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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순은 2008년 도서출판 ‘웅진주니어’(발행인 최봉수)가 펴낸 아동도서《호찌민 이야기》에서 호지명에 대해 “열정적인 생애를 살았다”, “세계최강 대국 미국을 물리친 배트남의 지도자” 라며 극찬했다. |
자유월남(남베트남)은 시종일관 반미 반전 데모를 주도했던 간첩들과 시민, 종교단체들의 조직적인 선전선동으로 미군이 전면철수하자 곧 패망하여 공산화 되었다.
월남은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그 당시 세계 4위, 병력 58만)에서도 월맹(북베트남)을 훨씬 앞섰다. 그러나 국가 지도자급 인사들과 재벌들의 자제 10만 명 이상이 병역기피 또는 해외 유학을 갔거나 군 출신 장군이 운영하는 민간기업에서 근무했다.
지도층의 사리사욕과 부정축재 그리고 황금만능주의와 사회 혼란이 나라를 망하게 한 원인이 된 것이다.
당시의 월남 대통령 티우는 패망할 때 철수하는 미군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리고 허겁지겁 미군이 마련한 군용기에 몸을 실었다. 그때 티우를 수행한 미국의 CIA 요원은 그의 트렁크를 옮길 때마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금덩이가 한쪽으로 쏠릴 때 나는 소리였다.
미군기는 티우와 금괴 트렁크를 싣고 첫 망명지인 대만으로 날았다. 티우는 이란의 팔레비나 필리핀의 마르코스보다 먼저 스위스 비밀은행계좌에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해서 남겼다.
1973년 월맹과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과 한국군이 전면 철수 하자 사이공에는 100여 개의 애국단체와 통일 운동단체들이 수십 개의 언론사를 양산했고 호지명의 베트남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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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월남은 민족주의자와 평화주의자로 위장한 5만명의 간첩들에 의해 패망했다. 사진은 1966년 5월 수도 사이공에서 열린 반전시위 장면
이들은 베트남 전쟁은 민족 간 내전이므로 미국 등 외세가 간섭 할 문제가 아니라면서 미국을 고립시켰다. 그리고 월맹은 월남에 수많은 간첩을 파견하여 동조자를 포섭하고 각 분야에 간첩을 침투시켜 혼란을 조성하는 등 정부가 힘을 집중시키지 못하도록 했다.
1975년 월남은 월맹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패배한 것 이상으로 이들 100여 개 이상의 좌익 단체들 선전전에 먼저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패망 당시 월남에는 공산당원 9,500명, 인민혁명당원 4만 명, 즉 전체 인구의 0.5% 정도가 국가 사회 기반을 크게 뒤흔들고 있었고. 그들 5만 명의 월맹 간첩들은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위장한 채 시민·종교단체는 물론 대통령비서실장과 장관, 도지사 등 권력핵심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미군 전면철수 후에 월남 패망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간 후에 확인되었다. 1967년 치른 자유월남 대통령 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야당지도자 쭝딘쥬도 대표적인 거물 간첩이었다. 그는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 흘리는 모습을 조상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하면서 월맹에 대한 포용정책을 주장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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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반대를 주장하며 1963년 6월 11일 분신 자살한 승려 틱쾅둑(Thich Quang Duc) 이후 월남에서는 종교인들의 분신자살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간첩들이 가장 많이 침투했던 것은 시민·종교단체의 부패척결운동과 반미와 반전 평화운동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선전선동을 통해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대해가면서 국방과 안보를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또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했다.
반공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애국인사와 언론인들이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되었고 그들의 가족과 친지들도 사회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월남은 공산화 이후 지식인, 공무원, 군인, 종교인, 부유층, 그리고 자유월남 정부에 협조한 사람들은 전부 재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적대(敵對)계층으로 분류되었으며 조국을 배신한 배신자로 간주되어 승자의 보복대상이 되었다.
탄압과 차별 학대와 폭정이 자행되었고 전국 각처에 재교육 수용소를 설치하여 적대계층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공안경찰을 증원하여 국민의 일상생활을 감시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못하게 통제했다.
특히 가혹한 육체노동을 강요했는데 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규정하여 부모가 흘린 피와 땀과 자식이 흘린 피와 땀이 합쳐야 나라가 번영한다고 선전하면서 무자비한 노동을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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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북한 전투기 조종사들과 함께 찍은 호지명
논과 밭이 국유화되고 농민은 철저한 3모작을, 일반 국민에게는 헌금을 강요했으며 돈이 없는 자는 노력봉사를 강요했다. 노동자는 한 달에 15kg의 쌀을 배급받아 생활해야 했고 전쟁부채 상환비와 전비(戰費)기금을 내야만 했다.
