 오늘날 그들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곧 교회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참고적으로 말하자면 선거로 뽑은 주교회의 의장의 뜻이라는 명분으로 신자들을 위협하는 오늘날의 교회내 억지춘향의 가소롭고 슬프기까지 한 딱한 모습이다.
교회에는 "믿을 도리"와 "지킬 도리"가 있다고 한다. 믿을 도리는 절대적이고 지킬 도리는 그때 그때 마다 상황에 따라 만들어져 한시적인 경우가 많다. 대부분 신자들은 "믿을 도리"를 생명처럼 여긴다.
나는 고백한다. 이런 정의구현사제단 중심 이론인 지킬 도리 가르침 테두리를 떠나고자 한다. 그들에게서 해방되고자 한다.
과거 우리에게는 군사독재시대가 있었다. 그때 우리 모두는 고 김수환 추기경님을 중심으로 "민주주의" 사회가 오기를 기도하며 부르짖었다. 고 김수환 추기경님, 그리고 오늘의 이한택 주교님, 김계춘 신부님 박홍신부님 같은 분들이 우리 신자들과 국민들을 영성적으로 범국민 대상으로 표양을 보이시며 지도하셨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대다수 지도자들은 오늘 날처럼 민주주의 사회가 되니까 그 즉시 이제는 좌편향으로 기울어 친북주의적인 공산사회주의적 운동을 하는 운동권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천주교 정의사제단"이란 일부 천주교 운동권 사제들의 행동이 잘못 가는 길임을 강력하게 일깨우고 있다. 교회를 똑바른 길로 이끌며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천주교회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 신앙인들과 공산사회주의 이념 지향 방향인 정의구현사제단 중심의 신앙인들과 점차 극한적으로 대립하고 있어 사회와 교회가 이념대립의 양갈래로 깊은 골을 파며 갈라지기 시작했고 그 삐그덕 소리가 매우 요란한 상황이다. 그들은 주교회의 결정을 권위로 내세워 한국천주교회 신앙인들에게 신앙인들이 제일 공경하는 정진석 추기경님을 물러가라고 반대하며 또 정권이 아닌 국가(=정부)에 반대하라고 저자거리에 나서서 데모질이나 강요하는 지경이 돼버린 것이다. 이 나라 국민인 신앙인들은 주교회의 결정이든 뭐든 내나라 국가시책을 반대하라고 데모를 종용하는 종교단체를 긍정적으로 좋게 바라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자유민주주의를 반대하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두둔하는 해방신학 테두리의 주교들과 정의구현 사제단이 내세우는 이론의 그들 방식의 교회 테두리를 이제 아주 떠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고 김수환 추기경님과 우리 교회의 대들보이신 정진석 추기경님과 이한택주교님과 김계춘 신부님과 박홍신부님 같은 성교회의 똑바른 가르침의 테두리에 기쁨으로 머물며 온전히 "믿을 도리"에 핵심을 두며 그리고 로마 바티칸 천주교회가 공포한 "지킬 도리" 만을 기저로 한 신앙생활을 할 것이다.
나는 지금 정의구현사제단과 그들을 옹호하는 강우일 주교회의 의장이 교회지도자인 울타리를 온전히 떠나 있다. 신앙교리보다 신앙교리를 빗대어 국가시책이나 거론하며 사사건건 반대를 일 삼는 강우일 주교 이하 정의구현 사제단이 가르치려 드는 테두리를 나는 절대로 따라 갈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권을 반대할 수는 있어도 국가 즉 정부를 반대하는 무리들이 주장하는 행위가 신앙영역이라고 우기는 이단자들을 어떻게 따른단 말인가. 천주교 신앙인은 인간을 통치하기 위해 편의상 만들어 내세운 법보다 계시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우리의 하느님이신 한분 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나는 그때 그때의 인간들 제도 틀에서 해방되고 싶다.
나의 지금까지 이어온 삶의 틀에서 나는 다시 확인해 본다.
"신앙은 국가를 초월하지만 신앙인은 국가에 속해 있다"
즉. 여권이 없으면 외국여행도 못하고 사제도 예비군 훈련을 받는다는 쉽고 평범한 말이다.
나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국민이며 천주교 신앙인이다. 나는 정의구현사제단 이론 추종의 37세 정도의 사회관계와 인간관계를 전혀 모르는 나의 주거지의 철부지 본당 사제에게 내가 겪어온 71년의 삶을 "데모" 하라 부추기는 투로 사회참여를 종용하는 얼치기 가르침에 정말로 간섭받기 싫다. 이 시간 이후 두번 다시 나를 의도적으로 준비된 책자를 읽으라 강요하고 추근추근 접근하며 웹상에서 댓글 썼다간 지우고 또 썼다가 불리하면 지우고 달아나는 행동과 비꼬는 식의 신부답지 않은 해괴하고도 해괴한 자들의 이상한 돌출 행위자가 계속해서 따라다니며 나를 칭하여 공부좀 다시 배우라고 가소롭게 가르치려 들지 말기를 바란다.
그들은 소중한 바티칸 천주교회의 신앙을 제일로 하는 나의 시각으로 이단의 세력이다. 나는 한 개인에게 감정이 있어 미워하며 이글을 쓰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나에게는 영원한 신앙 추구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지키며 따르는 내 개인으로 호교적이며 애국적 신념 철학이 있을 뿐이다.
나에게는 훌륭하신 영적 지도신부님들과 주교님들이 많이 계신다. 이분들이 나에게 훌륭하게 가르치신 나의 신앙적 행동임을 아울러 밝힌다.
2011. 12.14.
일선 장병들에게 국가관을 주제로 정훈교육을 시키고 있는
알렉산델 김찬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