먹는 것을 철저히 통제하고 수중에 돈이 없게 하여 국민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 철저한 국민재교육을 시행했다. 또한 화폐개혁을 단행, 부를 축척한 모든 것을 부정하여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공산주의자들의 국민 재교육은 공무원은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경찰과 정보요원은 제국주의의 도구(道具)로, 군인은 무력으로 총을 가지고 대항한 사람으로, 문예(文藝)인은 민족정신을 교란시킨 사람으로, 종교인은 국민을 유혹하여 미신에 빠지게 하고 우매하게 만든 사람으로, 자본가는 국민을 착취해 강압적으로 노동을 시켜 반혁명에 앞장섰으며 국민에게 피의 부채를 지고 있다는 죄목으로 재교육을 시켰다.
이와 함께 우리 공산당은 반역자들을 재교육 과정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에 동참할 선량한 국민으로 개조하고 사회에 필요한 사람으로 선도할 것이며 노동을 경험하게 하여 자력갱생의 길을 열어준다고 선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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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은 베트남 전쟁에서 조종사, 갱도병(땅굴파기 병사) 등으로 참전하여 한국군과 미군을 공격했다. 사진은 1990년대 초 인민군 유해가 북한으로 이장된 후 베트남에 남은 묘비 모습이며 이들의 유해는 현재 북한 인민군 영웅열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
한 수용소에 2,000명 정도 수용했으며 수용소는 성(省) 별로 1개 이상 있었고 사이공 주변 등 도시 주변에는 대상자가 많아 여러 곳에 설치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밀림지대에 설치하여 탈출을 방지하고 나무를 벌목하여 수용소를 짓고 개간하면서 식량은 월 9kg을 지급하고 부족량을 현지에서 자급자족하도록 했다.
수용소 방침 자체가 체형(體刑)과 학대를 멋대로 할 수 있게 되어 있었으며 작업 실적에 따라 수용소장의 재량으로 급식의 양을 결정했다.
그처럼 제거하고자 하는 적대계층을 일부러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도 제거할 수 있게 제도를 만든 것이다. 가족이나 다른 국민들, 또 외국의 항의를 피하기 위한 교묘한 방법을 강구한 것인데 수용소 기간에는 면회가 일체 금지되었고 편지도 1년 또는 2년에 한번 보낼 수 있으며 의료혜택이 전무하여 병에 걸리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라리아 등의 열병과 뱀, 전갈의 독충 그리고 영양실조와 미래에 대한 포기는 많은 사람들을 절망하여 스스로 죽게 했다. 자연스럽게 혁명에 방해가 되는 자들을 제거한 것이다.
즉결처분 된 자들을 포함하여 최소 30만에서 최대 2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정확한 통계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군인의 경우 하사관과 초급장교까지는 수용소로 보냈으며 공무원, 종교인, 경제인, 월남 정부 협조자와 그 가족까지 포함하면 최소 100만 명 이상이 재교육을 받았다고 추정된다.
공산치하에서 살기를 거부한 수많은 월남국민들이 해외 탈출을 시도했는데 철수하는 미군을 따라 망명길에 오른 1세대 탈출자들은 미국 등 서방으로 이주하여 비교적 쉽게 그곳에서 정착했다.
그러나 1976년부터 탈출한 대부분의 월남인들은 안전한 이주 또는 재정착의 보장도 없이 무작정 국경을 넘거나 배를 타고 바다로 탈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다른 나라에서 환영받지 못했고 동남아 일대의 바다를 정처 없이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보트피플(Boat People)이라 불리는 월남 난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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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군의 월남 파병은 창군 이래 최초의 해외원정이었다. 대한민국은 동맹국인 미국과 |
1976 년부터 1992년 말까지 동남아지역으로 탈출한 사람들 수는 총 792,893명이며 1979년부터 1992년 말까지 동남아국가들 난민 수용소를 거쳐 최종적으로 난민자격을 인정받아 서방 등 제3국에 정착한 난민 수는 438,436명으로 확인되고 있다.
김정일은 “한반도가 적화통일되면 1천만 명은 도망(탈출이민) 갈 것이고 2천만 명은 숙청될 것이며 남은 2천만 명과 북한 2천만 명으로 공산국가를 건설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 국민 중에는 김정일의 이 같은 말을 헛소리라며 가볍게 흘려 듣는 이들이 많은데 글쎄..과연 안심해도 되는 일일까....
대한민국의 안전 그리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은 미국의 방위공약도 아니고 김정일 집단과의 협상도 아니다. 오직 저들 집단에 맞서 대한민국을 지키겠다는 의지에 의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전쟁은 결국 의지의 대결인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오늘도 진행 중에 있다.




